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유머
“사실 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 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갖고 계셨어요. 그래서 고서뿐만 아니라 도자기 등 여러 유물을 수집하셨습니다. 하지만 (생전에 통일이 될)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2003년 간암 선고를 받으시면서 그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하시게 된 것이지요.” 수소문끝에 연락이 닿은 장남 송철(65)씨의 말이다.

“아버지는 어떤 의무감 같을 것을 갖고 계셨어요. ‘태어나서 좋은 일 하나는 해야 한다. 내가 돈 벌어서 뭐 하겠니’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수집하신 것들을) 다 사회로 돌려보낼 것이라면서 ‘너희들이 철 들면 알아듣겠지’ 하고 설명하시곤 했어요. 오히려 우리 삼남매는 뭘 굳이 설명하시나 의아해했죠. 기증하실 때에도 형제들은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송씨는 아버지가 가끔 보자기에 싸서 보관해 두었던 고서를 때마다 꺼내 바람을 쐬게 하는 거풍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이리 와서 보라고 하는데 아이들이 고서 같은 걸 아나요. 그냥 시큰둥해 했는데 ‘나중에 네가 관리해야 되니 봐 둬라’고 하셨지요. 유독 『기사기해계첩』은 재미있었습니다. 요즘 사람이 그린 것처럼 생생해서 놀라웠죠.” 그는 말했다. 『기사기해계첩』은 국박에 기증된 국보 중 하나로, 1719년 기해년에 숙종이 59세가 되어 기로소(연로한 고위 관료의 친목과 예우를 위한 기구)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참석한 70세 이상의 퇴직 관리들의 초상화와 기념행사를 묘사한 그림들로 이루어진 화첩이다. 송씨는 “하지만 아버지가 수집품들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편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이북 사람들이 그런 게 아닌가 해요. 말씀이 많지 않으시고 희로애락을 별로 표현을 안 하시는 타입이었어요. 이북에서 월남을 하고 그러면서 생사 고비를 많이 넘기고 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혜전 송성문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중등학교를 우등 졸업한 후 당시 38선 이북의 최고 대학인 김일성대 영문과를 꿈꾸었다. 그러나 출신성분 때문에 탈락하고 2년제 신의주교원대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그해 11월 미군이 신의주에 진주했다. 그는 미군 앞에서 중학 영어교과서를 읽다가 통역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미군이 1·4 후퇴 때 평양에 그를 남겨놓고 퇴각했고 그는 갖은 고생을 하며 홀로 월남해 부산까지 내려갔다. 52년에 입대해 통역장교로 활약했다.

평소 나서기 꺼려 기증도 대리인 통해
그후 부산 동아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혜전은 부산고와 마산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영어를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서울에서 출판사 대표가 찾아와 계약금 200만원과 1년 기한을 주며 영어 교재를 써 달라고 했다. 당시 200만원은 집 한 채 값이었다. 이렇게 해서 1967년에 탄생한 『정통종합영어』가 대박을 쳤고 후에 『성문종합영어』가 되었다. 그 뒤 서울에 올라와 서울고에서 교사 생활을 잠깐 하다가 종로 경복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요즘으로 치면 전국적으로 소문난 ‘일타 강사’였다. 1976년 자신의 출판사인 성문출판사를 만들어 『성문종합영어』를 비롯한 성문 시리즈를 냈다. 『성문종합영어』는 2011년까지 100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1990년대에 대입 시험 제도가 바뀌고 경쟁 참고서가 늘어나면서 판매량이 급감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혜전은 학원 강사와 교재 출판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문화재 구입과 수석 취미에 썼다. 그렇게 수집한 11세기 고려시대 대승불교 경전 『대보적경』을 비롯한 국보 4건과 보물 22건, 운보 김기창의 그림 ‘동해일출도’ 등 총 46건 101점을 2003년 3월에 국박에 기증했다. 그 공로로 그해 6월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그가 기증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에 기증 의사를 밝힐 때에도 직접 박물관에 나타나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다. 대리인은 바로 혜전의 고서 수집을 도운 고인쇄 전문가였다. 당시 국박 전시과장으로서 기증 업무를 담당했던 장상훈 현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국박을 찾아온 대리인인) 노신사의 손에는 국보 4건, 보물 22건 등의 물목이 빼곡히 적혀 있는 기증희망원이 들려 있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흥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우리나라 고인쇄 문화재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목록이었다.”

