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말에는 뼈가 있다. 날선 시각으로 사회 구석구석을 꿰뚫는 까닭이다. 쉽게 반박할 수 없는 ‘논리왕’이지만 펜을 드는 순간만큼은 그 태도가 조금 달라진다. 작가 유시민은 친절하다. 국가, 현대사, 삶, 정치 등과 같은 어렵고 거대한 영역의 주제를 알기 쉽게 풀어낸다. 그 시선이 이번엔 ‘역사’에 닿았다.
이번 책은 조금 독특하다. 그냥 역사서도 아니고 역사서에 대한 비평도 아닌 ‘역사서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그래서 제목도 <역사의 역사>(돌베개/ 2018년)다. 오랜 시간 수많은 독자들이 읽었던 스테디셀러 역사서부터, 기존의 역사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기록까지 다뤘다. 고대에서 시작해 현재에 이르는 여정이다. <역사의 역사> 속에 다룬 18권의 책을 살피는 과정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되었단다. 이번만큼은 저자인 동시에 우리가 보지 못한 역사서의 면면을 새롭게 알려주는 ‘전달자’이기도 하다.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가들의 숨은 감정을 읽어내기도 하고, 각기 다른 기록과 그 방식에 대한 의미를 고민해보기도 한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전국동시지방선거 개표 방송을 마친 다음날인 6월 14일, 유시민 작가를 파주에 위치한 출판사 돌베개 사옥 카페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진행된 <역사의 역사> 서점 관계자 대상 출간 기념 간담회 기록을 전한다.
집필 계기와 같은 보편적 질의응답으로 시작된 간담회는 색다른 디자인으로 주목받은 표지 이야기, 독자평에 대한 견해 등 자유로운 대담으로 이어졌다. 특히 그는 이번 책이 전작들과 비교해 그 내용이 조금 무거워 독자들의 반응이 내심 우려된다고 말했다. 책을 읽을 독자들을 떠올리며 몇 번이고 “겁이 난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결과물을 기대하는 저자의 설렘은 감출 수 없는 것 같았다. 책을 이야기하던 순간 순간, 유시민 작가의 눈빛에는 지난 밤의 피곤함을 뚫고 나온 생기가 감돌았다.
"<역사의 역사>는 패키지 투어 같은 책…몰라도 따라갈 수 있다"
Q 전작인 <국가란 무엇인가> 이후, 이번엔 역사를 조명하셨는데요. 독특한 것은 ‘역사의 역사’를 소개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책의 집필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디셀러 중 하나가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예요. 그런데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보면 보편적이고 함속적이거든요. 돌베개 출판사 대표님께서 이 책(역사란 무엇인가) 내용이 낯설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많다는 의견을 주시더라고요. 완독하기가 어려운 책이라는 거죠. ‘역사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국 독자들에게 맞는 책을 쓰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주셔서 집필 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제가 역사학자도 아니고 집필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 생각보다는 유명 역사책과 역사가들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을 했는지 찾아봤어요. 그러다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생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을 이해할 때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아는 것처럼요.
그걸 계기로 최초의 역사서라고 인정하는 책부터 최근의 역사서까지 찾아봤습니다. 그 가운데 역사가들이 서술한 역사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 그것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지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또 그들이 무엇을 썼고, 왜 썼고, 왜 그런 식으로 썼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봤고, 그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혔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의 역사>는 역사책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해서 역사책 속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느낀 내용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은 책이에요.
Q 이번 책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싶었던 점이 있다면요?
정보를 많이 전달하겠지만, 역사책을 읽으며 배운 것과 새롭게 알게된 것,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지 알 수 없었던 깨달음, 책이 감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어요. 저자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과정을 따라 나도 그 감정을 느껴보고 독자들과 함께 나눠보려고 했어요.
<역사의 역사>는 마치 ‘패키지 투어’ 같은 책이에요. 가이드 설명을 듣는 책, 뭔가를 준비하지 않고도 따라갈 수 있고, 그게 맞는지 아닌지 몰라도 여행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책. 배낭 메고 여행지를 속속들이 돌아다니고 싶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는 혼자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에요.
소소하고 자잘한 재미를 기준으로 두면 분명 한계가 있는 책일 거예요. 이번 책에서 다룬 역사서는 총 18권인데, 그중 10권 정도를 깊게 다뤘어요. 독자들이 이번 책에 소개된 역사서 중 읽어보고 싶다고 느끼는 책들이 있다면 긴 시간을 두고 도전해보는 것도 권하고 싶어요. <역사의 역사>가 독자에게 유용한 책이기를 바라고 있어요.
