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을 끝까지 보기 위하여' 중에서
...비르지니 데팡트에 따르면 여성성의 첫번째 조건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트라우마다. 요컨대 여성으로 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품고 사는 것과 같다. 여성으로서 나는 내 몸이 수치를 당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값싼 욕망에 휘둘려 함부로 만겨지던 때마다 내 몸에 찢기든 새겨진 역겨움과 두려움을 기억한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은 아무도 없었지만, 세상은 우리의 비명을 듣지 못했다. 그것을 발설할 수 없도록, 발설한다 하더라도 경청될 수 없도록, 우리의 목소리를 말살하는 방식으로 세계가 이미 구조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비르지니 데팡트는 이 같은 "여성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타인이 우리에게 범하는 일들에 대해 언제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욕망에 대해 책무를 지는 존재. 강간은 명확한 정치적 기획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뼈대를 이루며,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을 직접적이고 잔혹하게 대변한다. 그것은 지배자를 지목하고, 그로 하여금 제한없이 자신의 권력을 부릴 수 있도록 놀이의 법칙을 설계한다. 절도, 탈취, 강탈, 강요. 그 무엇에 관해서든 지배자의 의지는 아무 족쇄 없이 행사될 수 있고, 그는 자기 폭력성에 취해 쾌락을 느끼며, 이때 지배당하는 자는 저항의 힘을 갖지 못한다. 타인의 존재를, 그의 언어를, 의지를, 총체성을 말살하는 쾌감. 강간은 일종의 내전이자 정치적 책략이며, 그로부터 하나의 성은 다른 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이 된다. 나는 너에 대한 모든 권리를 취할것이고, 나는 네가 스스로를 열등하고 타락한,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로 느낄 것을 강요한다.'
여성혐오란 여성의 존재 가치에 대한 멸시를 의미한다. 가부장제는 여성혐오에 기인하며, 그 작동 과정에서 강간이라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제 의지와 관계 없이 몸을 겁탈 당할 가능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남자와 동등한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람으로 셈해지지 않았다. 무가치했다. 그리고 바디우에 따르면 한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생각과 그 존재를 말살해버리는 행위의 실천 사이는 무섭도록 가깝다. 그렇게 여성은 죽임당했다. '그들은 그녀를 안 죽이기로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했지.' 앙헬리카 리델의 연극 <힘의 집>에 나오는 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죽이기로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남성들이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죽은 여성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마치 그녀가 죽임당해 마땅했다는듯이. 사실상 세상은 죽은 여성에 대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해 세계는 무관심하다. 살아 돌아온 여성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당한 치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소비되었다. 살아 돌아왔으므로 충분히 끔찍하지 않았고, 심지어 강간도 아니었다고 세계는 선고했다. 살아 돌아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죽어야 했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죽으라는 말이다. 영영 침묵하라는 것이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여자는 죽임당한다.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력했다. 열등의 조건을 스스로 체화하며 살았다. 세계가 가르친대로 겁탈당한 내 몸을 치욕스러워했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스스로의 자유를 결박했다 그렇게 가부장제의 명예 남성이 되어 제 목을 조르고 있었음을 깨닫는 일은 그 자체로 또 한번 트라우마가 된다. 깨닫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 귀에 들리는 말들이 너무도 뼈아프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을 부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지했기에 방관했고 무감했기에 동조했던 순간들 속에 나 자신이 또한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여성의 고발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 찢어지는 감정이라기보다, 몸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물리적인 소스라침에 가깝다. 그 몸들의 배경으로 온 세계가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그 환멸과 피로에 휘청이는 것.
연극을 매개로 쓰인 에세이인데 왜이리 와닿는 문구가 많던지. 확실히 여성의 시각에서 풀어진 책들이 좋더라.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좀 늦게 깨우친 경우인데 시작이 이 책이었어. 저 단락들 덕분에 다른 사람이 된것처럼..
최근 동덕여대 일로 생각이 많아졌는데 덕분에 이 책을 떠올렸어. 같이 봣으면 좋겠다 싶어서 올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