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신미가 산스크리트어(범어), 몽골 파스파 문자 등을 참고해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했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러나 누리꾼의 지적대로 신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문헌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며 세종이 홀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세종 친제설’이 학계의 정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인 1446년에서야 신미라는 이름을 알게 된다. 학계의 소수 의견과 불교계의 주장에 기댄 영화는 분명 역사적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사극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은 이전에도 있었다. 영화 <군함도>(2017)는 1945년 일본 하시마 섬에서 강제 노역을 당한 조선인들이 일본인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조선인들끼리 대립하는 장면 등으로 일제 탄압을 희석시켰다는 비판 여론에 직면했다. 영화 <덕혜옹주>(2016)는 식민지 치하 황족으로서 고초를 겪었던 덕혜옹주를 역사적 사실과 달리 독립투사로 그렸다며 비판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영화 <관상>(2013)은 세조의 왕위 등극 과정에 일개 관상가가 관여했다는 상상력을 펼쳤다. 영화 <말모이>(2019)는 어떤가. 주시경이 주도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에 글도 못 읽는 ‘까막눈’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다뤘다. 모두 기록에는 없는 내용을 다뤘지만 이를 두고 ‘역사 왜곡’이나 ‘허위사실’이라는 비판은 없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도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상상력을 허락받지 못한 사극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가 다룬 역사적 사실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조치에서도 알 수 있듯, 과거사는 여전히 한·일 관계와 양국 국민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군함도>와 <덕혜옹주>에 쏟아진 비판의 배경에는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빚는 현실의 한·일 관계가 있다. <나랏말싸미>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내용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대중이 적지 않은 것은, 세종과 그의 위대한 업적인 한글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체감하는 국민정서가 현실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 역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없는 것을 상상하고 창조하는 예술의 힘이다. 영화, 소설과 같은 허구의 이야기에는 교과서가 미처 비추지 못한 가치와 아름다움,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이 담겨있다. <나랏말싸미>는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세종의 조력자를 상상해봄으로써, 저 하늘의 별처럼 위대하게만 느껴졌던 한글과 세종을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계로 불러들인다. 자모 28자를 하나하나 고안해가는 ‘인간 세종’과 조력자들의 모습에서 이 멋진 발명품에 깃든 땀과 눈물, 재능의 아름다움을 새로이 조명한다.
<나랏말싸미> 조철현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오랜 역사 공부 끝에, 아무리 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철저하게 연구한 역사라 하더라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통찰을 배웠다”고 말했다. 역사를 섣불리 왜곡해선 안 된다. 그러나 역사를 사실로만 바라보지 않는 통찰이 주는 가치를 잊어서도 안 된다. 역사는 역사로, 영화는 영화로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이 한층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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