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너무 부정적일 수 있으나,
육아란 생각보다 꽤 무거운 일이다.
물론 내 뱃속에서 나온 온전한 나와 내 남편의 피조물이고,
사랑이라는 추상적 단어를 생물로 치환할 수 있다면 그건 아기일것이다.
하늘에서 나와 내 남편을 위해 내려준 아기천사.
그게 바로 나의 아들, 내 아이.
늘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내 삶 전체를 따듯하게 해주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힘을 주는 존재.
기적과도 같은 존재...
하지만 미성숙한 생명체, 인간과 함께하는 삶에는
그렇게 핑크빛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혼인, 혹은 동거에서 느낀 타인과 내 삶을 공유했던
경험보다 훨씬 많은 트러블이 생겨난다.
남편, 혹은 파트너와의 삶의 공유 가운데에는
서로 양보하며 밸런스를 맞춰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미성숙한 생명체인 아이와의 동거는
훨씬 많은 트러블메이킹은 아이가 하고
모든 양보는 나와 내 파트너가 도맡아 해야한다.
왜 너는 책임과 양보를 하지 않느냐 되물어도 소용이 없다.
그는 울음으로 대답할 뿐이다.
아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되물을 정도의
행복감을 주지만 그와 비례할 만큼의 정신적 갈등과 육체적 힘듦을 함께 준다.
내 의식주를 모두 포기하고나서야 그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식탁 앞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여유조차 뺏긴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되물어본다.
하지만 아이를 원한건 나였다. 오로지 내 욕심과 행복만을 위해 태어난 생명체이다.
무섭게도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내 모든 기쁨의 요소를 포기하고 아이의 건강과 웃음을 위해 희생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었다. 내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할애한다.
아이때문에 친구와 멀어지고, 사회와 멀어진다.
일주일에 한번있는 미팅시간도, 간만에 잡힌 친구와의 약속도 미루고 내 잘못도 아닌데 고개를 조아리게 된다.
나도 안다. 피같은 휴일의 약속, 업무시간의 촉박함. 그래서 더욱 미안하다.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잠시,
이 아이는 오로지 나와 내 파트너의 선택으로 세상에 온 아이다.
절대 아이의 탓이 될 수 없으며 온전히 나의 탓이다.
미성숙한 사람과 삶을 공유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내가 양보해야하고, 내가 희생되어야 한다.
이렇게 억울해 할거면 낳지 말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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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이와 내 삶을 공유한지도만 5년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도 책임감에 지쳐있는 나이다.
아이의 키 1cm, 몸무게 500g, 숨소리 마저 내 탓이다.
5년이 지나고보니 이제 내 책임이 아닌 것들이 꽤나 생긴다.
아이가 엎지른 우유는 내 책임이 아니라 아이 자신의 책임이 되었다.
방안 가득 어지럽힌 장난감도 이제는 그의 책임이다.
물론 아직도 책임감의 무게는 내가 겨우감당해내는 정도이지만,
시간이 갈 수록 조금은 가벼워진다.
아이가 태어난게 억울하지 않도록, 힘든 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나를 원망하지 않도록 책임을 가르친다.
본인의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그리고 나는 죽을때까지 노력해야한다.
아이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한 그의 삶이 반짝반짝 빛나도록
우리 사회가 변하도록 힘써야겠다.
이게 가장 마지막까지 내가 힘써야할 책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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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왜 낳고 왜 키우느냐에 대한 끊임없는 내 질문과 답변...
결국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할 문제가 꽤 많다는걸 느낀다-
산다는건 꽤 아름다운 일이고 그 일을 해내는
본인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걸 우리 아이가 커가면서 느낄 수 있길 바라고,
우리도 기성세대로 넘어가면서 많은 노력을 해야할 것 같아.
육아는 내 삶을 옭아맨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나 자신의 성숙을 위한 도구이기도 한 것 같아.
아이를 키우면서 발전된 나를 본다.
참나... 시인다됐어.
여자의 몸으로 임신해서 사회적약자가 되고, 지금은 그 약자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 되어
이 사회가 얼마나 엉망인지 몸소 체험하면서도
삶이란... 이런 꽃노래나 부르는게 아이러니하지만
사는게 그렇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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