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하!
햇수로 6년째, 암이랑 '함께 살아가고' 있는 토리 힘차게 입장!
나는 암 진단 당시 굉장히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에서도, 주변에서도 '암환자 답지 않게 긍정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던 환자고, 치료 받으면서도 '암환자 답지 않게 산다'는 말도 많이 들어봤어.
일단 나는 '암환자 다운'게 뭔지, '환자 다운게' 뭔지도 모르겠고,
'어린 나이'에 '재수 없게' 암에 걸려서 친구들처럼 오래 살지도 못할 불쌍한 애로 취급받는 게 싫었어.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몸을 좌지우지 할 수 없으니 일단 숨 쉬는 동안 '암'이란 애랑 같이 잘 살다가 가자, 라는 마인드로 살고 있거든.
그렇다고 암이 반갑다거나 친구라거나 뭐 그런건 아니고 ㅋㅋ
한 두해 치료받다보니까 내가 열심히 치료받는다고 그 열심히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었어.
이렇게 서두에 구구절절 이야기를 쓴 이유는,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를 읽고 난 후에
어린 나이에 찾아온 암이라는 불청객을 '나름대로' 잘 대하면서, 주변의 시선이나 말들로부터 상처를 덜받아왔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사회가 만들어놓은 '환자다움'의 프레임이나 성차별적 사회구조로부터 야기된 불평등적 시선에 갇혀서 나를 제한하고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질병은 반드시 극복해야하는 대상이 아니고,
건강은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것임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고
나 조차 나의 몸을 고쳐야 하는 고장난 기계로 보는 시선을 바로 세우게 됐어.
책은 전반적으로 본인이 질병을 가진 사람이 되어 느낀 부당한 시선과 사회의 구조, 질병을 다루는 것에서 조차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있는 한국 사회 여성들의 현실 등을 이야기하고 있어.
나는 내가 암환자가 되고나서 경험했던 황당한 것들, 예를 들면 통증에 대한 의사들의 황당한 대응, 암에 대해 가르치려 하는 비암환자들, 질병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나에게 질문 폭격을 던지는 사람들 등등을 나만 겪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나 혼자 겪은게 아니더라고. 공감도 정말 많이 되고, 위로도 됐어.
또 남성과 여성이 통증을 호소할때 남성이 대체로 진통제를 처방받는 것에 반해 여성은 많은 경우 심적인 이유로 우울증 약을 처방받고 있다는 (말도 안되지만 매우 공공연한) 성차별적 사회에 대한 고찰이나 여성과 남성의 신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약등의 개발은 수컷 쥐, 남성들의 신체를 위주로 이루어진다는 부분에선 머리가 띵 하고 맞은 거 같더라.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마주하는 사회적 시선, 차별 등과 관련된 부분들만 발췌해 왔으니 관심 있는 토리들에게 일독을 추천해!
(앞의 페이지는 전자책 기준)
- p.8 질병은 내 삶에 상처를 입혔다. 잘못 살아서 아픈 거라는 자괴감에 스스로를 미워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무거웠다. 질병 때문에 삶의 결정권을 잃고 계획이 무너지면서 상실감에 넘어졌다. 무엇보다 아픈 몸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흔들리는 삶 위에 놓인 무력감은 고스란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 p.8 내가 상처입은 것은 질병 때문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픈 몸이 되고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건강 중심 사회임을 알게 되었다. (중략) 비장애인 중심 사회가 장애인들을 배제하듯이, 건강 중심 사회는 아픈 몸들을 배제하고 있었다. 아픈 몸들을 자책감의 나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 p.9 하지만 사회는 건강한 몸만을 올바른 ethical 몸의 기준으로 상정하고 있었고,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언어는 건강 세계의 언어뿐이었다. 나의 아픈 몸을 설명할 언어가 별로 없었다. (중략) 혹은 세상에는 성폭력 피해자가 이토록 많지만, 사회는 여전히 성폭력에 대해 무지하고, 가해자의 언어만 가득한 현실과도 약간 유사했다. (중략)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다는 말도, 반드시 건강을 되찾으라는 말도 불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 p.12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질병을 몸에서 삭제해야 하는 배설물 같은 존재로만 본다면, 만성질환자를 포함해 질병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아픈 몸은 불행한 패배자로 살 수밖에 없다. (중략)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된 노동을 반복해도 결코 아프지 않은,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자연이 생명체에 부여한 생로병사를 낙인이나 차별 없이 겪을 수 있는 몸,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건강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삶, 이는 질병이 삶의 선물이었다는 긍정 서사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중략) 아픈 몸도 행복한 삶은 질병을 ‘극복’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을 ‘정상’으로 교정하지 않아도 자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에서 가능하다. 질병을 곧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가 변화하길 바란다.
