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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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일은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첫 방송 1주년이었다. 하지만 같이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2020년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대신, 몇 가지 기록을 남겨 본다. 더 잊기 전에, 더 잊혀지기 전에. <기자말>

2. 캐스팅 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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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희 선배는 청초함과 강인함이 있다. 그리고 소년다움과 정갈함이 있다. 열린 마음으로 연출의 말을 경청해주며 눈을 크게 뜨고 살짝 미소 지으며 오케이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좋아, 이후엔 나도 종종 그 제스처를 따라하게 되었다. 지진희 선배는 박무진 캐릭터가 중심을 지키고 서서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 60일, 지정생존자 >라는 육중한 배가 서서히 떠오를 수 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선배의 온화함, 성실함, 그리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쿨한 모습은 같이 하는 모두가 즐겁게 연기할 수 있게 만든 밑바탕이었다. 난 여전히 안경을 끼지 않은 지진희 선배가 낯설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내리고 안경을 밀어올리며 조신한 듯 단단하게 서 있던 박무진이 선배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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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처음 캐스팅이 된 배우는 경호부장 강대한 역의 공정환 선배였다. 2010년 <근초고왕> 조연출을 할 때 만났다. 당시 막 첫째 아이를 가진 신랑이었다. 멋진 배우라고 생각했다. 캐스팅을 너무 일찍 해놓고 제작 기간이 뒤로 밀리는 바람에, 선배의 스케줄이 꼬일까봐 미안했다. 양해를 구하기 위한 연락을 계속하며 떠나셔도 괜찮다고까지 말씀드렸는데, 흔쾌히 기다려주셨다. 극중 초반부 비중이 작았지만, 뒤에 한 방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버티셨는데, 그 믿음이 어느 정도는 성취된 것 같다.

공정환 선배는 가수 경력이 있다. 그룹 '오락실'. 어렸을 때 노래방에서 '오락실'의 '후'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었다. 가수 얘기를 꺼낼 때마다 정환 선배는 온 몸을 비틀며 민망해하고 내 입을 막거나, 급기야 포박까지 시도했는데 나는 진짜로 그 노래를 좋아한 팬이었다. 결국 나중에 본인이 직접 부르는 걸 한 번은 듣고야 말았다. 상당히 높은 키의 미성을 여전히 소화하는 모습에 놀랐다.

제일 마지막에 캐스팅이 된 사람은 오영석 역의 이준혁이다. 이미 캐스팅 관련 예산이 거의 소모된 상황이라 반대가 심했다. 이야기 내에 박무진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표상으로서의 상징적 비중은 매우 크지만 출연 비중은 그보다 적은, 크게 보면 크게 보이고 작게 보면 작게 보일 수 있는 역이었다. 준혁씨의 의지가 중요했다.

JTBC 2부작 <한 여름의 추억>이 그를 캐스팅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늘 미남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결사적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아름다워져서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야구소녀>를 찍으며 살을 불린 직후라 더욱 독하게 빼야한다고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난 딱히 강제하지 않았는데…… 그 노력 덕분에 오영석을 더 예민한 왕자님처럼 표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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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많았다. 미드 리메이크라지만 대하사극 같은 인물 구성이었다. 오디션을 통해 좋은 분을 많이 만났다. 배역을 지정하지 않은 오픈 오디션이었다. 그래서 드라마의 몇몇 대사들을 수많은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소화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이무생씨는 김남욱 대사에 살짝 북한 사투리를 섞어 넣은 유일한 응시자였다. 촬영하며 한 두번씩 시도해볼 생각이었는데, 가려운 데를 긁어준 셈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생각했던 김남욱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원작에선 차영진 롤이 체격이 크고 김남욱 롤이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다. 한국 영상물에서 북한 출신을 기골 장대하고 늘씬하게 표현해온 작품이 많은지라, 우리의 김남욱은 좀 작고 옹골찬 느낌으로 가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무생씨가 파고들었다. <하얀 거탑> 때의 이무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무생씨를 고려하면서 전체적인 앙상블 조합에 대한 고민도 커졌다.

