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다시 발생하기를 그치지 않는 우리의 시인들은 세상의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 폭력과 싸우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세심히 가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시인이라서 무엇보다도 언어를 통해 그러기를 원한다. 극소량의 폭력성도 함유하고 있지 않은 언어의 상태에 도달하여, 그로써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자주 오해되지만 그런 비폭력적인 언어의 상태가 순한 단어와 예쁜 표현들로 달성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시선'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런 시선를 가능케 하는 것은 어떤 '자리'에 설 때 생겨난다.
언젠가 '폭력'이라는 말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밝히면서 나는 폭력을 다음과 같이 폭넓게 정의해보려고 했다. '폭력이란? 어떤 시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태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최근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의 혐오표현은 약자들을 향한 언어유희의 현상으로 대표된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와 포털사이트의 댓글을 통해 특정 집단을 향한 비하성 언어들이 만들어지고 유통되었다...
이런 '놀이'의 잔혹성은 특히 그 표현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간극 사이에 존재한다. 수신자의 입장에서 "그건 비하에요!" 라고 말할 때, 발신자가 "비하할 의도가 없었어요"라고 답하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이 간극에서 나온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어렸을 적에 나는 말을 똑 부러지게 한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대여섯 살 적 이야기다.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같은 말뿐 아니라, “저는 지금 심부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할 일이 있습니다” 같은 말까지, 제법 정확한 문장을 구사해 명료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나의 이런 말하기 방법은 자주 지적질을 당했다. 요약하면 “여자애가 말을 그렇게 똑 부러지게 하니 정 없다”라든가, “못됐다” 같은 지적은 예사고 “주는 것 없이 얄밉게 말한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정확하게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으면 말 자체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라 나의 말하는 태도가 문제였다.
“선생님 그 설명은 잘못되었습니다” 대신에 “선생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어물어물 말해야 했던 것이고, “나는 이렇게 생각해” 대신 “네 생각은 어떠니”라고 해야 남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다니, 아니,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니, 도대체 여성은 어떻게 말해야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걸까? 이런 경험을 수많은 여성이 한다. “여자처럼 말하라.”
손아람 작가는 여성들의 말하기에 개입하는 사회적 압력의 비밀을 페이스북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책과 생각들을 들을 때 깜짝 놀라고, 내가 깜짝 놀랐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녹화가 시작되면… 출연자들은 눈높이를 희미하게 감추고, 평소보다 더 부드럽고 더 어눌하게 사랑스럽고 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몇 사람 없는 스튜디오가 온 세계의 편견과 감시에 둘러싸인 듯한 기분이 든다.”
여성이 똑부러지게 말하는 걸 금기시 하는 사회
본인이 잔인하다는 걸 아는 사람들만이 다정해지곤 합니다.
사랑하는 겉들
예전에 맘카페에서는, 가끔씩 조심스럽게 그런 게시물이 올라오곤 했다. 자기가 출산한지 얼마 안 됐는데 아기 분유를 살 돈도 없다고. 그런데 이야기할 곳도 없고 정말 이러고 싶지 않지만 분유 좀 보내줄 사람 있냐고. 유통기한 임박한거나 이미 뜯어서 먹고 남은 것도 괜찮다고.
그러면 애엄마들은 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미혼모인지 기초생활수급자인지, 정말 애가 있는지 없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쪽지로만 주소를 받아서 분유를 보내주곤 했다.
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보내준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살면서 문득 문득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 팔짱끼고 아는 척하기는 참으로 쉽겠지.
사실, 아무것도 모르면서.
@touillehamsking
글이란 본래 가슴에 맺힌 슬픔과 갈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일기가 어떨 때 많이, 그리고 잘 씌어졌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저 놀고 먹고 자고 한 일밖에 없는 날의 일기장에는 쓸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 형제, 친구들과 갈등 속에 보냈던 날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이런 내적 갈등과 고민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을 때 비로소 글이 나오는 것이고 그런 글이 독자들에게도 감동의 울림을 줄 수 있는 법입니다. 깊은 슬픔과 상실을 겅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이른바 '빛은 어둠을 물리치지만, 어둠의 깊이를 모른다.' 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죠?
문학 개념어와 논리적 해석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에는 사실 그 자신도 속지 않는다. 생의 반대말은 죽음이나 퇴행이 아니라 방어의식이다. 방어의식은 사람을 영원히 자기 삶 바깥에서 서성이게 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상처와 결핍을 가졌으며, 손상되지 않은 삶은 없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비극을 쓰기 위해서는 비극을 느껴야 한다. 비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피와 근육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감정이 비극과 참된 행복이 전개될 수 있을 만큼의 진지함과 깊이를 지니려면,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필수이다.
