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신작 디디의 우산을 며칠전에 다 읽고, 밑줄쳐놓은거 따로 정리하고 있거든.
정리하다가 작가님이 한남+가부장제+그에수반한권력구조 조용하게 후드려 패시는게 너무 웃겨서 같이 보려고 들고왔어! ㅋㅋㅋ
1.
1946년에 태어났고 5녀2남의 장남인 그는 십대 때부터 작은 사업들을 시도했는데 장사나 사업에 별 수완도 소질도 없이 번번이 망했고 그때마다 누나들과 여동생들이 미싱 시다로 일하며 번 돈을 끌어다 썼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아이들을 키운 할머니에게는 그의 실패가 그의 무능력은 아니었고 그의 불운이자 천성의 결과일 따름이었다. 우리 자매의 고모들에게도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남을 속이거나 해코지 못하는 착한 동생, 비정하고 몰인정한 사업의 세계에서 약삭빠르지 못해 손해만 보고 미끄러지는 불쌍한 오빠, 착하고 불쌍한 아들로 살아온 그는 스스로를 선하고 불쌍하게 보는 데 익숙했고, 불쌍한 사람으로 자신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데 능숙하다.
2.
너희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아버지)가 말했다지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나 그의 용서가…… 우리에겐 그의 용서가 이미 필요하지 않다.
3.
(어렸을 때 밥상에서, 전두환에 대한 위험한 발언을 했던 나의 입을, 아버지가 틀어막은 사건이 있은 후)
이렇게 가정해볼까. 아버지가 말하는 권위는 곧 힘이고 힘이란 곧 누군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누가 들을까 두려워 급하게 자식의 입을 틀어막게 만든 힘, 그는 그런 힘을 경험했고 그것이 힘이라는 것을 알며 힘이란 곧 그게 되었다. 그게 없음을 그는 혐오한다.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누구도 ‘권위 없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권위 없음’ 상태를 두려워한다. 그가 누군가의 ‘권위 없음’을 비난할 때 그에게는 그것을 하는 ‘권위’가 있으므로 그는 힘없음을 힘껏 혐오한다……
4.
(화자의 동성 반려자를 두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너는 결혼적령기도 넘었으니 재취자리만 남기 전에 얼른 결혼하라는 독촉을 했을 때)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상식을 말할 때 어떤 생각을 말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바로 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중략)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5.
(화자와 동성 반려자가 동거하는 집 이웃의 무신경하고 무례한 물음을 듣고 화자의 반응)
너희가 무슨 관계인가.
나는 궁금하다. 그렇게 묻는 우리의 이웃은 그것이 정말 궁금할까? 그 ‘궁금함’의 앞과 뒤에는 어떤 생각이 있을까, 그것은 생각일까? 예컨대 너희가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서수경과 나는 우리의 대답으로(우리가 대답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가 또는 우리 각자가 대면할 수 있는 위협을 생각하고, 질문자와의 관계 변화를 생각하고,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대답 이후까지를 찰나에 상상하는데 우리에게 질문한 이웃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