이 드라마는 특히 캐스팅 조합이 중요했다. 한 명이 전력질주로 달려나가는 드라마가 아닌, 모두가 어깨 걸고 한 발씩 전진하는 종류의 이야기다. 차영진 역의 손석구씨는 전체 조합에 강렬한 개성을 더할 사람이었다. 어디서 본 적 없는 변칙적인 연기를 구사하는데, 그게 매력 있었다. tvN <마더>의 설악 역 때부터 눈여겨 보았는데, KBS <최고의 이혼>에서 장현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지진희 선배의 단정한 발성과 석구씨의 열정적인 공기반 소리반 음색이 만나면 서로 매력이 상승할 것 같았다. 정수정 역 최윤영씨나 이무생씨, 허준호 선배와도 대사가 많은데, 각각의 조합에 색을 더하리라 생각됐다. 다만 걱정했던 건 혹시나 이 사람이 한국 문화에 아예 서툰, 사실상 외국인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미드로 데뷔한 유학생 출신인데다 <슈츠>에서 현란한 영어와 제스처를 구사하는 걸 보니 영어가 한국어보다 훨씬 편해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처음 만난 날, 석구씨는 느릿느릿 어눌하게 이야기해서 내 말에 대한 반응을 잘 읽을 수가 없었다. 혹시 못 알아듣나 싶어, 어색해 죽겠지만 조심스레 영어를 섞어서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그런데도 능청스레 애매한 반응을 계속했다. 알고 보니 대전의 아들인데... 지금 생각하면 이불 킥을 날릴 일이다.

이무생, 손석구와 각각 따로 캐릭터 얘기를 하다 둘 다 농구에 각별한 애정이 있는 걸 알게 됐다. 무생씨는 공을 놓은 지 오래지만 고등학교 때 농구부원이었던 경력이 있었으며 석구씨는 상당한 농구 마니아였다. 둘을 처음 만나게 하며 한 번쯤 같이 공을 튀겨도 재밌겠다고 운을 띄웠더니, 두 사람은 사교적인 가운데 농구 실력에 대해서만은 묘하게 긴장을 탔다. 그게 너무 웃겨서 우리 농구씬 하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농을 던졌는데, 농에 대한 반응이 무척 적극적이었다. 그 농담이 13회에서 진짜 현실이 될지 그 땐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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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정 역의 최윤영씨는 구면이었지만 오디션에 응해준 경우다. KBS 21기, 마지막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당시부터 한 번쯤 같이 일해보고 싶었던 배우였다. 그리고 11년만에 그 기회가 왔다. 정수정으로 누가 어울릴지 머리가 복잡한 와중이었는데, 한 번 최윤영을 생각하고 미팅을 진행하고 나니 다른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박무진-차영진-정수정-김남욱 조합에서 진희 선배와 함께 편안하면서도 단단한 안정감을 더할 사람이었다.

박근록씨가 맡은 의전 행정관 박수교 역은, 후에 '청와대즈'라고 명명된 박무진를 보좌하는 젊은 4인방 중 하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설정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최호전(우현)과의 일화를 위해 상상된 역이었는데, 이야기를 풀어가다보니 모든 순간에 의전 비서관을 대리하게 된 의전 행정관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꼬인 데 없이 맑은 박수교의 눈이 이 비정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야기를 환기하는 효과가 있었다.

근록씨도 오디션에서 만났는데, 독립영화 <연애담>와 <용순>에서 잘 봤던 기억이 있어 반가웠다. 촬영 중에 근록씨가 오 기사로 출연한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근록씨가 현장에 오면 우린 '깐느박' 오셨다고 환영했다. 본인이 너무 민망해 우린 '팬티 박'으로 좀 낮춰 불러주었다('기생충'에서 오 기사와 '팬티'의 관계는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아실터).

