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제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그래서

 



세상에 철저히 혼자인 나는

이런 시를 읽으면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싶어 위로가 되더라구 

  • tory_1 2018.05.24 19:15
    이연주, 익명의 사랑
  • W 2018.05.24 19:26


    정말 꽃이 되고 싶어, 또는 구름
    아홉 배는 내가 더 당신을 사랑할걸---그런 꽃,
    새털 옷을 입고
    당신 고향 가는 길 앞질러 따라가는
    그런 구름.

    석간신문이 배달됐지만 의미가 없네.
    죽은 고양이도 쥐떼들의 혼령도
    이제 더는 문간 근처를 얼쩡거릴 수가 없어.
    꽃의 사랑, 혹은 구름.

    정부 쪽에선 비밀에 부치겠지?
    군중심리란 게
    사랑에 오염된다면 전략은 힘들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공기는 느끼지.
    바람은 느끼고말고.

    내가 당신, 하며
    꽃가루를 공중에 뿌려주면 공기들은 명랑해질 거네.
    새털 옷은 하늘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
    사랑인데.


  • tory_2 2018.05.24 19:18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1/12 00:14:57)
  • W 2018.05.24 19:29

    재벌 3세가 뛰어내렸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출근한 아침
    그날 하루 부산에서만 십대 세 명이 뛰어내렸다는 인터넷 오후 뉴스를 보다가
    이런, 한강에 뛰어내렸다는 제자의 부음 전화를 받고
    저녁 강변북로를 타고 순천향병원에 문상간다

    동작대교 난간에 안경과 휴대폰을 놓고 뛰어내린 지
    나흘이 지나서야 양화대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며
    세 달 전 뛰어내린 애인 곁으로 간다는 유서를 남겼다며
    내 손을 놓지 못한 채 잘못 키웠다며 면목없다며
    그을린 채 상경한 고흥 어미의 흥건했던 손아귀

    학비 벌랴 군대 마치랴 십 년 동안 대학을 서성였던
    동아리방에서 맨발로 먹고 자는 날이 다반사였던
    졸업 전날 찹쌀콩떡을 사들고 책거리 인사를 왔던
    임시취업비자로 일본 호주 등지를 떠돌다 귀국해
    뭐든 해보겠다며 활짝 웃으며 예비 신고식을 했던

    악 소리도 없이 별똥별처럼 뛰어내린 너는
    그날그날을 투신하며 살았던 거지?
    발끝에 절벽을 매단 채 살았던 너는
    투신할 데가 투신한 애인밖에 없었던 거지?

    붉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던 물먹은 시곗줄과
    어둔 강물 어디쯤에서 발을 잃어버린 신발과
    새벽 난간 위에 마지막 한숨을 남겼던 너는

    뛰어내리는 삶이
    뛰어내리는 사랑만이 유일했던 거지? 
  • tory_4 2018.05.24 22:54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 tory_4 2018.05.24 22:58
    이 시 읽으면 타블로의 집이라는 노래가 같이 생각나. 그 노래도 우울하고 가사가 좋거든..!! 시는 아니지만 같이 추천해봐
  • tory_5 2018.05.24 23:15

    눈사람 자살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 속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 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안개속의 거짓말/김선재  

     

    나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실패한 봄이 나를 지나간 후였다 

    꽃이 혼자 지던 날 

     

    무게중심은 어디서나 숨길 수 없다

    저기 막 사라진 사람들

    고개를 숙인 사람들 

    앞축이 닳은 신발을 신은 사람들

    치욕 같은 맨발을 내보인 사람들 

     

    울고 있는 동안은

    눈물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미 나를 지나간 내 거짓말 

     

    나는 가볍고

    구름은 금세 몸을 바꿔 흩어져

    한번도 우리는 우리를 관통한 적 없었다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막 안개를 지나온 것이거나 

    안개와 섞여본 적이 없음을 알았을 뿐

    지나가던 눈물을 훔쳐 살 뿐 

     

    그리하여 매번 너무 늦게 울었거나 

    안개에 얼굴을 묻는

    발 없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 tory_5 2018.05.24 23:17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랑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 tory_5 2018.05.24 23:19

    섬1 / 이정하


    언제나 혼자였다.

    그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난

    눈을 뜨기 싫었다.


    이렇게 어디로 휩쓸려가는가.



    사막/오르탕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모과/서안나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런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다.

  • tory_5 2018.05.24 23:24
    <보이저 2호>- 어떤 사랑의 방식 / 박후기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와버렸다
    해는 지지 않고 달은 너무 많아
    모두 당신 얼굴인 양 여기며 살았다

    언제나 밤길었다.
    혼자였고,
    밤하늘에 별들은 가득했지만
    다가가기엔 모두 너무 멀었다
    목성을 지나칠 때
    나는 잡아끄는 중력을 사랑이라 믿으며
    못 이기는 척 끌려가
    당신을 잊은 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까맣게 타버려 재가 된 나를
    당신이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 살아야 해,
    내가 어두운 달의 뒤편을 돌아나올 때
    당신이 말했다 나는 가끔
    태양계 저편에서 전화를 걸었지만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빈집/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tory_5 2018.05.24 23:41
    간격/이정하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이랴.

    그대와 나 사이,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랴.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할 수는 없다.
    그 간격 속에
    빠져죽고 싶다.



    아름다운 날들/오르한 웰리 카늑

    이 아름다운 날들이 나를 망쳤지
    이처럼 아름답던 어느 날에 일을 그만둔
    나는 성실한 관리였네
    이런 날에 처음 담배를 배웠고
    어린 날이면 나는 사랑에 빠졌었지
    집으로 빵과 소금을 가져가는 것도
    이런 날에는 잊고 말았으니
    으레 이런 날이면
    시를 쓰려는 아픈 마음이 생겼네
    나를 망쳤네,
    이토록 아름다운 날들이


    음이월의 밤들 / 이성복

    음이월의 밤들은 저마다
    꽃핀 동백 가지 입에 물었다
    종일 흐리다 환한 밤에는
    진눈깨비 다녀가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운 다음날 아침엔
    사랑이 지나갔다, 발자국도 없이
  • W 2018.05.24 23:42
    다들 고마워ㅠㅠ
  • tory_6 2018.05.25 08:34
    나 왜 아침부터 이 글들 읽고 눈물이 터지니ㅠㅠ 이제 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글들이 가슴을 후벼파네
  • tory_7 2018.05.25 13:45
    고마워
  • tory_8 2018.05.25 16:29

    나는 안개가 되고 싶어하며 

    배수아 


    내가 안개가 되고 싶어하며 

    너를 떠나서 

    흰 새벽,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면 

    너는 그리워하겠니? 


    새벽길 강가의 안개가 되어 

    보이지 않게 너를 찾아갈 테야 

    너는 문득 잠에서 깨어 

    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겠지 


    오래 전에 사라진 여자아이에 대해서 

    어쩌면 네 가족들에게 말할지도 몰라 

    그래도 여전히 너는 은행에 가고 

    밥을 먹고 당구를 치겠지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안개가 되고 싶어하며 

    너를 떠난 다음에도 

    너는 나를 지금처럼 

    가끔은 생각하다 

    가끔은 잊다가 할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tory_9 2018.05.25 17:56

    최승자 - 외로운 여자들은

    외  로  운    여  자  들  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  보  다   더    외  로  운   여  자  들  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  보  다   더   외  로  운  여  자   들  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 한다.

     

    그  보  다    더    외  로  운  여  자  들  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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