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디미토리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노키즈존, 페미니즘 등 여타 문제들을 보다보니 한 수업에서 배웠던 정치학 텍스트들이 생각이 나서 가져와 봐. 나도 사실 이 책들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기에 솔직히 매우매우매우(x20000) 조심스러운데 그냥 톨들에게 더 좋은 텍스트가 있단 걸 알려주는 정도의 의의로 봐주길 바라....☆
일단 이 글에서 주로 다룰 책은 두 권!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2015, 민음사)
조안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 (2014, 아포리아)
책들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돌봄'과 '혐오'의 문제는 단순히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학문에서도 이미 핫하게 다뤄지고 있는 이슈! 으아니 챠, 그렇다면 우리끼리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싸우고 논리를 다듬는 게 아예 일인 사람들에게서 좋은 통찰을 빌려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우리의 논의가 조금 더 좋은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벌써 지루함을 느끼니? 전공수업 같고 하품이 나온다면.. 아니야 그렇지 않아!
혐오와 수치심의 원서 표지를 보며 즐거움을 느껴보도록 하자... ^^ 정치인문학 서적의 패기 무엇? 한국판 매우 점잖아진 것이었고요?
제목도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로 다릅니다. 물론 원서를 읽진 않았고요? 번역서를 읽었습니다. 저의 비루한 영어 실력.
이 책을 쓴 <마사 너스바움>은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잘 알려지진 않은 학자지만 외국에선 쏘 핫핫 나름 핫한 사람에 속해. 어떻게 핫한 줄 아느냐? 그건 인용지수를 보면 되겠지?
“너스바움은 지난해 영어권 인터넷에서 인용, 검색, 링크를 합해서 가장 많이 언급된 사상가 순위에서 노엄 촘스키와 공동으로 22위에 올랐다”
-2015년의 국민일보 기사야. 노엄 촘스키, 그쪽 분야를 잘 몰라도 꼭 들어보는 이름이지? 그만큼 다분야에 걸친 저술활동으로 유명한데 마사 너스바움도 엄청나게 열심히 일하는 학자로 유명해. 정치학, 법학, 인문학 등을 쓰면서 문학과 정신분석, 고대그리스로마철학 등도 광활히 인용하는 엄청난 열정을 보여주셔서 번역하는 분이 빡쳤다ㄱ... 아닙니다.
"ㅎㅎ"
현재는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윤리학과 법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예전에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성차별을 겪고 임용이 거부된 적도 있었음. 여러모로 고단한 인생... 참고로 <혐오와 수치심>에는 '나도 힘들면 다 때려치고 북유럽에 가고 싶기도 하다' 라는 투의 투덜거림이 나오기도 한다. ^ ^....
<혐오와 수치심>의 큰 틀은 인간의 '법', 공적인 의사결정의 토대로, 근거로 어떤 감정이 쓰일 수 있냐는 것이야.
읭 근데 법이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고? 이성과 합리 기반 아님? / 응 아님
사실 심리학적으로도, 고도로 사회적인 판단들은 고도로 감정적인 판단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어.
공포, 두려움을 주로 담당하는 편도체와 같은 부위가 망가지면 과연 인간이 올바른 법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피해자들의 생생한 두려움을 이해해주며 가해자에게 마땅한 처벌을 내릴 수 있을까?
실제로 다마지오 같은 심리학자의 고전 연구에서도 변연계를 중심으로 하는 뇌의 감정적인 판단 회로가 손상된 사람들이 '사회적인' 활동에 완전히 실패하는 모습이 다뤄지지.
너스바움도 심리학을 상당히 법에 많이 접목시키는 학자로서 이 점을 이해하고 쓴 것 같아. 너스바움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해.
한 나라의 법전은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들을 세세히 적어놓은 것이라고 말이야. 어떤 것이 범죄가 되냐 안 되냐, 얼만큼 처벌하느냐에 대한 판단은 결국 공동체의 감정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도 과연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
이건 인류의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문제라 아마 앞으로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도 법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그러면 인민재판 되는 거 아님? 큰일나는 거 아님? / ㅇㅇ 맞음. 그럴 수 있음. 우리가 공동체의 감정이라고 다 ㅇㅈ해줌 큰일 남.
여기서 '채선당 사건' 같은 대중들이 지나치게 들끓어올라 문제시된, '절차적 정의' 문제는 둘째 치자.
물론 그 또한 중요한 내용이지만 그걸 다루려면 따로 책 한권을 써야하고,
우리는 왜 대중들이 어떤 일에 분노하는지, 그리고 어떤 때 그 분노가 합당한지! 즉 다시 말해
저 사람들은 진상이다! 처벌해 마땅해! <---------------> 그건 혐오야! 부당한 수치심 주기야!
