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80104144147512?d=y
기사 일부분 발췌. 전문 보는걸 추천.
'1987' 장준환 감독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여성을 지우지 않았다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1960년. 3.15부정 선거 직전 동아일보에 발표한
유치환의 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중에서.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중략)
◆ 여성 캐릭터를 둘러싼 오해
영화에서 가장 도드라진 인물은 연희(김태리)이다. 모두 실존인물인데 반해 연희만 창작된 인물이고, 이름을 가진 유일한 여성 캐릭터이다. 굳이 허구의 인물인 여성캐릭터를 넣은 이유를 묻자, 감독은 ‘연희도 허구의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연희가 있었다. 연희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이자 대학생이자 여성이라는 역할을 짊어진 인물’이라는 답변을 하였다. 이후 몇 번의 인터뷰에서 연희와 관련된 질문에 답하면서, 감독의 답변이 와전되었다.
감독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루면서 영화 속 대다수 인물들이 남성 실존인물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여성인물을 넣기 위해 김정남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것은 고증 때문에 불가하였고, 연희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고증 때문에 불가’라는 말만 따로 떠다니면서, 마치 ‘역사에 기록된 여성이 적었기 때문에, 영화에도 당연히 여성을 담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오해가 퍼졌다.
이 대목이 민감한 것은 나름 연원을 지닌다. 역사의 고비마다 함께 투쟁해 놓고, 상황이 끝나면 여성을 들러리로 취급했던 일이 지겹도록 많았기 때문에, 감독이 고증 운운하며 투쟁의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를 지운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는 것이다. 또한 당시 적극적으로 투쟁을 이끌었던 여성 실존인물들, 가령 은수미(국민운동본부 제헌의회), 심상정(85년 구로동맹파업주동자로 수배 중), 김진숙(해고노동자, 박종철 사망 직전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 이후 87년 노동자대투쟁 주도) 등도 있었고, 항쟁을 이끌던 조직 민청련에는 여성부가 있었을 만큼 여성의 참여와 문제의식이 높았다. 영화에 이들이 등장했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에서 이한열의 노제까지 사건에 집중해야했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직접 관련된 실존인물들(검경, 의사, 기자 등)은 예외 없이 남성이었다.
사실 영화는 87항쟁에서 여성의 존재를 생략하지 않았다. 박종철의 부검을 밀어붙이는 검사는 ‘부천 성고문 사건’을 언급하며, 이번에는 경찰 마음대로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박종철의 물고문 사건 이전에 권인숙의 성고문 사건이 있었고, 그런 희생들이 쌓여 부검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짚는 것이다. 박종철 유족의 동선에는 민가협 어머니들의 모습이 잡힌다. 연희가 처음으로 경험한 종로의 기습 시위를 주도한 것은 여학생들이었다. 동아리에서 광주항쟁 비디오를 틀며 설명하는 선배도 여자이다. 그리고 연세대 정문 시위와 마지막 미도파 시위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포착된다. 영화는 보지 않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여성을 지우지 않았다.
연희가 강한 캐릭터가 아니어서 실망이라는 반응도 있다. 하기야 <모래시계>의 혜린(고현정)이나 <응답하라 1988>의 보라에 비해, 연희의 캐릭터가 강렬하진 않다. 하지만 그리 밋밋한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당시 선뜻 운동에 발 담그지 못하고 고민하는 젊은이의 대표단수로, 다른 인물들이 이미 완성된 캐릭터인 반면 유일하게 성장하는 캐릭터이다. 이는 그의 부족함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창구이자, 관객의 감정을 끌고 당대의 정서 안으로 들어가는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연희는 백지상태에서 ‘잘생긴 오빠’나 ‘끌려간 삼촌’에 의해 수동적으로 의식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만화동아리에서 왜 이런 비디오를 보여주느냐”고 따진다. 그리고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냐. 그러다 잘못되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라서 운동에 회의적인 것이 아니다. 연희의 아버지는 파업 노동자였다가 동지들의 배신으로 화병을 얻어 술을 마시다가 죽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연희는 운동하는 주체가 떠안아야 할 고통과 책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천천히 자신을 벼르는 중이다. 그는 기관에 끌려갔다 논길에 버려지는 공포를 체험한 뒤, 혼자 고민하고 결단하여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선창과 함께 버스 위에 오른다.
이후 그가 보게 될 것은 무엇일까. 기만적인 6.29 선언, 789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야당 분열과 노태우 당선, 삼당 합당과 1991년 분신정국, 그리고 변절에 이르기까지. 실망과 내상을 입고 다시 마음이 닫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환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자기 몫을 다한 뒤, 재빨리 다음 인물에게 바통을 넘기듯이, 하나의 사건도 제 몫의 진전을 이루고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1987년의 미완의 혁명을 아쉬워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역사 속에서 그것은 진정으로 가슴 벅찼던 한 조각의 혁명이었고, 또 다른 혁명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와 더불어 한 발, 한 발 느리게 나아갈 것이니까. 열사의 이름이 외쳐지는 광장에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주요 인물이 다 남자인 건 고증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대학에서 비디오 틀어주던 선배도 여자였고 시위대로 오해받아 쫓기던 연희 도와준 시민도 여자였는데... 어떤 부분에서 여자를 지웠다고 느낀 건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