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87), 박근형(83) 등 원로배우의 열연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앙코르 공연 중이다. 지난달 26일~5월 5일 서울 국립극장을 시작으로 10개 지역 극장에서 투어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앙코르 공연에선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국 공연 역사상 첫 여배우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박정자(82)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저작권을 가진 ‘사무엘 베케트 에스테이트’의 요구 때문이다.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2막)는 1953년 프랑스 파리 초연 이후 부조리극의 대명사로 불리는 고전이다. 시골 길가 마른 나무 옆에서 두 부랑자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리디미르(디디)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난폭한 주인 포조와 노예 럭키가 등장하며, 막이 끝날 때마다 소년이 등장해 고도가 못 온다는 것을 전한다.
[오경택이 연출한 이번 한국 공연은 원래 고고에 신구, 디디에 박근형, 포조에 김학철, 럭키에 박정자, 소년에 김리안을 캐스팅했다. 박정자는 제작사인 파크컴퍼니에 직접 출연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파크컴퍼니는 소년 역으로 여배우 김리안을 캐스팅했다. 제작사인 파크컴퍼니가 처음 캐스팅 자료를 베케트 에스테이트에 보냈을 때 여배우 출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었던 만큼 예정대로 무대에 올라갔다. 실제로도 박정자와 김리안은 이번 작품에서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경택 연출가는 지난해 공연을 앞두고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 만큼 성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면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올릴 때는 여배우 캐스팅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앙코르 공연부터 박정자와 김리안이 빠지고 럭키 역의 조달환과 소년 역의 이시목이 새롭게 합류했다. 베케트 에스테이트 관계자가 공연 관람 후 ‘여배우 출연에 따른 럭키와 포조 사이의 에너지가 작가의 의도와 달리 부족했다’고 판단, 앙코르 공연부터 럭키 역을 남자 배우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년 역할 역시 굳이 여배우가 할 필요가 없다는 게 베케트 에스테이트의 판단으로 보인다.
베케트는 생전에 새로운 해석이 작품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우려해 자신의 희곡 그대로 무대에 올릴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저작권을 관리하는 베케트 에스테이트는 세계 각국에서 대본 수정, 음악 사용 등 희곡에 없는 시도를 할 때마다 소송 등 제동을 건 것으로 유명하다. 여배우 캐스팅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베케트는 1988년 네덜란드의 한 극단이 여배우들을 캐스팅해 공연을 준비하자 직접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베케트는 “여성은 전립선이 없기 때문”이라는 반대 이유를 들었다. 극 중 디디가 종종 소변을 보기 위해 무대를 떠나는 설정에 대해 전립선 문제가 있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네덜란드 법원은 극단의 손을 들어줬고, 베케트 에스테이트는 수년 간 네덜란드에서 베케트의 작품 상연을 금지했다. 베케트 사후에도 여배우 출연과 관련한 소송이 제기됐는데, 1992년 프랑스에서는 베케트 에스테이트가 승소한 반면 2006년 이탈리아에선 베케트 에스테이트가 패배했다. 2019년엔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 칼리지의 학생극단이 여배우만 출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준비하다가 베케트 에스테이트의 문제 제기에 공연을 취소한 사례가 있다.
다만 베케트 에스테이트가 여배우 출연과 관련해 느슨하게 규정을 적용한 사례도 있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이 1993년 보스니아 내전 중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렸을 때 여배우가 포조 역으로 출연한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1994년 일본에서도 고고와 디디에 여배우를 캐스팅한 프로덕션에 대해 어떤 조치도 없었다.
배우 박정자는 7일 국민일보와 만나 “배우는 여자와 남자를 떠나 모든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본다. 베케트 에스테이트가 ‘고도를 기다리며’ 앙코르 공연에 여배우 출연을 안 된다고 한 결정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면서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는데, 베케트 에스테이트는 너무 시대착오적 아닌가. 만약 베케트가 지금 살아있더라도 여배우 출연에 대한 과거의 태도를 고수할지 모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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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박정자님 출연하신 거 봤었는데 연기 가장 잘하셨음 조연이신데 주연처럼 느껴지는 오라에 박수 엄청 치고 나갔었는데
황당하네 원작자가 싫어질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