민정수석 안세영 역의 이도엽 선배도 오디션에서 처음 만났다. 정치 드라마라 배역 나이대가 높아 경력이 많은 선배님들이 오디션에 많이 응시해주셨는데, 경력이 짧은 나로서는 감사하고 황송한 일이었다. 선배의 경쾌한 대사 소화력과 연기를 대하는 관점 같은 것을 들으며 우리 팀에 꼭 같이 계셨으면 했다. 진지한 가운데 유머러스한 호흡을 심는 연기가 좋았다. 

후에 도엽 선배와 배종옥 선배님의 연극 <진실, 거짓>을 보러갔는데, 거기서 또 한 명의 배우를 만난다. 국정원 차장 지윤배 역의 김진근 선배. 도엽 선배와는 또 다른 중년의 매력을 풍기시는, 약간 피로한 듯한 묘한 포커페이스와 목소리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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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정한모 역의 김주헌씨는 후배 유영은 감독의 두 개의 단막극에 모두 출연한 배우다. 그 단막들을 보며 너무 근사해서 바로 캐스팅 디렉터에게 저 사람 좀 만나게 해달라고 연락했다. 만나고 나서는 일단 무슨 역이든 같이 하자는 말부터 먼저 했다. 아직 <남자 친구>에 출연 전이어서 크게 유명해지기 전이었는데, 유명하고 바빠지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원래 더 나이 지긋한 사람으로 상상했던 정한모가 좀 더 한나경과 동료의 느낌을 풍길 수 있게 되었다. 촬영 상황 상 고정배역 중에 가장 늦게 현장에 합류했는데(크랭크 인 후 두 달 넘게 지났던 것 같다), 초반부를 촬영하는 와중에 비밀 병기 하나가 뒤에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어서 든든했다.

국정원 막내 서지원 역의 전성우는 이재균 배우의 소개로 만났다. <쓰릴 미>를 같이 한 인연으로 두 사람은 뮤지컬 팬들로부터 한 묶음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난 재균이와 단막에서 두번 작업하면서(<액자가 된 소녀>와 <빨간 선생님>), 계속 전성우라는 배우에 대한 호기심도 갖고 있었다. 재균이가 군대간다며 술을 푸던 밤에(나까지… 내가 군대가는 건 아니었는데…) 재균은 환송해달라며 성우를 그 자리에 불렀다. 소개팅같이 어색한 순간을 지나, 배역을 두고 따로 미팅을 진행했다. 실제로 만난 성우는 재균이와 에너지나 스타일이 매우 다른 배우였다. 그리고 성우는 국회의사당 최초 폭파의 지하철 내 목격자이자, 사건 해결의 가장 큰 공을 세우는 역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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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순서는 따로 없다. 아직 많이 남은 다른 분들은 다음 글에서.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연출자입니다.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되었습니다.

  • tory_1 2020.07.08 11:53

    석구 대전사람이었어?ㅋㅋㅋ 어쩐지ㅋㅋ 말투의 느긋함이 ㅋㅋㅋ

    와대즈 보고파...ㅠㅠㅠㅠㅠㅠ

  • tory_2 2020.07.08 12:53
    지진희묘사하는거 개웃기다ㅋㅋㅋㅋ 청초함과강인함ㅋㅋㅋㅋ
  • tory_3 2020.07.08 14:41

    캐스팅 다들 찰떡이엇어ㅠㅠㅠ그와중에 오영석 예민한 왕자님ㅋㅋㅋㅋㅋ

  • tory_4 2020.07.08 15:10
    아름다워져서 왔대 ㅋㅋㅋㅋ 인정
    내가 이준혁 얼굴 보려고 시를 잊은 그대에게 챙겨봤다
  • tory_5 2020.07.08 18:28

    드라마 자체는 아쉬움도 많고 그랬는데 캐스팅들은 다 찰떡이었고 배우들 타작품에서 보이면 반가움

  • tory_6 2020.10.05 05:18
    와 재균이 때문에 늘보가 캐스팅 된 거였어???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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