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원래 잘 긴장하지 않는 사람인데 니콜 키드먼과 처음 만나 얘기를 나누던 날, 문득 '아, 이 사람이 스탠리 큐브릭과 영화를 찍은 사람이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입이 바짝 마르더라. (웃음)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의 명배우가 내가 찍는 화면 안에 있다는 게 생소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2273
니콜은 숙련된 연기 기술자이죠. 배우·스태프 통틀어 통역이 제 말을 옮기기도 전에 혼자서 알아들어버리는 일이 가장 잦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몰래 배운 게 아니냐는 말을 꽤 들었죠. 제가 무슨 대담한 제안을 내놓아도 당황하거나 곤란해 하는 법이 없어요. 니콜과 일하다 보면, 저의 가장 와일드한 상상도 그저 전에 몇 번이고 들어본 적 있는 시시한 상투형에 불과하다는 생각조차 들어 우울해지곤 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534768.html
니콜 키드먼은 굉장히 열성적이다. 실제 촬영할 때 대역배우들이 서 있는 자리에 표시를 해두는데, 조명 세팅이 끝나면 대역이 빠지고 실제 배우가 거기 들어간다. 그럴 때마다 니콜은 호출하기 전부터 거기 와 있다. 그럴 때가 정말 자주 있었다. 그러면 아무래도 후배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또 그녀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테스트 촬영 때인데 그땐 보통 어떤 필름을 쓸까, 어떤 필터를 쓸까, 조명 컨셉은 어떻게 잡을까, 하면서 미술팀이나 의상팀까지 아울러 시각적 컨셉을 확인하는 단계다. 그러면 배우는 의상과 메이크업을 끝내고 카메라 앞에서 촬영감독이 '자, 정면이오, 옆면이오' 그러면 정면으로 몇초, 측면으로 몇초 그렇게 찍으면서 준비를 한다. 대개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주변 스탭들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때도, 니콜은 마치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연기한다. 그래서 니콜이 테스트 촬영을 할 때 숙연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웃음) 그렇게 함께 작업하며 느낀 건, 그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예술영화를 만드는 아시아의 한 감독을 자기가 잘 대해주고 보호해주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사람 같았다. (웃음) 그리고 할리우드에서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보통 리허설을 안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나는 영어도 서툴고 낯선 작업환경이라 오차도 있을 수 있고 현장에서 머뭇거리는 게 싫으니 미리 캐릭터 해석 등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 굳이 리허설이라기보다는 서로 대화를 나누며 내가 왜 이렇게 대사를 썼고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고 하는 얘기들을 나누고, 또 배우의 얘기나 접근법에 대해서도 들어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말한 그런 이유라면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나중에 그런 시간들이 정말 좋았다고 얘기해줬다. 여러모로 클래식한 대배우의 풍모를 느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1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