행복의 정복
제 글에 담긴 사랑을 읽어 주셔요. 제 말에 배어 있는 믿음을 받아 주셔요. 제 이야기에 녹여 놓은 손길을 따뜻하게 받아들여서 나누어 주셔요.
우리 글 이야기
언젠가 '폭력'이라는 말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밝히면서 나는 폭력을 다음과 같이 폭넓게 정의해보려고 했다. '폭력이란? 어떤 시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태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최근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의 혐오표현은 약자들을 향한 언어유희의 현상으로 대표된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와 포털사이트의 댓글을 통해 특정 집단을 향한 비하성 언어들이 만들어지고 유통되었다...
이런 '놀이'의 잔혹성은 특히 그 표현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간극 사이에 존재한다. 수신자의 입장에서 "그건 비하에요!" 라고 말할 때, 발신자가 "비하할 의도가 없었어요"라고 답하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이 간극에서 나온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어렸을 적에 나는 말을 똑 부러지게 한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대여섯 살 적 이야기다.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같은 말뿐 아니라, “저는 지금 심부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할 일이 있습니다” 같은 말까지, 제법 정확한 문장을 구사해 명료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나의 이런 말하기 방법은 자주 지적질을 당했다. 요약하면 “여자애가 말을 그렇게 똑 부러지게 하니 정 없다”라든가, “못됐다” 같은 지적은 예사고 “주는 것 없이 얄밉게 말한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정확하게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으면 말 자체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라 나의 말하는 태도가 문제였다.
“선생님 그 설명은 잘못되었습니다” 대신에 “선생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어물어물 말해야 했던 것이고, “나는 이렇게 생각해” 대신 “네 생각은 어떠니”라고 해야 남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다니, 아니,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니, 도대체 여성은 어떻게 말해야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걸까? 이런 경험을 수많은 여성이 한다. “여자처럼 말하라.”
손아람 작가는 여성들의 말하기에 개입하는 사회적 압력의 비밀을 페이스북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책과 생각들을 들을 때 깜짝 놀라고, 내가 깜짝 놀랐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녹화가 시작되면… 출연자들은 눈높이를 희미하게 감추고, 평소보다 더 부드럽고 더 어눌하게 사랑스럽고 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몇 사람 없는 스튜디오가 온 세계의 편견과 감시에 둘러싸인 듯한 기분이 든다.”
여성이 똑부러지게 말하는 걸 금기시 하는 사회
본인이 잔인하다는 걸 아는 사람들만이 다정해지곤 합니다.
사랑하는 겉들
예전에 맘카페에서는, 가끔씩 조심스럽게 그런 게시물이 올라오곤 했다. 자기가 출산한지 얼마 안 됐는데 아기 분유를 살 돈도 없다고. 그런데 이야기할 곳도 없고 정말 이러고 싶지 않지만 분유 좀 보내줄 사람 있냐고. 유통기한 임박한거나 이미 뜯어서 먹고 남은 것도 괜찮다고.
그러면 애엄마들은 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미혼모인지 기초생활수급자인지, 정말 애가 있는지 없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쪽지로만 주소를 받아서 분유를 보내주곤 했다.
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보내준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살면서 문득 문득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 팔짱끼고 아는 척하기는 참으로 쉽겠지.
사실, 아무것도 모르면서.
@touillehamsking
글이란 본래 가슴에 맺힌 슬픔과 갈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일기가 어떨 때 많이, 그리고 잘 씌어졌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저 놀고 먹고 자고 한 일밖에 없는 날의 일기장에는 쓸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 형제, 친구들과 갈등 속에 보냈던 날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이런 내적 갈등과 고민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을 때 비로소 글이 나오는 것이고 그런 글이 독자들에게도 감동의 울림을 줄 수 있는 법입니다. 깊은 슬픔과 상실을 겅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이른바 '빛은 어둠을 물리치지만, 어둠의 깊이를 모른다.' 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죠?
문학 개념어와 논리적 해석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에는 사실 그 자신도 속지 않는다. 생의 반대말은 죽음이나 퇴행이 아니라 방어의식이다. 방어의식은 사람을 영원히 자기 삶 바깥에서 서성이게 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상처와 결핍을 가졌으며, 손상되지 않은 삶은 없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비극을 쓰기 위해서는 비극을 느껴야 한다. 비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피와 근육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감정이 비극과 참된 행복이 전개될 수 있을 만큼의 진지함과 깊이를 지니려면,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필수이다.
행복의 정복
제 글에 담긴 사랑을 읽어 주셔요. 제 말에 배어 있는 믿음을 받아 주셔요. 제 이야기에 녹여 놓은 손길을 따뜻하게 받아들여서 나누어 주셔요.
우리 글 이야기
멋있다... 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