혜전은 자신의 애장품을 박물관에 기증하던 날에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던 날에도, 기증문화재 특별전이 열리던 날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 관장은 “송성문 선생은 고귀한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셨고, 그럼에도 자신의 공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겸손의 미덕을 가르쳐 주셨다”라고 평했다. 아들 송씨에게도 그런 기질이 유전된 탓인지 그는 인터뷰 요청을 여러 차례 사양하고 전화로만 말문을 열었다.

혜전의 수집과 기증이 특히 빛난 것은 고서에서다. 그가 고서에 특히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 송 전 대표는 말했다. “고서들이 자꾸 훼손되니까 더 없어지기 전에 빨리 보존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셨어요.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지만 잘 보존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시면서요. 저 어릴 때만 해도 이사 가면 집에 바르는 초배지를 고서를 뜯어서 사용하고 그랬어요. 안 믿기겠지만 진짜입니다. 1960년대 부산에서 살았는데, 이웃집들이 다 그러더군요. 당시에 고물상에 널린 게 옛 책들이었으니까요. 1990년대 되니까 서울 인사동의 전통 찾집이나 막걸리집들이 그걸 흉내내서 고서를 뜯어서 창틀에 붙여놓고 그랬죠.”

혜전은 별세 직전의 인터뷰에서 “그림이나 도자기는 가짜가 많지만 고서는 그리 쉽게 속일 수 없다”고 말했다. “집에 도둑이 든 적도 있지만 값싼 것만 가져가고 고서는 손도 대지 않았더군요. 못 알아봤을 겁니다”라고 했다. 혜전의 또다른 수집 대상은 수석이었다. 그는 생전에 “돌 안에 자연이 다 들어있다”며 “수석 수집이 군자(君子)의 마지막 취미”라고 했다. 별세하던 해에 책 『수석』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별세 1년 전인 2010년 애장하던 수석 한 점을 국박에 기증했다.

https://img.dmitory.com/img/202404/4ep/0Tl/4ep0TlWDC8KSQMCOQq6e8O.jpg
혜전 송성문이 기증한 『기사기해계첩』(조선 1719년, 국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https://img.dmitory.com/img/202404/3jh/raQ/3jhraQUIbmuGqOUc8C0geI.jpg
『대보적경』(고려 11세기, 국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355346?sid=103

