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토리는 소설쳐돌이인데 방금 브런치에서 보고 공감되서 일부분 가져와봤어!
출처: https://brunch.co.kr/@viennaworkshop/36 (링크 거는거 문제되면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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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현실보다는 공상이 편한 아이였던 것이다. 수능 준비를 시작하면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문학소녀를 하고 앉아있을 여유는 많이 사라졌으나 글을 읽을 줄 알고부터 씹어 삼킨 소설들은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아주 큰 몫을 했다. 소설 읽기의 순기능이라면 풍부한 상상력과 공감 능력 정도가 있다. 동시에, 나와 세계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에 있어서 참으로 위험한 결과들을 초래하기도 한다.
1. 의미 없는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소설이라는 것이 그렇다. 허투루 쓰인 문장이 없고, 의미 없는 역경도, 사정없는 결함도 없다. 모두 무언가로 향해가는 흐름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간에 의미가 있다. 물론 "한 순간의 실수로 인생이 망하고 말았다"라는 류의 소설들도 있지만 그럴 경우 아주 드라마틱하게 망하고 더 다이내믹하게 회복한다.
그런데 현실은 아주 다르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지긋지긋한 일상의 지난함이 도처에 널렸다. 어떤 사람의 결함에 뚜렷한 배경이 없을 수도 있고, 극적인 반전 없이 침잠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쉽게 말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지는 않다. 내가 어떠한 일을 당한 것, 많이 아팠던 것, 실수했던 것, 잃었던 것은 아무런 배움이나 나아감 없이 거기에서 그치기도 한다. 나는 그것들과는 무관하게 퇴행했다가 진보했다가 하거나 심지어는 제자리에 서있기도 한다. 그것이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이 일에도 의미가 있겠지.
나는 나와 내가 겪은 사건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의 행동, 나의 과거, 다가올 미래의 양상이 너무 랜덤하지 않도록. 니체의 말마따나 날 괴롭게 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라기보다는 고통의 무의미함이었고, 때문에 나는 그 허망함을 피하기 위해 소설의 플롯을 짜듯 상황과 인물에게 스토리를 부여했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무의미의 축제에는 참가하지 못한다. 누군가 내게 상처를 줬으면 그 자가 가벼운 마음의 변화로 그랬다기보다는 깊은 심연의 상처로 인해 그렇게 행동한 것이기를 바라고,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으면 내 어릴 적까지 들여다보며 그 원인을 찾아 정당화 혹은 자기 파멸을 시도한다.
회사 가는 길에 미끄러진 것, 그저께 발톱이 빠진 것, 커피를 엎은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2. 현실에 몰입하지 못한다.
일이 잘 풀려가는 순간에도 소설로 다져진 인격은 많은 것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일어나고 있는 일을 100% 그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실제로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도, 관계도, 나만 보는 일기조차도 어느 정도의 작위성을 띤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는 일을 잘한다고 평가받는 편이지만, 나를 향한 칭찬에 '열정'이나 '몰두'와 같은 단어가 담겨있던 적은 없었다. 내가 요령껏 일을 잘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이 직업을 가진 나"에 몰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일적으로 나를 화나게 하거나 내 일을 뺏어가는 것에 대한 큰 분노 혹은 걱정이 없고, 그렇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그 여유는 내게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뿐이다.
관계는 어느 분기점을 넘기고 나면 깊게 몰입하고 때때로 집착까지 하는 편이지만, 그전까지는 상대방보다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특수한 "관계성"이라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다. 특히 애인 관계에서 그렇다. 초반에 그 사람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에서 파악할 수 있는 소설적 재료들과 특수한 미래상을 중심으로 관계성을 쌓는다. 우리 둘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어떤 장르겠다 라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이거나, 하루키 에세이거나, 전혜린의 수필집이거나. 그리고 그에 맞춰 내 말투와 애정 방식을 정하는데, 이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진행된다. 그래서 한 관계가 끝난 후 내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했는 지를 돌이켜보면 '어라 잘 모르겠네'라며 당황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들 소설을 많이 읽었다. 붕 떠있는 그 부유감을 알아본 것인지. 대학교 때 만났던 M은 나를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의 주인공과 동일시했다. 최근에 헤어진 사람도 당시 읽는 책에 따라 모드가 휙휙 바뀌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상대방과 나, 둘 다 어떠한 "가상의" 세계관 - 그것도 전혀 다를 두 세계일 가능성이 높다 - 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대했던 것이다.
얼마나 괴랄했겠는가.
3. 공감 능력이 다소 피상적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소설을 읽으면 공감 능력이 향상된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활자에서 시작되어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형성되는 사건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헤르미온느가 울 때 따라 울려면, 프로도의 모험을 끝까지 발 동동 구르며 응원하려면, 앤의 성장에 뿌듯해하려면 주인공이 느끼고 있을 감정을 떠올리면서 거기에 휩쓸릴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능력을 기반으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꽤나 괜찮은 고민 상담 상대로 여겨지고 있다. 공감을 잘한다, 맥락이나 흐름을 잘 짚어낸다 는 것이 주된 의견이다.
허나 미안한 얘기지만, 소설을 베이스로 키운 공감 능력을 갖춘 나에게 주변인들의 고통은 소설 속 주인공이 겪는 고난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딱 거기까지, 그러니까 사실은 아주 큰 거리감을 가지고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 친한 친구가 아픈 것과 소설 속 주인공이 칼을 맞는 것은 아주 다르다. 실제성도, 내 대처도. 친구가 아프면 종일 걱정을 하고 시간을 내서라도 병문안을 가지만, 소설 속 주인공이 칼을 맞으면 읽는 속도를 올릴 뿐이다.
다만 - 친한 친구의 헤어짐, 누군가의 길어진 고시 생활, 고모부의 이혼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을 정말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고 함께 아파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과는 거리가 먼, 생활에 가까운 비극일수록 더 그렇다. 내 딴에는 진심으로 위로를 하고 해결책을 도모하지만, 책을 덮어두는 것과 같이 눈 앞에서 멀어지거나 소식이 뜸해지면 도통 있었던 일 같지가 않다. 이 메커니즘은 좋은 일에도 적용된다. 누군가가 결혼을 하는 것이나 고대해 마지않던 전시를 연 것 등에 내가 느끼는 기쁨은 소설 속 주인공이 성공적으로 결말에 도달했을 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뻐해야 할 것 같은 나래티브여서 기뻐한다고 해야 하나.
나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지 않은데, 상대방의 극히 현실적인 기쁨 또는 슬픔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가 확실치 않은 것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문득 내가 느끼는 감정이 가짜라고 느껴질 때면 이토록 비현실적인 스스로가 이상하게만 여겨진다.
(+전문 중 추가)
위와 같이 소설을 읽는 사람의 위험성을 늘어놓아보았지만, 사실은 그냥 내 개인의 특수한 문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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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히 2번이 그래 ㅋㅋㅋ 가끔 유체이탈한 것 같을 때도 있고... 토리들은 어때?
이런 종류의 사람은 현실 스트레스를 공상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러니까 소설을 읽지 말아라가 아니라 안식처 혹은 베이스 캠프처럼 생각하되 현실에서 계속 부딪치면서 현실 감각을 길러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