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진실을 가리켜 보이고자 하는 진리로부터의 메시지입니다.
괴로워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그 괴로운 '주체'가 누구인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괴롭다면 도대체 무엇이 괴로운 걸까요?
너무도 당연하게 '나'가 괴롭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는 바로 몸과 마음이라고 여깁니다.
이 몸과 마음이 괴로운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사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괴로워하는 그 '놈'이 누구인지 관심을 기울이라는 저 너머로부터의 메시지입니다.
괴로워해야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애쓸 것이고, 그 때 그 괴로움의 원인을 찾게 될 것이며, 그 때에야 비로소 괴로워하는 나를 탐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괴로움은 곧 이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이 본래 내가 아님을 자각하라는 신호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 그것입니다.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면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고통과 액난은 곧 오온개공을 깨달으라는 소식임을 알려줍니다.
괴로움이 왔다는 것은 곧, 진리, 붓다, 신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 괴로운 몸이나 마음이 내가 아님을 깨닫게 될 때, 괴로움은 더이상 괴로움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이 몸이나 마음이 나라고 여기는 토대 위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진리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에고가 늘 하던 방식이지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근본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괴로워하고 있는 '나'가 진짜 내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 몸이나 마음을 나라고 여길 때만, 몸이 괴롭고 마음이 괴로울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닌, 이 진정한 자기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괴로운 그대로 괴로움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어떤 괴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근원의 치유를 위해 일어납니다.
껍데기만 치료하지 말고, 진정한 영원한 치유가 일어나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진정한 자기를 찾는 길 뿐입니다."
<법상 스님>
괴로워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그 괴로운 '주체'가 누구인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괴롭다면 도대체 무엇이 괴로운 걸까요?
너무도 당연하게 '나'가 괴롭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는 바로 몸과 마음이라고 여깁니다.
이 몸과 마음이 괴로운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사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괴로워하는 그 '놈'이 누구인지 관심을 기울이라는 저 너머로부터의 메시지입니다.
괴로워해야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애쓸 것이고, 그 때 그 괴로움의 원인을 찾게 될 것이며, 그 때에야 비로소 괴로워하는 나를 탐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괴로움은 곧 이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이 본래 내가 아님을 자각하라는 신호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 그것입니다.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면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고통과 액난은 곧 오온개공을 깨달으라는 소식임을 알려줍니다.
괴로움이 왔다는 것은 곧, 진리, 붓다, 신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 괴로운 몸이나 마음이 내가 아님을 깨닫게 될 때, 괴로움은 더이상 괴로움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이 몸이나 마음이 나라고 여기는 토대 위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진리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에고가 늘 하던 방식이지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근본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괴로워하고 있는 '나'가 진짜 내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 몸이나 마음을 나라고 여길 때만, 몸이 괴롭고 마음이 괴로울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닌, 이 진정한 자기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괴로운 그대로 괴로움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어떤 괴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근원의 치유를 위해 일어납니다.
껍데기만 치료하지 말고, 진정한 영원한 치유가 일어나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진정한 자기를 찾는 길 뿐입니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