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젖어 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내가 나비라는 생각, 허 연
러시아의 부동항을 꿈꾼 게 잘못이었다
고물 트럭은 밤새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불행한 정신만 백열등처럼 뜨거웠다
-새벽, 허 연
죽이고 싶었고
사랑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 성경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죽이 끓든 밥이 끓든
나는 변하지 못했고
또 목요일.
-목요일, 허 연
세계에 검열 당하고
나에게 외면당해
잉태되지 못한 감정들 모여
내밀히 일으키는
데모
누군가는 그것을 우울이라 불렀다
이따금 정당하기도 했다
-군집, 이 훤
휴일인데 굳이 시를 쓰셔야 하나요?
뾰족한 질문에
입술이 찢긴다
은퇴하시면 숨 안 쉬실 겁니까?
되물으려다 조각난 낱말들 꽉 문다
뭉툭해지려는 나 때문에
자꾸 허는 입술
-자꾸 허는 입술, 이 훤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종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날, 이 훤
열등이 나를 자주 산책시켰다
목줄 하나 없이 나는 질질 끌려다녔다
-타의, 이 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아름다움, 임 솔아
지워지는 얼룩은
지워졌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가장 자주 입어 가장 쉽게 얼룩이 졌다
-기본, 임 솔아
나는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차벽 너머의 그를 만난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다. 이곳은 마주 보는 것을 대치 중이라 한다.
이 차벽 너머에서 그가 등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등을 돌려야만 같은 티브이를 볼 수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티브이, 임 솔아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꾀병, 박 준
모래가시가 박힌 속옷을 입은
나의 소원은 하나
불구덩이가 있는 지옥으로 가고 싶다
당신을 오게 하려면
나는 아직도 더 절망해야 한다
-얼음 신부, 김 개미
저기, 덤프트럭이 오는군요
순식간에 제가 납작해지겠군요
아니 잠깐 없어지겠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늘 있는 일입니다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면 그뿐
나는 피 흘릴 줄 모릅니다
아파할 줄 모릅니다
-해맑은 웅덩이, 김 개미
『불온한 검은 피』, 허연
『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이 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임 솔아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 준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김 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