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올해 출간된 책 X 올해 내가 읽었던 책 중 특히나 와닿았던 문장들을 가져와봤어.
고전 명작 같이 너무 메이저 한 것들은 제외함.


1. “이 모든 게 정말이지 수치스러운 일이야”
/ 나를 보내지마, 가즈오 이시구로



2. 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특이한 인물들에 끌리곤 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이들, 마음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는 이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저질러 버리고 그에 따른 크고 작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멍청하고 못난 사람들이 좋다. 비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캐릭터를 원한다. 추잡한 생각들을 하고 맹추 같은 결정을 하는 인물들을 원한다. 실수를 하고도 전혀 안타까워하거나 후회하지 않고도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인물들을 보고 싶다. 
/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3.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크건. 작건. 비극이. 부르면. 연민이. 응답한다. 가슴이. 응답한다.
/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4. 하지만 이따금 술을 마시고 환락가의 여인들과 즐길 때면, 기사부로는 행복해했지. 그 여자들은 그에게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고, 어쨌든 그날 밤 동안은 그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었어. 아침이 밝으면, 물론 그는 똑똑한 사람이어서 그런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하지만 기사부로는 그런 밤들을 아침만큼이나 가치 있게 여겼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지. 가장 좋은 건 밤과 일체가 되었다가 아침과 함께 사라지는 거라고 말일세. 사람들이 부유하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 말일세.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가즈오 이시구로



5.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6. 여덟 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여름밤 마당 평상에서 느이 아부지하고 삼 형제하고 같이 수박을 먹을 적에. 입가에 묻은 단단하고 다디단 수박물을 네가 혀로 더듬어 핥을 적에. 
/ 소년이 온다, 한강



7. 그럼요, 어머니가 계셨다면 망설이지 않고 만났을 겁니다. 놔주지도 않고 끝없이 동호 이야기를 했겠죠. 삼십 년 동안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 소년이 온다, 한강



8.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시체를 껴안고 울며불며 사막을 헤매는 것. 이것이 딸들의 인생이다. 몇 년 전 내가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난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9. 활짝 핀 꽃 앞에
남은 운명이
시드는 것밖엔 없다 한들

그렇다고 
피어나길 주저하겠는가
/ 그대, 이석원



10. 내가 정말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어느 날 정열이 사려져 버린 상태를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을 
긴 호흡으로 이어갈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제대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너무 빨리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 가장 보통의 존재 18p, 이석원



11. 이리저리 복잡하게 살아봤지만, 과거를 따돌릴 순 없었다. 그리움은 무엇보다 영민하지 않던가. 기어코 뒤를 졸졸 따라오던 녀석을 감히,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다. 
/ 가을, 김민준 



12. 옷깃을 여미며 나아가야지.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무성한 표현들로 무언의 고백들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덕분에 웃었고, 그 덕분에 참 많이도 울었다. 
/ 겨울에 피는 꽃, 김민준



13. 벽인 줄 알았는데 귀가 있다니 얼마나 감동이겠냐만은, 귀가 있었는데 왜 이제 들었냐고 열 받아도 됩니다.
/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민경



14. 건지는 따뜻한 해변으로 가고 있을까. 처음 만났을 때 도리는 해가 지는 방향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말했다. 아직도 그리로 움직이고 있을까. 봄이 오면 땅과 강이 녹고 세상은 푸르게 변할 것이다. 꽃은 피고 햇볕이 내리쬐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인간끼리 아무리 총을 쏘고 파괴하고 죽이고 죽여도 자연은 변함없이 자신의 일을 할 것이다. 나는 머물러 봄을 맞고 싶었다. 나무와 꽃과 청량한 강이 있는 곳에서 내가 사람인지 바람인지 모른 채 살고 싶었다.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를 만나고 싶었다.
/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15. 괜찮아. 이것도 삶이야. 
/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16. ㅡ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엄마의 그 말에 내 안에 있던 분노가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딸이고, 형제라는 사실. 누군가에게는 목숨 걸고 지킨 생명이라는 사실을 나를 강간했던 사람들은 몰랐던 것일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존재인 아이를 살 가치가 없는 아이라고 믿게 만든 그 사건들이 여전히 아프고 서럽다.
/ 꽃을 던지고 싶다, 너울



17. 그 무렵 나는 티거의 행복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언젠가 녀석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었다. 그래도 티거는 더 행복하게 살다 간 것이리라. 모험의 즐거움을 아예 알지 못하기에 불행하지도 않을 첫째 고양이에 비해 티거는, 집 안에만 가둬놓는다면, 너무나 불행해질 터였다.
/ 힘 빼기의 기술, 김하나



18. 
ㅡ불안하지 않나요?
ㅡ예술가에게 불안은 신발 같은 거니까요. 어딜 가든 걸으려면 신발이 필요하죠.
/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19.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좀.
거기까지 입력했다가 지웠다.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정이현



20. 그런 세상의 모서리가 만져지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지구는 둥글어서 자꾸 걸어 나가도 세상의 끝에서 수직 낙하하는 일은 없다는데, 내가 사는 동네는 둥글지 않았다. 나는 세상의 끝에서 굴러떨어졌다. 모두 나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다시는 거기 발붙일 수 없다고 절벽에서 등 떠밀었다. 나는 애먼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거짓말쟁이에 폭력을 쓴 돼먹지 못한 여자가 되었다. 
/ A코에게 보낸 유서, 박민정 



21. 과습 아니면 건조로 식물이 죽어버릴 수 있다는 설명을 보면 모든 죽음의 원인이 과잉 아니면 결핍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어느 단계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 당신의 나라에서, 박민정 



22. 사람들은 왜 은과 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광물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걸까? 일설에 의하면 물의 반짝임이 옛 인간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빛나는 물은 깨끗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ㅡ생명을 주는ㅡ물만이 투명하다. 사막을, 숲을, 더러운 늪지대를 무리 지어 헤매다가 멀리서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건 찌르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생명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 반짝임, 한강







  • tory_1 2017.12.31 18:32
    이런 글 너무 좋다ㅠ 정독할게ㅠ
  • tory_2 2017.12.31 18:32
    읽으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크래랩할게 고마워!
  • tory_3 2017.12.31 20:17
    좋다ㅠ
  • tory_4 2017.12.31 20:23
    좋은 글 고마워ㅠㅠㅠ
  • tory_5 2017.12.31 21:08
    고마워ㅜ 찡하네
  • tory_6 2018.01.01 00:55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18/02/16 03:01:59)
  • tory_7 2018.01.01 01:00
    좋은 문장들 덕분에 책이 좋아.
    해가지는 곳으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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