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기도에 살고 서울로 출근하는 서른 중반 평범한 직장인 여성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2년 조금 안 되게 연애하고 작년에 결혼했다. 결혼식은 아름다웠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동성 간 혼인은 아직 법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는 서류상 동거인일 뿐이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신혼부부에게 특별히 제공하는 혜택도 받을 수 없고, 병원에서 수술이 필요한 상황에 서로의 보호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고하지 못할 결혼을 위해 1년 간 정성스레 결혼식을 준비했다. 양가 부모님과 친인척을 포함한 백여명의 하객들 앞에서 서로에게 진실한 혼인서약을 했다.
청첩장을 주기 위해 지인들을 만나면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이런 질문은 예비 부부에게 결혼 상대라는 확신을 어떻게 얻었냐는 뜻인 경우가 많지만, 신부가 둘인 우리에게는 어떻게 이런 큰 일(결혼식)을 도모할 결심을 했냐는 감탄이 섞인 묘한 말이었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사이에 그치지 않고 가정을 이루어 부부로 살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다. 나는 늘 죽음 이후를 두려워 하고, 소멸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내를 만난 뒤로는 이 사람과 함께 인생을 가득차게 살아 낸다면 죽는 것도 그리 무섭지 않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계속해서 서로의 인생을 함께 설계하며 살아갈 거라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있고 싶었다. 가족이 되어, 그 사람을 보호하고 책임지는 배우자로.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내게는 결혼이었다.
그렇다면 결혼식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동성 부부로 살 거라면 왜 적지 않은 시간, 돈, 에너지, 수없이 많은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결혼식을 준비한 거냐고?
결혼과 함께 '결혼식'까지 결심하게 된 건, 첫 번째로 '선언'의 의미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내 남은 생을 함께 하기로 했다고.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평생 서로를 배우자로 존중하며 부부로 살겠노라고, 가족과 친지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두 번째로는 형식을 갖춘 의례가 사람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의외로 법보다 크기 때문이다. 남들이 쉽게 알 수 없는 혼인신고 여부보다는 결혼식이라는 의례를 통해 공표된 사실을 더 높게 치는 것이 전반적인 우리나라 정서다.
혼인신고가 안 되는 동성애자도 평생을 알아온 친지들 앞에서 결혼식이라는 의례를 치루면 충분히 '부부'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 이유다. 다시 말해, 결혼식 없이는 우리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를 부부로 여기며 살아간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정식 부부로서 대우받기는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다.
웨딩 카테고리 전반에 그 어떤 로망도 없던 나의 결혼식 준비는 이런 이유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동성 부부로 한평생을 살아가며 너희는 진짜 부부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수많은 사람과 상황들을 마주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를 증명하고 싶어 씩씩거리는 대신 우리 결혼식에 왔던 백명이 넘는 서약의 증인들을 떠올리고 그날의 진실된 약속을 되새기겠지.
우리의 결혼식을 가부장제와 정상성에 편입하려는 퀴어들의 몸부림으로 해석하고 우려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신부와 저 신부 둘중 누가 가부장인가? 좀 더 머리가 짧은 쪽? 좀 더 근육량이 많은 쪽? 혹시 바지를 더 자주 입는 쪽?
성별이 같은 부부는 가부장제 공식을 망가뜨리고 정상성에 금을 내면 냈지, 그것들을 강화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다 다르게 산다. 정답도 없고 아무에게도 답을 논할 자격도 없다. 우리처럼 로맨틱한 감정으로 사랑하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해 달라는 것은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는 길이다.
나는 그중 동성부부의 형태인 것일뿐. 가족이 되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이 문제가 아니라 좁은 가족의 정의가 문제다. 어쩌면 '퀴어-가족주의'는 '전통-가족주의'와는 또 다른 가치와 형태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엄마는 결혼식에서 우리 부부에게 "가끔씩 지치고 힘들 때에는 양가 부모들이 언제나 뒤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있단 사실을 떠올리고 힘냈으면 한다"는 덕담을 들려줬다. 이 결혼식을 치르기까지 우리 부부는 다양한 좌충우돌을 겪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짐)
안녕하세요, 신부 김라온 엄마입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여러분께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희, 라온에게.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반짝이는 가을날에, 더없이 따스한 마음들이 모인 이곳에서 우리 딸이 결혼을 하게 되다니 너무나 기쁘다. 나조차도 결혼할 때 너희들만큼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굳은 신뢰로 사랑을 맹세하는 두 사람이 대견하고 멋있어.
아직 법적 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둘 앞에 펼쳐진 길이 언제나 잘 포장된 도로는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라온과 주희 두 사람이 함께라면 덜컹거리는 불편함마저 잠깐의 리듬이라 느끼며 씩씩하게 헤쳐 나갈 거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지치고 힘들 때에는 양가 부모들이 언제나 뒤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있단 사실을 떠올리고 힘냈으면 한다. 이 자리의 많은 친구들이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는 것처럼 변화의 흐름은 너희들의 편이고 곧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흐름을 수용하게 될 거라고 확신해.
결국 세상은 옳은 방향으로 움직일 테니 그날이 올 때까지 엄마가 제일 앞줄에서 응원할게. 라온, 주희 두 사람 정말정말 축하하고, 사랑해!
2023년 11월 11일 사랑하는 엄마가
https://n.news.naver.com/article/310/0000116013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