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에요? 무지몽매했던 것은 그들이 죄가 아니에요.
제 얼굴에 침 뱉는 얘긴 관두시지요. 그건 여자 얘기라기보다는 남자 얘기 같네요."
"아니지요. 나는 분명히 여자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신교육을 거부하고 용납하고 하는 데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니까.
남자들에게는 일부 서민층을 제외하고 지식인 남아도는 형편이었고
벼슬못한 선비들이 우글거리던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갈 거요.
여자들의 경우는 지식의 바탕이 전혀 없이, 전통도 없이 바로 들이대었기 때문에
교육을 받았다 하면은 그것을 곧 학문으로 착각을 한단 말입니다.
학문이 무엇인지 그 개념부터 모르거든요. 착각들 하고 있어요, 특히 여자들이 말입니다.
의사나 간호원이나, 재봉, 요리가 포함된 가사과나 심지어 하란사가 미국서 영문학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여 영어공부를 했다 하는 것이 옳아요."
"그럼 정상조 씨가 전공하는 법과는 기술 분야인가요?"
"전문교육을 받은 여성께서도 그런 식의 질문을 하니 한심하지.
요즘엔 박에스터말고도 여의사가 더러 탄생하는 모양인데,
남자도 어렵게 배우는 그 기술 분야를 여자가 해냈다는 데 대하여는
나로서도 경의를 표하는 데 인색해질 이유가 없는 거지요.
그러나 기껏해야 가사과에서 요리나 재봉을 배우면서 학문한다고, 최고 지식인 행세하는 것은 꼴불견입니다."
(중략)
"도무지 난 종잡을 수가 없어요. 대관절 어쩌라는 거지요? 이야기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여자니까 알기 쉽게 간단하게 해주실 순 없을까요?"
강선혜는 일부러 하품을 깨무는 시늉을 했다.
"한마디로 여자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 얘기요.
이제는 양반이고 상민이고 그런 차이점보다 돈 있는 사람 없는 사람으로 구별이 돼야겠지만
돈 있는 집 딸들이 출가할 때 논밭이나 세간 장만해 가는 식으로 공부를 시켜 보낸다거나
돈 없고 얼굴 반반한 여자가 돈 있는 남자를 이용하여 공부를 한다거나,
그런 정신상태라면 학식이란 도시 뭐한 말입니까? 안 하니보다 못한 거 아니겠소?"
"결론하여 여자에게 교육이 필요없다?"
"필요없다는 게 아니라 여자여, 자기 자신을 알라,
어떤 경우에도 여자이기에 덕볼 생각은 말라,
그것은 여자의 역사였으니까 그것을 무너뜨리지 않고 남녀동등을 외치는 것은 우습다,"
"이제, 이제, 고만하세요. 아이구 골치야."
선혜는 팔을 휘휘 내둘렀다.
"나도 그만둘 작정이오."
"제발 여자 연구는 그만하구 공부나 열심히 해서 고등문관에 패스하시구요,
장차 판검사가 됐을 때 어떻게 하면 민족반역자란 소리도 안 듣고 출세도 하고 하겠는가,
지금부터 그 연구나 해두는 게 좋을거예요.
시시한 여자들 땜에 시간 허비할 것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가 않지요. 나도 어차피 장가를 들어야 하고 또 자녀도 두어야 하니까.
알맹이 없는 콧대만 가지고 오는 여자는 문제거든.
그렇다고 해서 콧대 없는 무식한 처녀 데려올 수는 없는 일이고 해서
신여성이라는 부류의 여자들을 생각해본 결과 의외로 문제는 간단치 않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여성 중에서 한푼만 정상조씨보다 얕으면 되겠네요.
하지만 그것 참 어렵겠어요.
한마디만 덧붙이겠는데 출신 신분이 어쩌구저쩌구 하지만요,
정상조씨 입장에서 본다면 여자 박에스터, 하란사는 거물이에요.
정상조씨같은 남자 열 가지고도 못할 일 해냈으니까요."
출처 - 박경리, <토지> 3부 제2편 '분노의 파도'
보면서 울화가 치밀고 소설 안으로 들어가서 줘 패고 싶었던 구절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