Q 전작과 비교해 <역사의 역사>를 쓸 때 개인적 소회는 어떻게 달랐는지요?
솔직히 있어보이게 쓰고 싶었어요. 추상적 개념도 많이 쓰고 현학적인 문장도 쓰고… 나도 그렇게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가수도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만 할 수 없잖아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사이에 고민이 있어요. 쓰고 싶은 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잘 안 되더라고요.
다른 책에 비하면 (이번 책은) 문장이 조금 다를 거예요. 단문을 좋아하지만 긴 문장을 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조금 걱정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이번 책은 ‘사람들이 많이 안 읽지 않아도, 많이 사랑받지 못해도 필요한 사람들만 읽으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쓴 책이라서요. 그래서 지금, 예약 판매 때 목차만 보고 구입한 독자들이 막상 책을 어려워할까봐 겁이 많이 나는 상태예요. 마치 분양 사기인 것 같아서. (웃음)
이번에는 보통 분량의 책 한 권으로 최대한 (내용을 압축)해보자라는 목표를 가졌어요. 최대한 노력했으나 이 압축도도 감당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이에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애쓰지 않으려고 해요. 분명 나중에 올라오는 서평 중에는 ‘어렵다’는 의견이 있겠지만… 제 능력은 여기까지예요.
Q 표지에 대한 반응이 다양한데 만족하시나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표지에 신경쓴 적 없어요. 그런데도 (출판사에서) 자꾸 보여줘요, 괴롭게…(웃음) 디자인은 터치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제가 낸 의견은 타이틀 위치를 조금 내린 것이 전부예요. 너무 끝에 가 있어서. 디자인과는 다르게 제목에 대해서는 고집을 부리는 편이죠. ‘역사의 역사’라는 제목도 원래 가제였는데 그대로 하게 됐어요.
역사는 완성된 상태의 문학…감정을 전달한다"
Q 18권의 역사서의 내용이 굉장히 방대했을텐데, 독자를 위해 새로 정리하면서 전달자로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뭔가요?
역사가가 옛날 사람이기는 하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스마트폰을 쓰고, (문명의) 발전 덕분에 지식을 갖고 있지만 사용하는 도구와 지식의 정도를 제외하면 (그들과 우리가) 너무 똑같은 거예요.
전달자로서 저의 초점은 ‘그들이 이것을(역사서) 왜 썼느냐. 어떤 인간적 욕망이나 감정, 소망에 이끌려 썼을까?’였어요. 살아가며 느끼는 많은 감정들, 그 사람들의 생애와 상황과 그들이 다루었던 사건 안에서 묘사된 대목을 떠올리면서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들을 느꼈어요. 이것이 인간과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고 생각해요. 독자들도 책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덧없는 건지를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됐거든요.
예컨대 우리 모두에게는 영원성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우리 모두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초기 역사가들을 보면 자기 존재를 남기고 싶어했던 모습들이 책에서 보이거든요. 그런데 사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욕망이 아니라 작업의 탁월성 때문에 역사서가 남았죠. 알고 보면 역사가들은 영원성에 대한 자기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역사서를 선택했던 측면이 강해요.
역사서에 나온 다양한 인물들을 보며 인생의 의미를 양면에서 볼 수 있어요. 특히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그런 걸 많이 느낄 수 있거든요. 그 책은 인물의 보물창고, 인간형의 보물창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권력 속에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권력 관계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훌륭한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있어요.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꼭 가치있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고요.
역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갑질할 수가 없어요. 역사를 안 보고 자기만 보기 때문에 (갑질이) 가능했던 거죠. 사마천은 자기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어요.
글을 보면 역사가들의 성격이 느껴지는데 그게 굉장히 재밌는 포인트예요. 역사는 그런 점에서 보면 그냥 학문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완성된 형태의 문학이에요. 완성된 형태의 역사서는 정보 뿐만이 아니라 감정을 전달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역사서라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니까 위대한 역사가가 위대한 예술가일 수밖에 없죠.