이 토론에 집중해볼까 해.
우선 너스바움은 혐오와 분노를 구분하고 있어. 사람들은 둘 사이를 자주 헷갈려 해.
나에게 혐오스러운 일을 했으니 저 사람들에게 나는 화를 내는 것이고 그건 정당하다는 식이야.
어디서 많이 본 사례지? 된장녀, 김치녀 등등의 단어들이 생각이 날 거야.
이 얘긴 너스바움이 한 얘긴 아니지만 :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당하고 이성적이라 생각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기에, 어떤 걸 혐오할 때도 그냥 혐오하는 게 아니라 이유가 있어 혐오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그런데 너스바움이 보기에는 '정당한' 분노와 '올바르지 못한' 혐오는 엄연히 다른 것이야.
분노는 !정말로! 자신이 당한 부당함, 위해, 손상에 대하여 복수하고자 하는 욕구로 세네카와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전 학자들의 서술도 항상 유사하게 이뤄져왔고 법에 대한 올바른 토대로 인정되어 왔어
그에 반해 재밌게도 혐오는 자신이 정말로 당한 일이라기보단 !추정 상의 상해! (J.S.스튜어트 밀) 관념을 보일 때가 많은데
'자신이 어떠한 행위를 접한다면 느꼈을 것이라고 스스로 상상하는 것'을 말해.
그냥 내가 혐오하는 사람들만 봐도 으~ 몸에 닭살이 돋고 기분이 나쁜 거야.
너스바움에 따르면 혐오의 기반은
이 그림 같은 그림에서 잘 드러나. 왜 이 그림은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우울하게 할까?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한계성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피하려고 해. 퇴화하는 것, 죽는 것, 배설하는 것, 더러운 것.
그래서 원제도 Hiding from humanity지.
(이 점에서 흥미로운 게 '된장' '김치' 같은 워딩이야. 냄새 나고, 더러운 것들로 상대를 지칭하지?)
그것들을 기피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 혐오의 감정은 나아가 사회적 내, 외집단의 경계를 긋는 데에도 사용돼.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적 내집단' 을 '정상'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그 정상은 너스바움의 말에 따르면 '대리 자궁'의 역할까지 한다고 신랄하게 표현 돼 ^^;;;;
왜냐면 그 안에 있으면 존나 평화롭기 때문이지! 예아 피쓰!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신이 모든 세상의 주인이었던 자궁 안 태아 (내 세계가 그야말로 나를 위해 만들어져있는 곳) 때를 잊고 나와야 하지. 하지만 그건 너무 꿀 같이 달콤했던 때야. 내가 또 주체가 되고 싶어... 내가 남의 욕구를 맞춰주고 싶지 않고 남들이 내 욕구를 맞춰줌 좋겠어.... 하지만 그건 사회에선 너무 힘든 일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집단이 된다면?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해야 해.
쟤내는 '우리' 기준에 안 맞아.
'우리'의 삶의 질을 위해서...
이 영화는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를 대표하는....
우리는 다시 세상의 주인 자리를 되찾고 남들을 손가락질하고 굽어보고 평가하는 위치로 돌아갈 수 있어. 그래서 '평범함' '정상' 이라는 틀 안은 너무 꿀 같이 달콤해.
내가 한국 스포츠선수 TV 인터뷰를 보다 기겁한 적이 있어. 쇼프로에 나와서 대놓고 "친구들이랑 길거리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은 어떻다 저렇다 이야기 나누면서 놀곤 한다" 라고 해서 말이야. 요새였으면 문제였겠지만 그때는 그냥 다들 넘어갔지. 하도 그런 사람이 많으니까. 근데 그럴 때야말로 인간은 마약 같은 달콤함에 젖는 셈이지. 나는 정상, 정상인으로서 상대를 평가한다, 내가 세상의 기준!
너스바움은 그럼 뭐 백인남성개신교이성애자기혼자자녀있음중산층이상장애없음외모평균이상 어쩌고 이런 것들을 다 이룰 수 있냐며 정상이란 건 임의의 기준일 뿐이라 하지만.. 사실 이런 내적인 기준을 세우고 마는 건 어쩌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욕구라 모두 조금씩은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기준을 세우면서 생기는 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에 대한 '혐오'. 저들은 '외부'의 것이라는 인식이지.
*밑에 놀람 주의. 짤이 급 크네. 나치당 홍보이미지.
