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article/469/0000796176
평범한 아빠 장훈의 과학자가 되겠다는 결심
장훈은 수완 좋은 과일 도매상이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도 밀려든 배달 주문 탓에 새벽부터 바빴다. 오전 10시가 좀 넘었을까. 한숨 돌리며 시장 안 TV 화면을 올려봤다. 거대한 배 한 척이 검푸른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장훈의 인생이 산산조각 난 순간이다. 수학여행 간다며 전날 집을 나선 아들 준형이가 탄 그 배였기 때문이다. 그는 2주가 지나서야 뭍으로 돌아온 자식의 시신을 끌어안고 물었다.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장훈은 이후 그 답을 알아내는 데만 몰두했다. 10년간 이어진 거친 분투의 시작이었다.
장훈은 음모론자였다. 침몰 원인을 쫓던 초기에는 분명 그랬다. 참사 유족 모임의 진상규명분과장을 맡았던 영향이 컸다. 온갖 제보를 받는 자리였다.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는 반드시 음모론이 피어오른다. 2014년 터진 한국 여객선 참사를 10년간 추적해온 미국의 재난학자 스콧 게이브리얼 놀스. 경험 많은 그는 세계 곳곳의 참사 현장에서 음모론이 퍼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재난 조사가 지연되면 사람들은 정부가 무능하거나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서 사고 원인 등을 두고 각자의 가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음모론이죠. 불행히도 이번 참사도 이 과정을 밟았어요."
선체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내로라하는 선박·해양 전문가 8명이 위원으로 임명됐다. 여당과 야당, 유가족 모임이 각각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지원할 조사관 등 40여 명도 채용돼 위용을 갖췄다. 조사위에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년. 하지만 명망 있는 전문가들이라면 충분히 답을 내놓을 것이라고 믿었다. ‘과학의 시간’에 정치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분명 그렇게 보였다.
배를 개조했고 화물도 과적했는데, 이를 대충 묶어 배가 기우뚱했을 때 짐이 한쪽으로 쏠려 완전히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배가 어디에 부딪혀 침몰한 게 아니라 내부 문제 탓에 전복됐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내인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침몰한 배를 직접 보지 못한 채 내린 판단이었다. 장훈이 쉽게 수긍할 수 없었던 이유다.
"불법 증개축, 과적, 고박 불량… 우리 아이들이 죽은 이유라고 하기엔 너무 하찮아 보였어요. 가슴에 와닿지 않았죠."
장훈과 유족들은 전문가들이 선체를 직접 조사해보면 전혀 다른 결론에 다다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조사를 할수록 기존 결론에 무게가 더 실렸다. 잠수함과 부딪혔다면 배 외관이 크게 찌그러졌어야 하지만 그런 흔적이 없었다. 특히 유압 솔레노이드 밸브(④)라는, 작지만 중요한 부품이 고장 났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선박 자체 결함설이 힘을 얻었다.
장훈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내인설과 외력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위원이라도 선박 전문가들이 그 많은 날 연구한 결과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배가 침몰하기 전 급선회한 이유 등을 설명한 핵심적 내용이 보고서에 실려 있는데도 말이다. 위원회 활동 종료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과학적 결론을 듣고 싶었던 장훈의 기대는 그날 완전히 깨졌다.
“아는 물리학자 좀 소개해 주세요.”
카이스트 교수 전치형은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과학기술학자인 그는 선체조사위 의뢰로 종합보고서를 썼다. 장훈은 조사위 마지막 회의 날 전치형에게 과학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스스로 '세월호의 과학'을 이해해보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유족에게 설명해주는 것이 과학자의 임무라고 여겼던 전치형은 동료들을 모았다. 6개월 뒤, 장훈과 5명의 과학자가 모여 벌인 8시간의 수업이 성사됐다.
장훈은 스스로에게도 끊임없이 물었다. '내가 바라는 건 과연 뭔가' 하는 질문이다. 가족이 겪은 비극을 다른 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건 법과 사회 구조를 바꿔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 이 방법을 찾기 위해 살고 있다.
"아들은 돌아올 수 없지만" 연구소장이 된 아빠
8평 남짓한 일산의 한 사무실. 각종 연구 보고서와 서적이 꽂힌 책장에 앳된 소년의 사진과 학생증이 놓여 있다. 이곳은 장훈이 2년 전 뜻 맞는 사람들과 차린 '4·16안전사회연구소'다. 방재관리사 자격증까지 딴 그의 시선은 세월호에만 머물지 않는다. 해양 안전, 산업 재해 등 더 넓은 재난 현장으로 향하고 있다.
