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앞둔 여러분에게 '영화와 책을 통해 취향을 만들어가는 법'에 대해 말하려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제가 여러분의 나이였을 때 본 영화였어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라는 영화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개봉했는데 몇 번이고 보러 갔던 기억. 시내에 있는 극장에 가기 위해 야간 자율학습을 빠지겠다고 담임선생님에게 말하러 갔던 일. 그런데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길게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향을 만들어간다는 멋진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안경을 고쳐 쓰고 세상을 보는 눈을 수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혹은 앞으로 쓰게 될 안경에 대해 미리 말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피할 수 없는 대중문화의 소비자가 될 것이고, 어쩌면 생산자가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대중문화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 다른 하나는 앞으로 3년 내에 여러분이 꼭 해보았으면 하는 것 세가지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고등학교를 떠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린 성인 여성이 됩니다. 화장을 하면서 눈치 볼 필요가 없고, 애인을 만들거나, 아르바이트, 투표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행동반경이 더 넓어질 것이고,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게 될 거예요.그리고 인터넷과 잡지를 통해 무수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보게 됩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링'에 대한 조언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여성을 설득하리라 생각합니다. 밤길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주의도 마찬가지겠지요.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 여러분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다르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언젠가 여자인 지인에게 낯선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 때는 조심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 딴에는 현실적인 조언이었어요. 술에 취한 여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성적 폭력을 당하기 쉬우니까요. 그 때 그 지인이 되물었습니다. 왜 남자들은 해도 되는 것을 여자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느냐고요. 낯선 사람과 어울릴 때 남자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을 여자는 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요. 그 말이 맞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폭행했을 때, 사회는 여성에게 조심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폭력 사건에서 비난받아야 하는 쪽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입니다. 그 사실은 너무나 터무니없이 쉽게 잊혀집니다. 조심하라는 말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해자에게 강조하는 일은,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의 행동반경을 좁힙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무엇이든 경험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주의 사항들에 대해 의문을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나 책, TV 드라마를 볼 때도 해당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접했던 일상의 풍경과 대중문화는 (앞으로 접할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남성의 시선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새 스마트폰 개통을 위해 통신사 대리점에 들어갈 때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으신가요? 가게 유리문에는 실물 크기의 여자 모델(대체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여자 아이돌) 스티커가 붙어있습니다. 그녀들은 때로 엉덩이를 빼고 뒤를 돌아보거나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언제나 핫팬츠 차림입니다. 친구나 동료들과 맥주 한잔하러 술집에 가보면, 술집 앞에는 또 사람 크기의 여자 모델(역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여자 아이돌이나 배우) 입간판이 줄지어 있습니다. 제가 가는 은행에도 그녀들이 서 있습니다. 혹독할 정도의 포토샵으로 완벽하게 보정된 그녀들은 여기, 저기, 거기에 서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광고일까요?핸드폰도, 술도, 은행도 특정 성별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타기팅하여 광고합니다.
영화는 어떤가요? 10년 전 어느 여성 제작자는 여자가 주인공인 누아르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제작비를 구하기 어려워 매번 무산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여자가 중심인,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는 꽃미남이 연인(또는 썸남)으로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고는 다 망한다는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여성이 주요 관객층이지 않느냐, 그러니 여자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잘되지 않겠느냐 물으면 돌아오는 말은, 여성이 주요 관객층인데 여자는 꽃미남만 좋아하고 여자 배우에게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여자 주인공이 예쁘면 여자 관객들이 질투해서 몰입도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남성 관객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영화에서 노출 심한 옷을 입은 섹시한 여성 배우를 내보낸다면, 여성 관객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영화는 평범한 여성 배우를 내세우는게 좋다고, 저는 그 말을 듣고 즉시 따지지 못한 일을 지금도 후회합니다. 남성 관객들이 <신세계>, <무간도> 같은 영화를 보며 잘생기고 멋진 주인공의 활약에 감정 이입을 하고, 영화관을 나오며 대사를 따라 하는 일을, 왜 여자는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까요? 여성 관객들은 질투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을까요?(중략)
'이미지'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여자가 사건을 해결하고, 여자가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에서 얻는 여성의 이미지는 여러분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마음 어딘가에 남아 인생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래도 될까?'하는 망설임의 순간에 아주 작을지라도 박수를 쳐줍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을까' 갈등하는 찰나의 순간에 큰 차이를 낳습니다. 더 확장해 생각하면, 여러분이 앞으로 삶의 방향을 잡을 때 참고하게 될 역할 모델 이야기가 됩니다.
