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나는 집에서도 가끔 나를 잃어버립니다.


단 하나의 실핏줄로 터진 얼굴들을 생각하며 창백한 창문을 봅니다. 실내에서 유일하게 한 일은 웅크림이라는 도형을 발명한 것 뿐입니다.




- 詩 독거청년 중에서, 서윤후







체온이 가물자 말문이 트이게 되었다. 고요를 흥청망청 쏟으며 마음을 읽으려고 했었던 날도 있었다. 가끔은 우울하냐는 질문이 새삼스럽고, 슬픔은 남몰래 귀신같이 내 몸을 빌려 청승을 떨었다.


- 詩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 서윤후








좋은 일에 쓸 예정이다 오늘치의 어둠을 모아서 어두웠던 것을 빛나 보이게 할 생각이다
단 한 번의 불을 켜기 위해 새가 날아오른다



여름에 본 소년이 가을에도 소년이었을 때
겨울이 되면 안아줄 것이다



- 詩 희미해진 심장으로 중에서, 서윤후



세상에서 가장 빨리 끝나는 폭죽을 샀다.


- 詩 스무살 중에서, 서윤후







 
 
 가는 팔목은 흰 이마와 잘 맞아 떨어졌다. 엎드려 있는 나를 울고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 사실 몸을 숙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평면을 벗어나는 몸의 마지막 표정. 그래프는 날뛰고, 달력은 단호하며 날씨는 마음과 나란해지기 쉬운 기울기였다. 가내수공업이 끝날 줄 모르던 밤, 졸면서 만든 규격이 나를 엉성하게 만들었다. 근사한 걸작이 곧 태어날 거라고 장담하면서, 나는 맨 처음으로 수치심을 길렀다. 잠든 나를 깨워 계집애 같은 사내아이를 어쩐지 실수라고 여기면 나는 나의 목격자가 되었다. 증언이 필요한 꿀겸과 이름에 써 버린 행운과 주입된 슬픔으로 살아 갈 온 마음은 시험판이었다. 치명적인 오류지만 결코 멈춰 버리진 않는 그 방 안에 나는 설계된 적 없는 자세로 처음 나를 감지한다. 엎드려 있으나 잠이 비껴가고 슬픔으로 젖지 않는 주소로 나는 배달되었다. 나는 멸종 위기가 아니다.


- 詩 소년성, 서윤후






뜸해져요 우리

갈 길이 먼 사람들처럼 서로를 등한시해요


우리 잠시만 위로를 멈춰요 당신이 물을 길어 오기 전에 나는 땅굴을 파놓겠어요

검은 머리의 짐승이 울면 누군가는 목을 축인 것이고

숨어 있어요 잠시만 나타나지 말아요


석고상의 흰 눈알을 만지는 기분으로

마치 비밀의 부연처럼 살고 있진 않았는지

우리 부축은 그만하기로 해요

넘어지는 쪽에서 일어나는 법을 배우진 말아요

누가 나타날 것 같다는 기대를 저버려요

- 詩 공범 중에서, 서윤후





모가나고 성가신 너를 다루느라

나는 동그라미가 되었다


.....중략....



나는 그런 너를 지탱하느라

희망에 밑줄을 그을 수 있었다

그것을 나는 읽어주고 너는 내뱉고만 있어서


때때로 서 있을 수 없는 우리가

그림자로 나란해지는 저녁

어둠을 찢으려는 꼭짓점으로부터

너와 나의 전개도가 눈금도 없이

촘촘해진다


지긋지긋 지그재그




- 詩 원뿔의 행진 중에서, 서윤후





가만히 나를 세공하는 소문들이

마음을 뾰족하게 만듭니다.

혀로 덧니를 만지며 바깥으로 나서려는

용감한 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체인 주제에 흐르려다가 깨지고

부딪친 흔적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진료가 많아질수록 달력은 빈 칸입니다


나를 보장할만한 것이 없군요

나에게 없는 재료를 덧씌우는 의사들 때문에

쓸모없이 단단해진 구석에서


물어뜯을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 詩 아말감 중에서, 서윤후





우리 이제 그만 걸을까

좀 쉬자는 말을 이렇게 해도 될까


벼랑 끝에 카페가 있었다

피곤한 사람들의 입술자국이 묻어있는 잔을 헹궈

오늘의 커피가 등장하고


탁자 앞에 우리가 잔과 잔처럼 놓여있다

말 없는 네게서 많은 말소리가 들린다

네가 그만하는 것을 그만두기를 기다리는 분주함에서

나는 가만히 뒤척인다


.....중략.....



