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터전이자 예술적 유산, 집과 정원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갔던 위대한 화가들의 흔적.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18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은 몇몇 예술가들의 천재성이 아닌, 기술 발달에 기대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유럽의 옛 거장들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꽃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꽃을 꺾어 꽃병에 꽂거나 모델의 손에 들려야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 스케치 정도는 야외에서도 가능했지만, 캔버스나 목판에 물감을 칠하는 작업은 여전히 실내에서만 가능했다. 광물 안료를 손으로 갈아 오일과 혼합하여 물감을 만드는 과정은 지저분한 데다 꽤 위험하기까지 해서, 19세기 이전 작업실의 모습은 화학 실험실에 가까웠다. 유화 물감을 보관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튜브가 미국의 한 초상화가의 손에서 탄생했고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물감의 발명으로 자연 풍경과 정원을 그리는 화가들은 야외에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고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야외 작업을 의미하는 ‘앙 플랭 에르(En Plein Air)’는 ‘인상주의’ 운동과 동의어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대표적인 정원사이자 화가로서 그림과 정원 가꾸기를 결합했다. ‘인상파’라는 단어는 맨 처음 조롱의 의미로 시작되었으나 19세기와 20세기 초반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예술운동이 되어 독일과 스페인,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퍼져나갔다. 인상파 화가들이 공유한 것은 야외 작업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과 태도였다.
20세기 중반, 화가이자 정원사로서의 삶은 수많은 화가가 선망하는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정원은 정물화의 소재와 달리 매번 새로운 시선과 느낌으로 담아낼 수 있는 소재다.
화가들은 정원이라는 모티프를 반복해서 그리면서 화법을 다듬고 완성해나갔다. 지베르니(Giverny)에 있는 정원에서 모네는 수백 점의 걸작을 탄생시켰으며, 정신병원에 입원한 고흐는 프로방스의 작은 정원에서 한 해 동안에만 150점이 넘는 작품을 완성했다. 정원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들의 정치적 위기나 고난의 시기에 휴식과 성장,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멕시코시티에서 살아간 프리다 칼로에게 ‘푸른집’ 정원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그녀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추방당한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에게도 푸른집의 정원은 피난처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평온한 마을 서식스 찰스턴의 정원은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삶의 터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징집을 피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원은 예술 사조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화가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뮤즈가 되어왔다. 정원을 들여다보면 화가들의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굴곡진 그들의 삶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