유태인을 세계를 잡아먹는 벌레로 묘사하는 거 봐. 요새의 충 蟲 자 돌림 멸칭 등도 참 어찌 봄 혐오 역사계에서는 근본(?) 있는(?) 일이다(?)
이렇듯 정치인들에게 이는 먹음직스러운 이용거리라, 프로파간다로 잘 쓰이기도 해.
'외부에서 들어온 유태인 바이러스'가 '정상적인 아리아인 혈통'을 '더럽힌다'고 묘사했던 나치 당 시대의 홍보들이 적확한 사례지. 정확히 오염물질로 혐오의 대상을 묘사하고 있어.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여성혐오의 경우는 혐오 중의 가장 원초적이고 오래된 혐오인데 남성들에게 있어 의외로 성욕은 항상 기분 좋은 것으로만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따라다니고 괴롭히는 것, 배출해야 하는 더러운 것으로 감각될 때가 많대. 그럴 때 그런 '배출'을 담당해주는 것, 즉 여자, 그 욕망의 대상은 더러운 외부의 것이 되는 거지. 의외로 남자들이 이 서술에 공감하는 걸 많이 봤어... 여자친구를 아끼느라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하고 나면 여자친구를 '더럽힌'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든다고 하는 경우들도 봤고.
책에서 혐오가 재판에 등장한 사례로 다룬 재판 중 하나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로 숲에 지내던 유랑자가
야영지에서 사랑을 나누는 레즈비언 커플을 보고 총을 쏴서 한명을 죽이고 한명을 심각한 중상을 입힌 건인데.
피의자가 자신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혐오와 불쾌함에 휩싸여 그러한 죄를 저질렀을 뿐이니,
죄를 경감해달라고 주장했다고 해.
내가 내 목숨이 위협당하는 두려움에 상대를 죽였다 (정당방위)
내가 너무 걷잡을 수 없는 혐오심에 상대를 죽였다 (정당방위?) <- ???
우리는 혐오를 인정해줘야 할까?
물론.. 이런 명백한 사례라면 우리는 (대개) 아니라고 하겠지!
하지만 때때로 혐오와 분개의 구분은 어려워. 특히,
혐오를 도덕화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많단 이유 때문에.
동성애 때문에 감옥에 갔던 것으로 유명한 문인 오스카 와일드 사건을 담당한 판사도,
그는 스스로가 동성애에 대한 매우 타당하고 도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너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영양가 있는 감정이 되지 못해. 분개는 그에 따르면 상당히 '구성적인' 기능이 있어.
분개는 앞서 썼듯,
"이 사람들이 부당한 기능을 받아 왔다면, 더 이상 그러한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즉 그 자체로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하는 동기를 제공하며 실제로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하는 욕구를 수반해.
바로 청와대로 청원을 넣고 구체적 대안들을 토론하고 그런 거 자체가 분개란 말이야.
반면 혐오는 그저 상대를 없애고 싶어. 어찌 봄 주술적 사고에까지 가깝지.
이놈의 벌레들은 아무리 잡고 잡아도 끝이 없고 그저 혐오스러워.....
물론 혐오란 감정은 인간이 타고나는 감정이고 좋은 역할도 때때로 할 것이라 보여.
무엇보다, 타고났기에 제거할 수 없단 것도 핵심이겠지?
하지만 '공적 설득'의 기반으로는 부족하단 게 너스바움의 지적이야.
왜냐? 혐오는 마치 로맨스 같아. 그 로맨스에 빠져있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엔 공감할 수가 없거든.
매일 여성혐오에 빠져서 혐오 글을 올리고, 온 인터넷에 조작글을 쓰고, 미쳐있는 사람들은 남들이 봄 이해가 가지 않아. 실제로 현실에서 여자의 '여' 자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근데 그 사람은 진실하게 미칠 거 같고 그 여자들이 자기를 어쩔 수 없이 (그 레즈비언 커플을 총으로 쏜 사람처럼) 만든다고 소리를 질러.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사회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야. 우리는 야영지에서 죄 없는 레즈비언 커플을 총으로 쏜 사람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어.
무엇보다 혐오는 시대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잘 향하게 되어있어. 앞서 말한 것 같은 '자궁에서 나온 무력한 상태'...
그 상태를 너스바움은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말해.
다양한 임상연구, 정치분석학적 사례들이 인용되는데 흥미롭지만 책을 읽을 톨들에게 남겨둘게.
원초적 수치심이 심한 환자들은 병적으로 정상에 집착하고, 사회 규범을 따르지 않을 때 받을 수 있는 공격에 신경쓴대.
위니콧 등 유명 임상학자의 환자들 사례가 나오는데...