- p.25 내가 질병에 대해 말하거나 글을 쓸 때마다 말리는 친구가 있었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낙인 때문이다. 나도 사실 몇 차례 들었다. “젋은 사람이 어쩌다가”,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결혼을 안 해서” .....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는데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이토록 유통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질병에 대한 낙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 p.39-40 어떤 면에서 이 사회가 아픈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약간 닮았다. 우선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전제 아래 시도 때도 없이 가르치려 드는 ‘맨스플레인’과 비슷하다. 두번째는 부적절한 상황에 문제 제기하면 성찰하거나 사과로 답하는 게 아니라 ‘네가 예민한 거’라고 충고하거나 근엄하게 공격하는 모습이다. 세 번째는 만날 때마다 살이 쪘다거나 빠졌다, 혹은 예뻐졌다거나 안예뻐졌다는 말로 평가하며 사회가 외모를 공동 관리하려는 태도다. 생각해보면 이 사회의 표준 몸은 ‘비장애인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고, 여성의 몸은 월경과 출산을 하는 ‘표준을 벗어난’ 비정상 몸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니 또 다른 비정상 몸인 ‘아픈 이’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문득 명절에 오가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명절에는 친밀한 가족들은 물론이고, 길에서 마주치면 모르고 지나칠 법한 친척들도 결혼, 취업, 출산에 관련한 질문이나 조언을 쏟아낸다. 그들은 그게 다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라고, 염려되어 그런 거라고 말한다. 아픈 이에게 다 너의 건강을 염려해서 그런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명절에 오가는 그런 질문이나 조언이 대개는 간섭과 통제, 우월감을 확인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 p.54 분노가 용암처럼 흐르는 이 사회는 단지 질병인 뿐인 유방암, 자궁암, 결핵, 에이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특정 질병과 사회적 차별을 결합시켜 새로운 ‘질병 이미지’를 생산해낼 수 있다. (중략) 앞으로 다른 질병에서도 에이즈만큼 극도로 부정적인 질병 이미지가 생산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분노가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를 향해 또 어떤 식의 엽기적인 차별과 혐오를 개발해낼지 문득문득 두려워진다.
- p.39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회가 아픈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픈 사람에게 질병이나 건강관리에 대해 한마디씩 할 수 있고, 해도 된다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조차 쉽게 간섭하고 통제하려 드는 것,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위를 승인해주었을까?
- p.56 ‘긍정적이네, 아픈 사람 같지 않아’라는 식의 말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표현을 칭찬으로 수용하려면 아픈 사람은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는 전제를 수용해야 한다. 이때 아픈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수용해야 ‘칭찬’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의리 있네, 여자 같지 않아”라는 말을 칭찬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여자는 의리 없는 존재라는 전제를 수용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픈 몸 정체성과 계속 함께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아픈 몸을 부정하는 것은 질병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해 계속 한탄해야 한다는 뜻이다.
- p.61 질병을 둘러싼 차별적 말과 태도는 아픈 몸들이 사회에 평등하게 참여하며 존중받을 권리를 제약한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질병을 개인의 불행, 수치, 책임으로 귀속시켜 열등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질병을 숨기기 위한 긴장을 유발시킨다. 혹은 반대로, 몸은 아프지만 쓸모 있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정투쟁을 하게 만든다. 즉, 질병을 극복했거나, 질병으로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거나, 질병이 있어도 뛰어난 삶을 살았음을 입증하고자 노력한다. 나를 포함해 질병과 함께 사는 이들이 양쪽 모두를 그만둘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문제는 우리의 아픈 몸이 아니다. 질병을 삶의 일부가 아닌 배타적 대상으로 만든 사회다.
- p.66 어떤 병명 하나가 몸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명을 부여받는 순간, 해당 병명과 상관없는 증세는 존중받지 못한다. 인간의 몸은 유기체이므로 어느 장기에 질병이 있다는 것은 다른 장기 또한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뜻일 수 있다. 질병으로 진단할 만큼 심각하진 않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는 증세는 무시되고, 병명을 부여받은 것에 한해서만 고통을 인정받는다. (중략) 내 몸은 어제와 똑같은데, 오늘 의사가 어떤 의학적 명명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몸이 된다. 환자의 경험이 의학적 언어로 설명될 때만 실재하는 것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게다가 병명을 찾지 못할 때 의사가 흔히 내리는 ‘심인성’이라는 진단은 또 어떤가? 자신의 증세가 의학적 병명을 부여받지 못할 때, 환자는 스스로 감각과 경험을 의심하게 된다. 이정도 통증은 다들 견디며 사는데, 자신이 너무 나약하고 까다로운건 아닌지 자책한다.
