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뜨겁게 살다 젊어서 죽어/ 깊은 시간에 합류한 벗이여/ 살아남은 나를 너무 노여워 마라/ 살아 있는 나를 너무 부러워 마라/ 나는 부끄럽게 아직도 살아남아/ 깊은 곳을 향해 발버둥치고 있으니/ 자꾸만 가볍게 떠오르는 들뜬 시대에/ 부끄럽게 살아남은 나는/ 살아서는 너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나는/ 좋았던 벗이여/ 그래도 몸부림치는 내가 가여워/ 너는 깊은 시간의 중력으로/ 내 발버둥에 묵직한 돌멩이로/ 나를 끌어 당겨주고 있구나.” (박노해의 시 <깊은 시간>에서). ‘땡전 뉴스’와 보도지침. 야만과 폭압의 정권이 앗아간 젊은 생명들. 6월 민주항쟁과 ‘87년 체제’ 탄생. 금지곡 500곡과 금서 431종 해금. 그럼에도 좌절과 희망, 전진과 퇴행을 반복한 세월. 그러나 반동의 정점에서 타오른 분노와 열망의 촛불. 장준환 감독이 연출한 <1987>은 30년 전 광장의 복판에 투신하듯 뛰어들어 넋을 흔든다. 뜨겁고 아픈 129분. 한국 영화 2017년의 베스트.
실화에 근거한 줄거리가 아니라 실제 사건 그대로다. 새내기 여대생 연희(김태리)를 제하곤 모두 실존했던 사람들로 더러는 실명을 밝히기도 한다. 사람 잡는 '백골단'을 포함한 엑스트라까지 모든 인물과 사건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1987년 1월 14일,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문을 받던 대학생 박종철이 사망한다. 증거 인멸을 꾀하는 대공수사처장 박처원(김윤석)은 시신을 화장하라고 지시하지만,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는 부검을 고집하며 끈질기게 버틴다. 언론들이 앞 다퉈 사망 기사를 올리자 박처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심장 전문의도 까무러칠 해명을 한다. 꾀를 내도 죽을 꾀를 낸다더니 ‘탁 치니 억’은 한동안 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퍼졌다. 하나하나 사건을 조각처럼 맞춰가며 큰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이 흥미를 더한다. 스포츠에 비유하면 바통을 주고받는 릴레이 경주이고, 음악으로 치자면 독립된 여러 선율이 흘러가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하는 폴리포니 기법에 가깝다.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국가 기관이 인권을 짓밟고 말살하는 내용의 영화는 <1987>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양심과 용기, 신념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게 묻는 한국 영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특정 인물을 내세우거나 캐릭터를 강조하기보다는 광고 문안대로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목숨이 위태로워도 불의와 악행엔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 뱃심 좋은 검사를 필두로 물고문한 사실을 털어놓는 의사, 위협과 회유에도 꿋꿋한 부검의, 받아쓰기를 온 몸으로 거부하는 열혈 기자, 음험한 정보를 외부로 빼돌리는 교도관 등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낸다. 간첩을 색출하기보다 빨갱이 제조에 골몰하는 시절. 누군가는 분노와 탄식으로 돌아보는 시간일 터이고, 또 누군가는 중세 암흑기의 광기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거대악과 보통 사람들의 대결이 점점 팽팽해지더니 스릴러 영화에 버금가는 긴박감을 끌어낸다. 핸드헬드 촬영과 클로즈업, 줌인 줌아웃을 구사하며 카메라는 추악한 권력의 실상을 멀미나도록 맹렬하게 파헤친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대공분실 5층은 이른바 ‘공사’를 하던 장소였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난도질하는 공사.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는 그곳에서 장의사로 통하는 고문기술자에게 갈가리 찢겨진 김근태 의원의 22일을 몸서리치도록 묘사했다. 검은 벽돌로 둘러싸인 건물 내부는 고문하기엔 최적의 세팅이었다. 방향 감각을 마비시키는 나선형 철제 계단, 자해나 탈출을 막으려는 팔목 하나 길이의 창문, 철망으로 감은 형광등, 비명 소리만 울리게끔 고안된 벽면, 밖에서 조작하는 조명 스위치와 감시용 렌즈, 맞은편에서도 볼 수 없도록 엇갈리게 배치한 출입문, 칸막이가 없는 화장실. 극한의 공포와 극도의 수치심을 안겨주려고 치밀하게 설계한 악의 공간, 아니 인간 도살장이다. 영화 후반 도살장에 들어선 카메라는, 물속에 거듭 처박혀 죽어가는 박종철의 고통을 긴 호흡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기술자들의 웃음소리에 섞이는 애국가가 장송곡처럼 늘어진다. 짐승의 시간에 내지르는 인간의 비명.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더럽고 악랄한 폭력이 바로 고문이다.