아무튼간에 인간은 자기가 느끼는 무력감,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느낌을
'약자들'에게 수치심의 낙인을 찍으면서 '자기'는 정상이라 만족하며,
'정상'이란 이름의 새로운 완전무결함으로 자신을 감싸는 경향이 있단 거야.
이런 걸 너스바움은 유아기적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해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들에게
함무라비 식의 눈에는눈 이에는이 같은 강한 '1:1 대응 회복'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정확한 피해를 받은 게 없을 때도 많으니 애매하겠지)
수치심을 주길 바랄 때가 많아... 그냥 비인간화시켜버리는 거지
비인간화 역시, 누군가를 혐오하여 수치심을 주고 싶을 때의 큰 특징이야
하고많은 곳 중에서 하필이면 얼굴에 문신을 하여 수치심을 주는 형벌이 많았던 이유는
그 사람의 인간성, 인격체로서의 개성을 완전히 말살하는 걸 뜻하지
인터넷상에서도 많이 벌어지는 일인데.. 이런 일이 빈발하는 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자존감을 갖고 살기가 힘든 사회야
언제 자기가 약자로 찍혀,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받게 될지 모르니까.
그런데 혹시나 이 글이 무조건 노키즈존이나 성대립 등의 사례에서 '한 편만' 드는 거로 보일까봐 이쯤에서 분명히 말하자면,
정말로 실질적인 피해를 받은 경우 바로 복구를 시켜줘야한다든지 공동체가 지켜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안심을 시켜줘야한다든지 법적인 제도화가 잇따라야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보는 건 정당한 분개라 할 수 있어.
그럼 이쯤에서 너스바움 박사님과 안녕을 고하고
"ㅎㅎ 님 글 드럽게 못 쓰시네영"
"....."
돌봄 민주주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왜 이전 같은 장애, 인종 혐오 등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혐오와 분업 문제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들을 중심으로 불거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여성주의 정치이론으로서 많이 주목 받는 이론이야.
국가가 형성되고 시장자본주의와 국제무역의 끈으로 묶이게 되면서
각 국가들은 스포츠 레이스 같은 싸움을 하게 되었어
각각 투자를 받아야 하고 끝없이 서로 힘싸움을 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해야하기 때문에
어느새부터인가 각 국가의 가치는 GDP.. 시장으로 환원됐지
내 달러화가 세냐? 네 위안화가 세냐?!
그 안에서 국민들의 진정한 행복, 기쁨, 삶의 질 같은 건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어
사실 지금도 더 행복한 나라라고 국제사회에서 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지 이미 시스템 자체가 그런 거야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곧 앓는 소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해
응? 뭐야뭐야?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돌봄' 문제야.
저출산, 고령화, 사회복지, 데이케어, 치매노인, 육아, 병간호, 가사노동 등의 문제들...
일상의 사소하고 잡스러운 것으로 천시되어 무대 밖으로 떠넘겨져있던, 노예들과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여성들의 일.
그게 사실 존나 X같이 힘들었던 거지. 근데 존나 X같이 힘든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가 토론해서 고쳐나가야 할 일 아니냐?! 왜 이건 정치 문제 아니죠?!
그래. 그 돌봄이 이제 정치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거야.
모든 인간은 보다시피 평생동안 돌봄을 주고받아야 해. 아기일 땐 어쩔 수 없이 돌봄이 필요하고, 노인일 때도 마찬가지야.
그렇기에 서로 인간은 돌봄을 나눠야해.
누구라도 한번 제대로 살림을 살아보고, 명절날 사촌동생이라도 세 시간 맡아봄 알아. 돌봄은 졸라 힘들어...ㅠㅠ
최근 이보영 등 배우들도 출산 후 우울증을 호소하고 육아의 고통을 이야기하게 된 게 괜히 그런 게 아닌 거지
그런데 권력자원의 불균등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돌봄'에서 특히 치명적으로 발생해.
돌봄 영역이 특정집단에게 '전가'되는 거지. 그럼 그들은 평등한 상태가 아니고, 정치적 참여도 제대로 할 수 없어.
그냥 내가 애 엄마들만 옹호하는 비뚤어진 페미니스트라고 턱을 괸 채 휠을 내리고 있을 사람이 있을까봐 적을게.
노인과 단둘이 살며 노인의 밥을 모두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소녀소년가장도 마찬가지야.
아이를 혼자 키우는 편부편모들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돌봄'을 하게 되는 순간 삶이 벅차져.
단순히 선택하는 자유만 준다고 민주주의일까?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까지 돌봄은 희한한 윤리로, 돌보는 자들의 미덕만을 강조하며 (어머니는 강하다!!! 강하길 바라시는 거겠죠, 물론)
이런 부담들을 개인에게 전가시켜왔어. 이런 상황에선 투덜거리는 사람이 '미덕이 없는' 사람이야.