- p.67 게다가 남성보다 여성이 심인성으로 진단받을 때가 많고, 그런 진단 때문에 진짜 병명을 알아내 치료를 받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들도 있다. 심인성이라는 말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는 말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의학은 환자 앞에서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해당 증세에 대한 진단명을 아직 찾지 못했다거나, 증세에 대한 연구가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거나, 진단명을 부여하지 못하는 증세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지우는 것 같다. 그렇기에 ‘심인성’이라고 진단함으로써 의학이 아니라 환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건 아닐까? 병명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 곧 환자의 마음이 병을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말이다.
- p.83 나는 여성으로 호명되는 존재라서 아프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더 잘 수용된다. 그 배경에는 여성의 몸이란 원래 나약하고 열등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사회에서 나약함은 보호가 필요하며 통제가 가능하다고 본다. 평등이 불가능한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 삶 구석구석에 젠더가 공기와 물처럼 스며 있음을 깨닫게 된다. (중략) 나약함이나 아픈 것은 여성의 특질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의 특질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는 명제를 인정하는 것과 동일하다. 여성이라서 나약하고 아픈게 더 잘 수용되고, 남성이라서 나약함이나 아픈 게 남성성의 훼손으로 인식되는 것은 동일한 맥락 위에 있다. 모두 성차별의 연장선일 뿐이다.
- p.85 중고생 시절, 월경통으로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양호실에 가겠다고 하면 교사들은 꾀병 아니냐는 눈길을 보냈다. 친하지 않은 친구들은 혼자 편히 쉰다고 수군거렸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성 상사들은 여성 직원에게 여약함은 더이상 미덕이 아니라며 참을성을 길러보라고 충고했다. 여성 동료 한 명은 때마다 특별대우를 받으려 한다며 비난의 시선을 보냈다. 월경통은 생물학적 통증 외에도 매달 일상이 무너진다는 점에서 힘들다. 무엇보다 자신의 통증을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립감이 큰 괴로움을 준다. (중략) 그는 특히 의사들의 태도를 설명할 때 분노를 비쳤다. 의사들은 검사 결과가 정상임을 확인할 때마다 ‘평소에 예민한 성격인지’, ‘가족이나 친구 관계는 원만한지’ 물었다. “월경통은 누구나 겪는 것이니 마음 편히 가져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치민다. 자신이 ‘누구나 겪는 월경통’을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혹은 마음 편히 먹으면 그냥 지나갈 일에 유난 떠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 같아서다.
- p. 104 우리는 엄청나게 발전한 의학, 나날이 길어지는 평균수명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질병에 대한 불안이 어느 때보다 강력한 사회에 살고 있다. 생명체로서 질병에 대해 느끼는 생래적 불안 외에도, 질병에 걸린 것은 자기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무의식적 낙인이 흔하다. 특히 자기 관리를 최고의 덕목으로 일반화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아픈 사람을 '루저'로 평가받게 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 p.113 수술 동의서에 본인 서명을 마치고, 동생이 보호자란에 서명하려 하자 담당 간호사가 손사래를 친다. 보호자 서명은 남편이나 부모만 가능하단다. (중략) 그런데 이렇듯 보호자란에 부모님 서명을 받고 입원할 때마다 남편에게 '승계'되지 못해 아직도 부모님 서명이 필요한 '미숙한' 존재가 되는 것만 같다.
- p.114 어떤 이는 오랫동안 간병해온 어머니의 수술동의서에 서명하려 했더니, 남자 형제가 있는데 결혼한 딸이 서명할 수 없다며 제지당했다고 했다. 출산을 위해 입원했을 때, 친정 부모는 서명할 권한이 없고 남편과 시부모만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1인 가구인 친구가 갑자기 입원을 해서 수술동의서에 서명하러 갔더니, 가족이 아니면 입원 보증금 몇 백 만원을 내라고 요구받았다는 경우도 있었다 (입원 보증금은 불법이다).
- p.124 1인 가구가 질병 앞에서 취약해지는 것은 1인 가구라는 삶의 형태 때문이 아니다. 1인가구를 위한 사회적 제도가 갖춰지지 않아서다. 1인 가구의 증가가 필연적으로 고독사 같은 사회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1인 가구에 걸맞은 사회적 제도의 부재가 1인 가구의 사회적 문제를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혼 또는 1인 가구에게 결혼을 하라거나 '정상가족' 속으로 들어가라는 압박이 아니다. 우리 삶의 형태를 반영한 사회적 안정망과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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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밑줄 친 부분은 정말 훨씬 더 많은데 이만큼도 오버한거 같다...(민망....ㅋㅋ)
어떤 질병, 만성적 질환 혹은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많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
내가 발췌해 온 부분들은 머리를 때리는 이야기들의 1/10도 안되니 토정 토리들에게 일독을 추천합니당!
행복한 연말연시 보내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