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악덕 기업주가 화성인일지 모른다는 발칙한 상상력을 과시한 장준환은 세 번째 연출에서 역사의 무게에 눌리지 않는 뚝심과 통찰에 디테일을 곁들인다. 교회 난간에 매달린 재야인사의 그림자에 겹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예수상, 희생과 저항과 승리를 암시하는 교차 편집, 쏟아지는 양초, 구겨진 운동화 한 짝 등 상황과 소품으로 의미를 캐는 솜씨가 빼어나다. 티켓 파워에 기댄 전략인가. 포스터에도 빠졌고 시나리오에도 잘 생긴 남학생으로만 표시할 정도로 철저하게 감춰진 배우가 나온다. 순정 만화나 청춘 멜로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두 사람의 풋풋한 관계는 반갑고도 당혹스럽다. 뚝배기에 담긴 콜라를 숟가락으로 떠먹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항쟁을 이끈 아름다운 기폭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다. 말투와 억양, 표정과 몸짓 등 김윤석의 연기는 소름끼칠 지경이어서 악당이 강해야 영화가 산다는 히치콕 감독의 말을 새삼 확인케 한다. ‘반공’과 ‘애국’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박처장은 사냥개를 자처하는데, 감독은 그의 어릴 적 트라우마를 슬쩍 건드리며 이분법의 덫을 영리하게 피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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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영화평론가_박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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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평식옹보고 한줄평만 잘 쓴댔냐 씩씩..
우리 평식옹 한줄평은 위트있고
칼럼은 존잘러시다 ㅠㅠㅠㅠㅠ1987완전 극찬하셨네 ㅋㅋㅋ
평식옹 정치스탠스 자체가 굉장히 진보적이신 분이라 이런 역사적 현장을 고발하는 영화들에 대해 호의적이시기도 하고 ㅋㅋ장준환감독의 영화와 별점이 잘 맞던 분이라 합쳐져서 극찬이 나오고 칼럼까지 쓰신듭..
  • tory_1 2017.12.27 18:44
    평식옹 칼럼 존잘;; 글 너무 잘썼다 진짜 술술읽힘ㅋㅋㅋ 오늘 1987 보고와서 칼럼보니까 더 정리되는것같고 그러네
  • tory_2 2017.12.27 18:52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18/11/28 07:24:03)
  • tory_3 2017.12.27 19:04
    평식옹 이러는 거 이해될 정도로 영화 잘 만들었더라. 별로라는 후기 노잼이라는 후기 평점 거품이라는 후기 아래 논란 이유로 아예 보이콧 하겠다는 선언 등 천차만별 반응이 호만 있는 건 아니던데 영화 잘 만들었다는 데 나토리는 몰빵임. 이 영화가 어떻게 별로일 수 있는지 내 기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좋았음. 강추야.
  • tory_4 2017.12.27 21:02
    그렇게 재밌나??? 갑자기 엄청 기대되네
  • tory_5 2017.12.27 21:04
    시사회로 보고 왔는데 감독 연출이 진짜 소름돋을 정도임
  • tory_6 2017.12.27 21:16
    아아아 빨리 보고싶어
  • tory_7 2017.12.27 21:30
    와.. 영화평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영화 보고 싶어졌어
  • tory_8 2017.12.27 23:46
    내 인생영화로 꼽을만해 1987
  • tory_9 2017.12.27 23:51
    연출 잘했어
  • tory_10 2017.12.28 01:19
    술술 읽힌다. 평식옹 진짜 글 잘쓰셔.
  • tory_11 2017.12.28 01:47
    진짜 영화 좋았고 박평식옹 영화평도 진짜 좋다
  • tory_12 2017.12.28 03:19
    맞아 연출 좋아
    무거운 실화 소재라서 좀 처지거나 지루해질 수 있는데 그런게 전혀 없음.
    중간중간 인상깊은 장면도 많고.
    그리고 배우들 연기 진짜 다 좋다. 김윤석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가능했던 듯.
    마지막 장면도 진짜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 했어. 심장이 뜨거워지는 영화임.
  • tory_13 2017.12.28 22:20
    읽고 싶어도 꾹 참았다가 영화 보고 나와서 읽었는데
    존잘 평론이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싶음...
  • tory_14 2017.12.29 02:25
    내가 느낀거랑 거의 비슷하네.. 개인의 양심과 특출의 그분과 김태리관계의 느낌이 특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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