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부터 1년6개월 가량 은둔 생활을 한 권현우씨(38)도 이러한 경험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외교관이 꿈이었던 권씨는 2012년 여름, 외무고시 합격의 꿈을 안고 2평 남짓한 신림동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권씨가 번번이 받아들인 건 불합격 증서였다. 탈락이 계속되며 가장 먼저 끊은 건 가까운 친구, 지인들과의 연락이었다. 잘 지내냐는 친구들의 연락에 권씨는 굳이 답장하지 않았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외무고시에 붙겠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시험에 번번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나라는 사람을 내세울 게 없어진 거죠.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가족과의 교류도 거의 끊었다. 일주일에 한 번 '공부는 잘하고 있냐'며 부모님의 안부 연락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잘하고 있다'고 답장하는 게 전부였다. 권씨는 "당시 무기력증으로 거의 공부를 하지 못했는데, 부모님은 내 상황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며 "실패를 주변에 알리는 것이 싫어 타인과의 모든 연락을 끊었고, 집 안에서만 혼자 생활했다"고 회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아버지, 누나와의 불화로 21살부터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한 장영걸씨(25)는 3년6개월간의 고립 생활 중 실제 죽음 문턱까지 갔다. 가족들을 피해 집을 나와 인근 고시촌으로 도망쳤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증과 공황증세가 심해졌다. 장씨는 문득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해 '안 아프게 죽는 법' 등을 검색했다고 한다.
"지옥 같던 집을 나와서 혼자 살 수 있다 보니 처음엔 고시텔이 평화롭고 좋았어요. 그렇지만 외출을 안 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같은 증상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시도한 적이 있어요."
2~3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위안이 된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수년간 방 안에 갇혀 지냈던 은둔 청년 3인은 '은둔 당시, 내게 가장 소중했던 물건을 소개해 달라'는 아시아경제의 물음에 저마다의 사연과 함께 답변을 보내왔다. 이들은 은둔 기간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던 속마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고 있었다. 그 창구가 고립·은둔 생활을 버티게 한 원동력이자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고 청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권씨는 외무고시 준비 시절,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자 시작한 취미 생활인 '네컷만화'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펜을 잡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매번 어둡고 우울한 생각이 종이를 메우는 것이 싫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울한 현실을 글보다 훨씬 재밌고 가볍게 풀어낼 수 있는 만화의 매력에 빠졌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면의 생각들을 많이 끄집어낼 수 있었고, 마음의 위로를 받았어요. 은둔 당시 살아낼 수 있는 동력이었어요."
https://img.dmitory.com/img/202405/7ff/llk/7ffllk2xQQUgiGMwqWKEAY.jpg
게임을 좋아하던 나씨에겐 '스마트폰'이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은둔 당시, 하루 중 유일하게 타인과 소통하는 시간은 게임 커뮤니티에 접속해 같은 팀 유저들과 대화할 때였다.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 조금이나마 살아있는 기분이 느껴졌다고 했다.
장씨에겐 은둔 당시 사용하던 '무선 키보드'가 가장 특별했다. 장씨는 남들에게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가정사와 부모님과의 갈등, 우울한 속마음을 일주일에 2~3번씩, A4용지 한 페이지 분량으로 쓰며 털어냈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끄적이다 보면 불안했던 마음도 많이 누그러졌다. 장씨는 "방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 기분이 이렇구나'하는 걸 스스로 많이 깨닫게 됐다"며 "처음엔 '왜 나 빼고 다 잘 나가지'라는 부정적인 내용이 가득했는데, 나중엔 점점 나아지더라"고 말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77/0005414235?cds=news_edit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외무고시에 붙겠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시험에 번번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나라는 사람을 내세울 게 없어진 거죠.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가족과의 교류도 거의 끊었다. 일주일에 한 번 '공부는 잘하고 있냐'며 부모님의 안부 연락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잘하고 있다'고 답장하는 게 전부였다. 권씨는 "당시 무기력증으로 거의 공부를 하지 못했는데, 부모님은 내 상황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며 "실패를 주변에 알리는 것이 싫어 타인과의 모든 연락을 끊었고, 집 안에서만 혼자 생활했다"고 회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아버지, 누나와의 불화로 21살부터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한 장영걸씨(25)는 3년6개월간의 고립 생활 중 실제 죽음 문턱까지 갔다. 가족들을 피해 집을 나와 인근 고시촌으로 도망쳤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증과 공황증세가 심해졌다. 장씨는 문득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해 '안 아프게 죽는 법' 등을 검색했다고 한다.
"지옥 같던 집을 나와서 혼자 살 수 있다 보니 처음엔 고시텔이 평화롭고 좋았어요. 그렇지만 외출을 안 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같은 증상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시도한 적이 있어요."
2~3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위안이 된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수년간 방 안에 갇혀 지냈던 은둔 청년 3인은 '은둔 당시, 내게 가장 소중했던 물건을 소개해 달라'는 아시아경제의 물음에 저마다의 사연과 함께 답변을 보내왔다. 이들은 은둔 기간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던 속마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고 있었다. 그 창구가 고립·은둔 생활을 버티게 한 원동력이자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고 청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권씨는 외무고시 준비 시절,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자 시작한 취미 생활인 '네컷만화'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펜을 잡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매번 어둡고 우울한 생각이 종이를 메우는 것이 싫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울한 현실을 글보다 훨씬 재밌고 가볍게 풀어낼 수 있는 만화의 매력에 빠졌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면의 생각들을 많이 끄집어낼 수 있었고, 마음의 위로를 받았어요. 은둔 당시 살아낼 수 있는 동력이었어요."
https://img.dmitory.com/img/202405/7ff/llk/7ffllk2xQQUgiGMwqWKEAY.jpg
게임을 좋아하던 나씨에겐 '스마트폰'이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은둔 당시, 하루 중 유일하게 타인과 소통하는 시간은 게임 커뮤니티에 접속해 같은 팀 유저들과 대화할 때였다.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 조금이나마 살아있는 기분이 느껴졌다고 했다.
장씨에겐 은둔 당시 사용하던 '무선 키보드'가 가장 특별했다. 장씨는 남들에게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가정사와 부모님과의 갈등, 우울한 속마음을 일주일에 2~3번씩, A4용지 한 페이지 분량으로 쓰며 털어냈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끄적이다 보면 불안했던 마음도 많이 누그러졌다. 장씨는 "방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 기분이 이렇구나'하는 걸 스스로 많이 깨닫게 됐다"며 "처음엔 '왜 나 빼고 다 잘 나가지'라는 부정적인 내용이 가득했는데, 나중엔 점점 나아지더라"고 말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77/0005414235?cds=news_edit
다들 자기만의 스토리로 열심히 살아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