벼랑 끝에 있던 카페를 나서면

우리는 안전하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게 잔잔한 분위기라고 헷갈려하며


나 먼저 계속 걸어가도 될까

이런 말로 두고 온 사람들이 북적이는 카페를 나와

나는 모서리를 숨기고 구석으로 간다

벼랑의 반대말을 생각하며




- 詩 잔잔 중에서, 서윤후






나는 창문의 취미가 된다
예측되지 않는 그런 구름에 둘러싸여서
흐린 마음을 닦는다

어린아이의 발꿈치
다정하게 손잡은 노부부
이런 장면들에 눈을 질끈 감게 된다

턱을 괴고 사는 동안
미워하는 사람의 목록은 늘어 간다
나의 모국어가 타인의 사전에 없을 때
갈증은 불쑥 찾아온다


- 詩 포기 중에서, 서윤후




 너는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 창문을 열면 춥다 말하고 방문을 닫 아주면 어둡다고 속삭이는, 그런 변덕으로부터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네 것은 없고 온통 네 이름만 붙여놓은 것들로 저지른 세계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세퍼드처럼, 킁킁거리게 되는 코를 박고 싶은심정을 모아 영에서 영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 덮을 것 없는 날에 뾰족해지는 너에게 걸려 풀려가는 스웨터를 애써 입고 싶었던 사람. 버릴 것 없이 갖고 싶은 것만 많아 의자에서 화분으로 생각을 옮겨심는 사람. 태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던 힘을 결국 살고 있는 일에 보태는 어리석음과 같이, 함부로 놓인 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착시로 곧 망가지기를 바라는 사람. 다시라는 말로 자꾸 세공되고 제일 많이 가졌던 아름다움을 깎게 되는 사람. 이번 삶에서 흥정한 것이 있다면 머뭇거림에서 침묵으로 떠나는 지름길을 새겨들은 것. 각인된 이름을 지우려고 이름 없는 것을 파내던 조각칼이 취미인 두 손

을, 있어야 할 곳에 놓아두려고 자꾸 닮은 사람을 찾던 사람. 한 다발의 손가락들로 고백하면 가짜도 진짜처럼 보인다는 것을 아는 희귀한 눈썰미로, 자꾸 나에게서 없는 나를 타인의 편지 속에서 찾는 사람. 오늘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이름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 그렇게 진짜가 되어가는 반짝임은 아직 들킨 적 없이 빛나려고 뒤척이는데, 어둠을 깨는 장면에 놓여 있는 당신이라는 사람.


- 詩 큐빅, 서윤후









-


혼자 뜬금없이 서점에 갔다가.

서윤후 라는 시인의 문장에 반해서 그 사람의 시를 읽는데, 꼭 내 마음에 밑줄을 그어주는 것 같더라구

그래서 토리들과도 함께 나눠




진짜가 되어가는 반짝임은 아직 들킨 적 없이 빛나려고 뒤척이는데, 어둠을 깨는 장면에 놓여 있는 토리들아.
 

  • tory_1 2018.02.08 15:31
    좋은 시인 알고 간다...ㅠㅠ 문장 하나하나가 이렇게 와닿는 건 오랜만이야.
  • tory_2 2018.02.08 16:18
    너무 좋다.. 하면서 내려왔는데 찐톨의 문장에서 울컥했다....
  • tory_3 2018.02.08 17:14
    정말좋다.. 고마워 토리
  • tory_4 2018.02.08 18:23
    와 진짜.. 좋다. 시집 오랜만에 하나 사게되겠어..
  • tory_5 2018.02.08 20:26
    마음에 밑줄을 그어준다는 토리 표현도 넘 좋다...
  • tory_6 2018.02.08 20:50
    덕분에 좋은 시 알고 가 고마워 토리
  • tory_7 2018.02.08 22:23
    문체에서 백석 시인이 보이는 것 같아 ㅎㅎ 좋다
  • tory_8 2018.02.09 12:23
    어머 같은 시인의 시인줄 모르고 토리가 내 맘에 꼭 걸맞는 시들을 어쩜 일케 모았을까 했는데 덕분에 좋은 시인 좋은 시들 알구가 토리야ㅜ넘넘 고마워
  • tory_8 2018.02.09 12:34
    혹시 시집이름른 어느 누구의 동생이야? 큐빅이랑 잔잔이 너무 좋은데 목차엔 없네,,, ㅠㅠ
  • W 2018.02.09 14:59
    출처는 < 리토피아 2016 겨울호 서윤후 '큐빅' > ​이고 잔잔은 민음사 낭독회 같은데서 신작 발표한걸루 알고 있어! 토리들이 좋아하니까 좋다!
  • tory_9 2018.02.09 13:30
    서윤후 시인 시를 노키드 만화가가 그린 구체적 소년이란 책 추천해. 난 시집 말고 그 책으로 제목에 있는 시를 접했는데 한 사람의 주관이 개입된 이미지로 접한 시를 다시 글로 읽는 경험이 재밌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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