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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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1 2021.11.26 00:03


    심보선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형은 분명 선량한 사람이 됐을 거야.
    나만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을 테고
    나보다 어머니를 잘 위로해줬을 거야.
    당연히 식구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잠들었겠지.
    문들을 다 닫고.
    불들을 다 끄고.

    형한테는 뭐든 다 고백했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사는 게 너무나 무섭다고.
    죽고 싶다고.
    사실 형이 우리 중에 제일 슬펐을 텐데.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이야.

    이것 봐, 지금 나는 형을 떠올리며 시를 쓰고 있잖아.
    그런데 형이 이 시를 봤다면 뭐라고 할까?
    너무 감상적이라고 할까?
    질문이 지나치게 많다고 할까?
    아마도 그냥 말없이 웃었겠지.
    아까 그 신부님처럼.

    시가 아니더라도 난 자주 형을 생각해.
    형이 읽지 않았던 책들을 읽고
    형이 가지 않았던 곳들을 가고
    형이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형이 하지 않았던 사랑을 해.

    형 몫까지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끔
    내가 나보다 두 살 더 늙은 것처럼 느껴져.

    그럼 죽을 땐 두 해 빨리 죽는 거라고 느낄까?
    아니면 두 해 늦게 죽는 거라고 느낄까?
    그건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그런데 형은 정말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사실 모르는 일이지.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지.
    불행이라는 건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말야.

    만약 그랬다면 내가 형보다 더 슬픈 사람이 되고
    형은 감옥에서 시를 썼을까?
    그것도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했는데
    결국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네.

    형 때문에 나는 혼자 너무 많은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됐어.
    이것 봐. 지금 나는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시를 쓰고 있잖아.
    문들도 다 열어두고.
    불들도 다 켜놓고.

    형,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형,
    응?
  • W 2021.11.26 00:06
    1톨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버세요ㅠ
  • tory_3 2021.11.26 01:06

    찐톨 덕에 좋은 시 알아간다... 담담한 거 같은데 마음이 아픈 시네 ㅠㅠ

  • tory_4 2021.11.26 05:52
    와 시 너무 좋다… 시외한인데 이렇게 좋은 시를 알게 돼서 기쁘다.. 찐톨도 1톨도 고마워!!
  • tory_5 2021.11.26 11:23

    와............진짜 좋아 ㅠㅠ고마워 톨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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