<고스트버스터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84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2016년에 리메이크되었습니다.(중략) 그런데 제가 이 영화와 관련해 가장 사랑하는 에피소드는 2016년 핼러윈 때, 미국에서 고스트 버스터즈 유니폼을 입은 소녀들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여자도, 고스트버스터즈가 될 수 있었던 거예요. 저는 어렸을 때 1984년 작을 봤고, 속편도 봤지만, 고스트버스터즈는 원래 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은 영화나 TV 드라마, 예능, 뉴스에서 남성과 여성이 나올 때 한 번 의문을 던져보기를 바랍니다. 늘 남자가 앉는 자리에 왜 여성이 앉으면 안될까 궁금해 하길 바랍니다. 왜 안경 낀 여성 앵커는 없을까? 왜 환갑이 된 여성은 뉴스 진행을 하지 않을까? 왜 정치적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은 남자인데, (그건 그렇다 쳐도) 그 팀의 하나뿐인 여성 캐릭터는 성실하고 싹싹하게 주인공을 '보필'하는 역할일까? 왜 이십 대 초반 여자 배우나 가수는 삼십 대 후반인 사십 대인 남자 코미디언들 중 누가 이상형인지, 그 중 한명하고 사귀어야 한다면 누구와 사귈지 선택해야 하는 걸까? 여기에 하나 더 있씁니다. 저는 지금 '여'배우 '여'기자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배우가 남자 배우를 뜻하고 기자가 남자 기자를 뜻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지는 것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TV에 나오는 정치인들 중 남자와 여자의 비율을 따져보세요. 세계 정상회담도 뉴스에 자주 나오죠? 여자는 어떤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나요? 성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나 더 보기 좋은 일을 나눠놓은 건 아닐까요? 앞 세대가 그어놓고 견고하게 만든 선 안에서 여러분의 진로와 삶을 결정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저를 비롯한 동시대의 여성들이 바꾸고자 하는 것들을 여러분도 함께하길 바랍니다. 원하는 직업, 원하는 삶을 성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상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처음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비혼 사십 대 여성 선배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저와 제 주변인들은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어주면서 이전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이 나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앞 세대의 동성 역할 모델을 찾고 영감을 얻는 일도 멋지지만, 저는 여러분이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함께 더,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이를 초월하여 영원한 젊음을 보장받은 것 같은 여성만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직군에서 자기 일에 충실한 여러 연령대와 외모의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그렇게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길 바랍니다.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다혜 기자의 페미니즘적 책 읽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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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토리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가져왔어.
이 부분을 책에 실으신 게 전에 수능끝난 시기의 고등학생들 대상으로 강연을 하시게 됐는데, 어떤 얘기를 하면 좋을까 하시면서 준비했던 내용들에 살을 덧붙인거라고 하더라고. 가져올 때 중간 중간 어떤 예시나 에피소드 등을 생략하고 가져왔는데 생략된 부분도 너무 재밌게 글을 쓰셔서 꼭 다들 책을 통해 전문을 읽어봤으면 좋겠어ㅋㅋ 2017년에 나온 책이니까 그 전에 아마 준비하셨던 내용일텐데. 그래서 왠지 지금은 논의가 더 활발하게 진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잘 인식하고 있는 부분들도 있고, 10년 전이라고 했지만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는 것들도 있고, 여러가지를 글 하나로 잘 모아주신(?) 것 만으로도 좋았어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이야기 하듯이 이 챕터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어.
읽어보면 사실 뒷부분(3년 내에 꼭 경험했으면 하는 3가지)에서 권하는 사항들이 엄청나게 새로운 것들은 아니지만, 권하는 이유는 기존과 명확하게 다르기도하고 이해가 잘되었던 게, 작가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스스로 '이 이야기는 제가 처음에 그렇게 잘 배우지 못해서 실수 연발로 살고 있기 때문에 애타게 부르짖는 말입니다.'라는 표현을 하심ㅋㅋ) 유익하고 유효한 것들이었어. 막연히 이런게 좋다 이런 식의 얘기도 아니었고 실천할 때의 구체적인 방안들도 나와있는 것도 좋았음ㅋㅋ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봐도 저런 이야기를 아무도 해주지 않았고, 한 번은 듣고 시간들을 지나올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또 그 세가지를 이야기하면서 함께 해주는 이야기들도 참 좋아서 꼭 다들 읽어봤으면 좋겠어!!
이 챕터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다 너무 좋아, 글 읽기를 너무 좋아하는 여성 독자로서 빠질 수밖에 없던 혼란과 어려움에 공감이 되기도 하고, 좋은 작품들을 알게되기도 하고. 또 작가님 본인이 여성으로서, 40대가 된 지금까지 직장인으로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에피소드들도 사회 구조와 맞물려서 녹아있어서 좋았어. 세심하고 위트도 있고 무엇보다도 글을 술술 잘 읽히게 잘 쓰시더라고
아무튼 ㅎㅎ 이 책의 많은 부분이 너무 좋지만, 마무리로 이 챕터의 마지막 문단을 두고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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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때,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불편한 딱지나 낙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비난으로 사용할 때, 그 자리에서 대응하는 게 어렵다면 그냥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분위기를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고 싶다는, 비록 그것이 나의 존엄을 해치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나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저는 그런 당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비난에 저항하고,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비난을 무시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게 될 수많은 나날에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 됩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그 사실을 어떤 순간에라도 기억하세요.
여성으로서 살아갈 여러분의 나날이 도전과 성취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이미 저 파릇파릇한 시기를 한참 지난 나지만 깊이 공감이 되서 추천누르고 갑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