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내겐 가끔, 혹은 아주 자주, 마음 속이 서늘해지며 떠오르는 시야.

나는 오늘도 사소한 것에만 분개하는, 작디작은 그런 인간은 아니었는지.
  • tory_1 2019.03.07 15:38
    뼈 맞구 갑니다 쓰앵님
  • tory_2 2019.03.07 15:47
    토정에서 이 시를 보게 되다니!!!<br />
    학창시절 내가 제일 좋아한 시였어ㅎㅎ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때 감정이랑 생각이 떠오른다!!!
  • tory_3 2019.03.07 17:25
    두고두고 읽을게!!!
  • tory_4 2019.03.07 21:06
    너무 좋은 시다. 뽑아두고 자주 보고싶어
  • tory_5 2019.03.08 12:24
    나도 이 시 대학 때 처음 누가 읽어줘서 들었는데 기억에 오래 남는 시였어
  • tory_6 2019.03.13 16:10

    김수영 시 중에 이 시를 제일 좋아해.

  • tory_7 2019.03.28 01:39

    나도 이 시 정말 진짜 좋아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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