우리가 아는 그 성문종합영어 맞음 ㅇㅇ
  • tory_1 2024.04.27 11:06
    멋지다…
  • tory_2 2024.04.27 11:07
    대단하네
  • tory_3 2024.04.27 11:08
    멋진분ㅜㅜ돈많이 번 걸 저렇게 쓰기 쉽지않은데.대단하다
  • tory_4 2024.04.27 11:09
    이런분들 덕분에 우리나라 문화유산들이 지금까지 지켜질 수 있었네 소개된 유물들 박물관 가서 꼭 보고싶다
  • tory_5 2024.04.27 11:11
    와 나도 성문으로 공부했는데 대단하신분이었네
  • tory_6 2024.04.27 11:12
    감사합니다
  • tory_7 2024.04.27 11:14
    진짜 멋있으시다
  • tory_8 2024.04.27 11:15
    내가 이렇게 될줄 알고 산 성문종합영문법이 몇권이더라…
  • tory_10 2024.04.27 11:17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4/04/29 15:56:11)
  • tory_9 2024.04.27 11:17
    멋있네요
  • tory_11 2024.04.27 11:19
    와 위인이시네
  • tory_12 2024.04.27 11:20
    멋있다..돈의 가치가있네
  • tory_13 2024.04.27 11:22
    대단하다!! 나도 성문세대인데!!
  • tory_14 2024.04.27 11:25
    너무 멋있으시다 저도 성문으로 공부해서 영어로 먹고 살아요 ㅜㅜ
  • tory_15 2024.04.27 11:29
    진짜 대단하시다ㅠㅠㅠ 자녀분들도..
  • tory_16 2024.04.27 12:22
    중3때까지 영문법 하나도 모르고 헤맬 때 접한 성문기초영어로 문법의 틀을 잡았었는데
    훌륭한 분이셨구나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조회
전체 【영화이벤트】 기막힌 코미디 🎬 <드림 시나리오> ‘폴’과 함께하는 스윗 드림 시사회 18 2024.05.07 1156
전체 【OTT이벤트】 넷플릭스 시리즈 🎬 ♾<The 8 Show> 팬 스크리닝 & 패널토크 이벤트 1 2024.05.06 1759
전체 【영화이벤트】 우리는 지금도 행복하다 🎬 <찬란한 내일로> 시사회 13 2024.05.03 3416
전체 【영화이벤트】 갓생을 꿈꾸는 파리지앵 3인의 동상이몽 라이프 🎬 <디피컬트> 시사회 19 2024.05.02 3777
전체 디미토리 전체 이용규칙 2021.04.26 571997
공지 🚨 시사, 정치, 정책관련 게시물/댓글 작성금지 2022.03.31 480095
공지 🔎 이슈/유머 게시판 이용규칙 2018.05.19 1121641
모든 공지 확인하기()
61279 기사 류현진 너무 오래 쉬었나? 148km 무용지물, 170억 투수가 ERA 5.65 말이 되나 4 21:48 533
61278 기사 [단독] SK하이닉스, 中에 파운드리사업 '지분 49%' 매각 15 20:52 1542
61277 기사 英시의원, 당선 소감에 “알라후 아크바르” 외쳤다 14 20:47 905
61276 기사 기계체조 여서정 인터뷰: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두 번째 올림픽, "목표는 크게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요" 2 20:21 307
61275 기사 대전역점 재계약 뛰어든 성심당…수수료 의견 차로 3차례 유찰 54 19:30 2649
61274 기사 中 알리·테무 공세에...쿠팡, 7분기 만에 적자전환 11 19:17 958
61273 기사 경남 초등 고학년 최대 고민은 '공부'…미래 모습·친구 답변 순 2 19:01 225
61272 기사 한복 사이즈 바꿨더니 "뚱뚱하다" 비꼰 직원…K관광의 민낯 6 18:46 1467
61271 기사 초등생 유인해 도랑으로 밀친 20대女…살인미수 유죄에도 ‘집유’ 9 18:41 926
61270 기사 강아지 염색해 '판다견'으로 전시한 中 동물원 논란 5 17:44 883
61269 기사 여전히 단단한 유리천장…30대 그룹 중 20곳 여성 사내이사 ‘0명’ 3 17:00 257
61268 기사 SM, '라이즈 남매' 그룹 만든다...4분기 '걸그룹' 데뷔 9 16:48 1035
61267 기사 82메이저에게서 남다른 촉이 느껴지는 이유 10 16:47 1398
61266 기사 "두 번 죽이지 마세요" 서울대공원 숨진 호랑이 '태백' 박제 또 논란 10 16:10 858
61265 기사 '선업튀' 케미 굴소스 김혜윤, 예능 출연은 언제쯤?…시청자 아쉬움 폭발 70 16:00 2078
61264 기사 '나솔' 16기 옥순 "출연료? 타 기수에 비해 2배 받아" 고백 ('집대성') 13 15:57 2070
61263 기사 '백상' 사이에 피어난 '선재 업고 튀어' [엑's 이슈] 1 15:47 772
61262 기사 30대 그룹 중 20곳 계열사 여성 사내이사 '0명' 7 15:41 574
61261 기사 [단독] '수능 만점' 의대생, 여친 경동맥 찔렀다…계획범죄 정황 44 15:36 3287
61260 기사 [속보] ‘여친 살해’ 20대 의대생 “유족에 죄송”…영장심사 출석 24 15:33 1925
목록  BEST 인기글
Board Pagination 1 2 3 4 5 6 7 8 9 10 ... 3064
/ 3064

Copyright ⓒ 2017 - dmi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