평범한 아빠 장훈의 과학자가 되겠다는 결심
장훈은 수완 좋은 과일 도매상이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도 밀려든 배달 주문 탓에 새벽부터 바빴다. 오전 10시가 좀 넘었을까. 한숨 돌리며 시장 안 TV 화면을 올려봤다. 거대한 배 한 척이 검푸른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장훈의 인생이 산산조각 난 순간이다. 수학여행 간다며 전날 집을 나선 아들 준형이가 탄 그 배였기 때문이다. 그는 2주가 지나서야 뭍으로 돌아온 자식의 시신을 끌어안고 물었다.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장훈은 이후 그 답을 알아내는 데만 몰두했다. 10년간 이어진 거친 분투의 시작이었다.
장훈은 음모론자였다. 침몰 원인을 쫓던 초기에는 분명 그랬다. 참사 유족 모임의 진상규명분과장을 맡았던 영향이 컸다. 온갖 제보를 받는 자리였다.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는 반드시 음모론이 피어오른다. 2014년 터진 한국 여객선 참사를 10년간 추적해온 미국의 재난학자 스콧 게이브리얼 놀스. 경험 많은 그는 세계 곳곳의 참사 현장에서 음모론이 퍼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재난 조사가 지연되면 사람들은 정부가 무능하거나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서 사고 원인 등을 두고 각자의 가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음모론이죠. 불행히도 이번 참사도 이 과정을 밟았어요."
선체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내로라하는 선박·해양 전문가 8명이 위원으로 임명됐다. 여당과 야당, 유가족 모임이 각각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지원할 조사관 등 40여 명도 채용돼 위용을 갖췄다. 조사위에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년. 하지만 명망 있는 전문가들이라면 충분히 답을 내놓을 것이라고 믿었다. ‘과학의 시간’에 정치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분명 그렇게 보였다.
배를 개조했고 화물도 과적했는데, 이를 대충 묶어 배가 기우뚱했을 때 짐이 한쪽으로 쏠려 완전히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배가 어디에 부딪혀 침몰한 게 아니라 내부 문제 탓에 전복됐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내인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침몰한 배를 직접 보지 못한 채 내린 판단이었다. 장훈이 쉽게 수긍할 수 없었던 이유다.
"불법 증개축, 과적, 고박 불량… 우리 아이들이 죽은 이유라고 하기엔 너무 하찮아 보였어요. 가슴에 와닿지 않았죠."
장훈과 유족들은 전문가들이 선체를 직접 조사해보면 전혀 다른 결론에 다다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조사를 할수록 기존 결론에 무게가 더 실렸다. 잠수함과 부딪혔다면 배 외관이 크게 찌그러졌어야 하지만 그런 흔적이 없었다. 특히 유압 솔레노이드 밸브(④)라는, 작지만 중요한 부품이 고장 났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선박 자체 결함설이 힘을 얻었다.
장훈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내인설과 외력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위원이라도 선박 전문가들이 그 많은 날 연구한 결과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배가 침몰하기 전 급선회한 이유 등을 설명한 핵심적 내용이 보고서에 실려 있는데도 말이다. 위원회 활동 종료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과학적 결론을 듣고 싶었던 장훈의 기대는 그날 완전히 깨졌다.
“아는 물리학자 좀 소개해 주세요.”
카이스트 교수 전치형은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과학기술학자인 그는 선체조사위 의뢰로 종합보고서를 썼다. 장훈은 조사위 마지막 회의 날 전치형에게 과학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스스로 '세월호의 과학'을 이해해보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유족에게 설명해주는 것이 과학자의 임무라고 여겼던 전치형은 동료들을 모았다. 6개월 뒤, 장훈과 5명의 과학자가 모여 벌인 8시간의 수업이 성사됐다.
장훈은 스스로에게도 끊임없이 물었다. '내가 바라는 건 과연 뭔가' 하는 질문이다. 가족이 겪은 비극을 다른 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건 법과 사회 구조를 바꿔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 이 방법을 찾기 위해 살고 있다.
"아들은 돌아올 수 없지만" 연구소장이 된 아빠
8평 남짓한 일산의 한 사무실. 각종 연구 보고서와 서적이 꽂힌 책장에 앳된 소년의 사진과 학생증이 놓여 있다. 이곳은 장훈이 2년 전 뜻 맞는 사람들과 차린 '4·16안전사회연구소'다. 방재관리사 자격증까지 딴 그의 시선은 세월호에만 머물지 않는다. 해양 안전, 산업 재해 등 더 넓은 재난 현장으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