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이상 작가의 러브레터




<전문>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것을 경험케 한 것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그 한 번이 내 시골에 있던 때 입니다.

이런 말 하면 웃을지 모르나 그간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금 잘 알 수가 없어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고까지 합니다.


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점점 당신이 멀어지고 있단 것을 어느날 나는 확실히 알았었고......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걸음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웠습니다.

그야말로 모연한 시욋길을 혼자 걸으면서 나는 별 이유도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죽을 뻔 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로 나는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어린애 같은, 

당신 보면 웃을 편지입니다.


"정희야, 나는 네 앞에서 결코 현명한 벗은 못됐었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었다.

내 이제 너와 더불어 즐거웠던 순간을 무덤 속에 가도 잊을 순 없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어리석진 않았다. 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길 거울 같기를 빌지도 모른다.


정희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너를 잊을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고 한다. 

하지만 정희야. 이건 언제라도 좋다.

네가 백발일 때도 좋고 내일이래도 좋다.

만일 네 '마음'이 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 네 별보다도 더 또렷하고 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날 찾거든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든 너는 부디 내게로 와다오-.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적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다구니도 좋다.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정희야 너를 위해 네가 다시 오기 위해 저 야공(夜空)의 별을 바라보듯 잠잠히 살아가련다......"


하는 어리석은 수작이었으나 나는 이것을 당신께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히 있을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도 당신처럼 약아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고향은 역시 어리석었든지 내가 글을 쓰겠다면 무척 좋아하든 당신이 

-우리 글을 쓰고 서로 즐기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럼 속삭이던 기억이 내 마음을 오래도록 언짢게 하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아니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다고 해서 쓰기로 한 셈이니까요-.


당신이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만나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히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

금년 마지막날 오후 다섯시에 후루사토(郷)라는 집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회답주시기 바랍니다. 李箱.



참고 : 스물다섯 李箱, 최정희에게 보낸 러브레터 첫 발견

http://news.donga.com/3/all/20140723/65379699/1


<이 글은 작가 '이상'의 편지야.

14년도에 발견 됐고, 최정희(崔貞熙, 소설가, 기자,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쓴 편지로 밝혀졌어.

문학계에서는 이상의 '종생기' 라는 작품에서 나온 정희의 모티브가 최정희 작가라는 추측도 하고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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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1 2018.02.09 21:26

    아 좋다..덕분에 잘 읽었어. 좋은 인연 만들어나가길 빌게 토리야!

  • tory_2 2018.02.09 22:09
    와 찐토리 고마워! 처음 읽는데 마음 몽글몽글해진다...
  • tory_3 2018.02.09 22:32

    나도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에 다른 사람들이 안 오는 바람에 짝사랑하는 사람이랑 둘이 같이 식사하게 됐어. 그리고 지난 달에는 나랑 그 사람이랑 우연히 같은 영화관에서 같은 시간 같은 영화를 보게 됐고. '짝사랑하면서 가장 슬픈 때는 거절당할 때가 아니라, 나한테는 영화 같았던 순간들이 상대방에게는 그저 일상의 한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다.' 이런 말을 봤어. 그 사람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었겠지만 난 그 순간이 있어서 행복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어도 이 마음이 있어서 하루하루가 설레고 행복하면서도 슬퍼.
    이상의 편지도 진짜 상대방을 극진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서 좋아. 상대방은 친일파지만 이상의 사랑 자체가 순수하고 예뻐. 그리고 난 짝사랑할 때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많이 떠올려. 영화관 문을 열었을 때 그 사람이 보인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원글토리의 사랑은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어.

  • tory_4 2018.02.10 00:52
    러브레터가 담백하게 설레고, 왠지 그 시대가 그려지는 것 같아서 넘 좋다. 좋은 글 고마워. 찐토리의 사랑도 응원해!
  • tory_5 2018.02.10 17:51
    잘 읽었어 왜인지 나는 마음이 아프다..ㅠㅠ토리가 좋은 인연을 이어가길 응원할게!
  • tory_6 2018.02.10 23:06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18/02/14 19:05:47)
  • tory_7 2018.02.11 20:06
    글 좋다...나도 혼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구절구절마다 마음에 아로 새겨지는 기분이야ㅜㅜ 좋은 글 올려줘서 고맙고 토리가 좋은 인연 이어갈수 있길 응원할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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