Q 이번 책에서 다룬 역사가 중 본인이 가진 역사 의식, 글쓰기 욕망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역사학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너무 대단한 책들이라 저하고는 견줄 수가 없어요. 위대한 역사가들은 모두 현대사를 썼어요. 지금이야 그 책들이 고전이지만 당시에는 현대사였을 거거든요. 우리에게 고대사이지만 헤로도토스나 사마천도 모두 당대사를 기록한 것이죠. 그게 뭘 의미하는 걸까, 왜 현대사 책이 위대할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현대사를 쓰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제대로 된 역사학자라면 통사(痛史)를 써야죠. 다만 지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기록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구는 이 책에서 다룬 역사가들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역사학계에서 현대사, 당대사를 쓰는 작업에 좀 더 많은 역사학자들이 노력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역사서 편찬에 대한 작업이 부족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앞으로 출판분야에서 이론과 철학에 입각해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재구성하는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모르겠으나 극복하는 쪽으로 가고 있으니… ‘한반도 평화체제 시대’를 맞이해 우리 현대사에 북한의 역사, 분단의 역사,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반영하는 현대사를 아우르는 한반도 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교류가 활발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울러서 누군가 재구성해주는 작업을 해주기를 바라죠. 저는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독자로서 바랍니다.
"<역사의 역사> 읽는 독자 ‘역사책 읽는 방법’ 얻게 될 것"
Q 작가 유시민에게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독자들이 <역사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강연을 3년 정도 안 다녔습니다. 강연 다니면 제 책을 다 읽었다는 독자들이 많이 만나는데,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웃음) 조금 무서워요. (책 속의) 중복되는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을텐데...
제 책을 읽는 독자는 매번 다른 것 같아요. 어떤 분은 정치(에 대한 책을 보시고), 어떤 분은 역사(에 대한 책을 보시고). 블로그 글이나 SNS에 ‘유시민 책 중에 어떤 책이 좋냐’고 하면 다들 꼽는 책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계속 책을 써달라는 이야기는 들어요. 어느 분야인지는 몰라요. 재미있으니 책을 계속 써달라고 하시죠. 온오프라인에서 독자들을 많이 만나는 편인데 계속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하죠.
제가 독서계나 출판 비평 분야에서 그리 진지한 필자로 여겨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꼭 그렇지 않은 책도 있거든요. <나의 한국현대사>는 진지하게 쓴 책이고 학술적으로 의의가 있기도 해요. 인문학책으로서는 <청춘의 독서>도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성이 높은 책이라고 생각했으나 다분히 학술적이고 비평적인 내용들이 있어요.
그래도 기쁜 것은 책이 읽기 좋다는 평이 많다는 거예요. 어렵지 않다는 평. 그건 되게 좋아요. 독자들에게 받는 요구나 평가 중에 ‘어려운 주제인데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썼다’는 평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제 미디어셀러 취급을 받기도 하는데, 다른 곳에 연연하지 않고 책을 좋아하는 많은 분들이 ‘책을 보고 더 알고 싶어지더라’라고 느낄 수 있는 책을 계속 쓸 생각이에요. 앞으로도 제가 관심 갖는 다양한 분야에 그런 형태로 계속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Q 이 책이 독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으킬 거라 보시나요?
어차피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은 (이 책) 안 읽어요. 대신, 읽는 사람들은 ‘역사책을 읽는 방법’을 얻을 거예요. 문자 텍스트인데 저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쓴 게 아니고 과거에 대해 쓴 텍스트잖아요. 저자의 감정을 읽어내는 방법. 그걸 읽을 수 있다면 저는 이 책 값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봐요.
감정을 읽으려고 노력하면 텍스트가 살아나요. 역사 속 인물이 재밌어지고요. 그걸 가장 재밌게 들려주는 게 사마천의 <사기>예요. 그 감정을 이해하면 텍스트가 옛날 이야기 같지 않고 바로 지금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런 독법을 이해하면 역사서가 재밌어지죠. 역사서는 저자의 감정을 따라갈 때 재밌게 읽을 수 있어요. 그래서 잘 쓴 역사서는 ‘문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역사서의 문장들이 감정을 탑재한 문장으로 살아와요. 그런 느낌을 전하려고 노력했어요. 문장 속에서 그 사람의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 그 다음 글이 달리 읽혀진다는 것. 그것을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느낀 것처럼, 독자들도 감정의 흔적을 알아차리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기를 바라죠.
Q <역사의 역사>가 어떤 역사서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주길 바랄 뿐이지, 역사서로 남길 바라지는 않아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이 되는 책을 쓴다면 저는 만족해요. 저는 제 분수를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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