해야 할 책임을 담당하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말만 많은 사람이야.
그니까 좀 닥쳐줬음 좋겠어. 조용히 해줬음 좋겠어... 그렇게 혐오하게 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돌봄 역시 자연스럽게 그냥 인간이 본능으로 하는 일이 아니야. 여러 원시부족들이 다양하게 육아와 가사노동을 분담하듯
결국 이건 정치적 문제로 모든 사회의 일이 그렇듯 이해관계와 힘의 문제로 정치의 대상이야.
도덕적 삶은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타협인 거야(124p)
여기서 저자는 돌봄을 더 광의적으로 바라보는데... (여러 학자의 정의가 있지만 일반론적으로는 '가능한 한 세상에서 잘살 수 있도록 우리의 '세상'을 바로잡고 지속시키기고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종의 활동' _피셔와 트론토. 1990)
그럼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돌봄이란 걸 알게 돼. 그간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돌봄 무임승차권'을 주고 있었단 것도 말이야.
그래서 저자는 라스웰이 정치를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는 것"으로 정의한 것을 달리 활용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돌보는지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로 정치를 새로 정의해 책임을 나누는 방법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해. 그간의 잘못된 차별, 사상 등은 잘못된 힘의 패턴, 관계의 패턴이 자리잡혀있던 것으로 볼 수 있어. 보수적인 억압자들은 우리가 언제 억압했다고? 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들의 억압 과거를 깨끗이 잊기도 하지만 말이야...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이 주장하는 건,
이제는 진정한 민주주의, 시민의 평등을 위해서 시장이 아니라 돌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때가 됐단 것.
이제 더 잘 돌보는 사회, 국가가 이상이 되어야한다는 거야. 실제로 많은 서구 선진국들은 이러한 이론들에 영향을 받아가고 있다 생각해.
서로 어찌 봄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두 책엔 사실 놀라운 공통점이 있어.
그건 둘 다 '인간의 취약성'을 전제하고 있단 거야.
근대화 이후 인간은 이성, 오성 능력을 신뢰하며 모든 일은 이성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했어.
모두에게 시민권, 참정권도 주었겠다. 다들 별 문제 없이 각자의 교섭력을 바탕으로 합의하고 능력대로 살며 살면 되지 않냐는 신자유주의가 요동쳤어.
하지만 그 결과는 다들 알 거야.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혐오와 수치심에 흔들리는 존재고 (<혐오와 수치심>)
너무나도 취약해서 서로 돌봄을 주고 받아야하는데 그 돌봄은 힘의 균형에 따라 불균등하게 분배돼 (<돌봄 민주주의>)
그렇기에 "어? 우리 합의한 거 아니었어? 왜 싫음 가만히 있었어?" 라고,
어떤 부당한 일을 한 뒤의 억압자는 말을 하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이성의 활자로 적은 대로 세상이 돌아간 게 아니었기 때문이야.
물론 이는 단순히 성별만의 문제도, 연령만의 문제도, 장애나 인종 등만의 문제도 아니야.
어찌 보면 이 책들은 잔혹할 정도로 유아기적 나르시시즘적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요구해.
나 또한 쉬운 대로 치우쳐져 행동하지 않았는지, 다른 이들을 비정상으로 판단하지 않았는지....
뇌과학이 발전하고 많은 토론이 이뤄지면서 사람들은 이성으로 이성의 불완전성을 깨달았어
계몽으로 계몽의 불완전성을 깨달았듯.
<근대서구의 합리주의는 인간이 자연에서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자연을 복속시킬 수 있다 믿었지만,
그 결과 사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자연에 종속됐을 뿐이다 (계몽의 변증법)>
그래서 우리는 항상 새롭게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눠야하는 상태에 직면해 있어.
이 글은 여기까지야. 구체적으로 다 인용 페이지를 달지 않아서 좀 찝찝하지만 잘 읽히는 글을 위해서...도 있었고 시간내기 어려워서도... 하하... 그리고 직접 인용이 다 아니다보니까 정확한 워딩이 다를 수 있단 걸 유의해줘.
읽어줘서 고맙고 관심있음 책을 살펴보는 걸 추천해!
무언가... 음... 나도 내 지식을 보태고 싶어서 적었지만 모자란 게 너무 많아서 지금 이걸 올려야 하나 싶은데;;
그래도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 논의가 더 진전될 수 있단 걸 믿으며 글을 올려!
참고로 어디 퍼가거나 해도 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