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dmitory.com/img/202002/6S8/I8Q/6S8I8QA2t2iwIKoOCUysSS.jpg
1. 소헌왕후 심씨
출생 = 1395년 10월 12일
사망 = 1446년 4월 19일 (만 50세)
(슬하 8남 2녀)
세종대왕의 정실부인이자 가장 평가가 높은 조선왕비 중 한명이야. 문화시중 심덕부의 손녀로 1408년 14세에 당시 대군이던 세종과 혼인하여 "삼한대국부인"으로 봉해졌어.
그녀가 충녕대군의 배필이 된 이유는 숙모가 태종의 여동생인 경선공주인 까닭이 컸다고 해. 1418년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자 왕세자빈이 되어 "경빈"이 되었고 그 뒤 즉위하자 중전(왕비)가 되어 "공비"라는 별호를 받아.
그 해, 아버지 심온과 숙부 심정,심종이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당하였고 소헌왕후의 어머니와 남동생들이 관노가 됨(다만 중전의 모친.동생들인지라 노역에 투입되진 않았어)
당시 소헌왕후에 대한 폐비론이 있었으나 이미 왕자를 둘이나 낳은 상황에 안평대군을 임신중이여서 폐비되진 않았음.
무엇보다 이때 한바탕 숙청한 이유가 왕비가 아닌, 외척을 없애기 위함이었음. 폐비시켰다간 다시 왕비를 간택해서 맞아들여야 하고, 법도상 조실부모한 규수는 간택 자격이 없으니 새로운 규수를 간택하면 또다시 외척이 생김,
만일 소헌왕후를 폐비하고 세종대왕이 새로운 왕비를 맞아 또 아들을 본다면, 세종의 후계구도는 매우 복잡해짐. 이복동생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 계모 신덕왕후와 갈등을 빚고, 끝내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탈취한 태종으로선 손자대에서 또 같은 역사가 반복되길 바라지 않았을 것임.
그뒤 태종 사후인 1426년 어머니인 부부인 안씨와 동생들은 직첩을 되찾고 다시 양반이 되었음.
이후로는 조용히 내명부를 통솔하다가 세자인 문종의 정실(세자빈)인 휘빈 김씨의 미신 사건, 순빈 봉씨의 레즈비언 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두 세자빈을 질책하기도 하였어. 실록에는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
특히 세종 8년 한양에 큰 불이 났을때 세종은 사냥을 하러 지방에 나가있었는데 당시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화재진압을 진두지휘했고 영의정인 황희는 그녀에게 보고를 올렸다고 함.
남편 세종과 사이가 좋아서 아들 8명(문종,세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딸 2명 (정선공주,정의공주)까지 10명을 낳음.
그녀의 모친인 부부인 안씨 (1374~1444) 역시 3남 6녀를 낳은걸 봐서는 부모님처럼 사이가 좋았나 봄. 며느리들중 수양대군부인(정희왕후)를 아꼈고 말년에는 수양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나가 그곳에서 인생을 마쳤을정도였어.
생전에 설탕을 좋아해서 와병 중인 상태에서도 설탕을 먹고 싶어했는데, 후에 장남 문종이 설탕을 얻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영전에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설탕은 사탕수수가 열대작물인지라 조선에서 재배할수없었고 사탕무도 전래되지 않았던지라 모두 해외에서 무역을 통해 구입해야 하는 물건이어서 매우 값비싼 사치품이었어. 그래서 왕비인 소헌왕후조차 함부로 구할 수 없었음.
일생동안 가족에 대한 많은 비극을 겪었던 왕비로 일단 그녀가 죽기 전에 자식을 셋이나 떠나보냈어. 그녀가 30대가 되고 나서 큰딸 정소공주가 세상을 떠났고, 50대가 되었을때 5남인 광평대군이 요절하고, 어머니인 부부인 안씨. 이듬해 7남 평원대군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서 그 충격에 소헌왕후마저 건강이 악화하게 이르러 사망하게 되었음.
생전이 워낙 파란만장해서인지 불교에 의지해 인생을 살았다고 전해짐
https://img.dmitory.com/img/202002/3Ou/ytq/3OuytquuAMu2ci8oQCCig2.jpg
2. 신빈 김씨
출생 = 1406년 출생
사망 = 1464년 9월 4일
(슬하 6남 2녀)
원래 내자시의 여종으로 신분은 천민이였음. 13세이던 1418년 소헌왕후의 궁인으로 원경왕후에게 발탁되었고 그 뒤 승은을 입고 세종의 후궁이 되어 아들 6명 (계양군,의창군,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과 딸 2명(일찍 요절)을 낳음.
세종이 정말 총애했는지 소헌왕후 사후에는 내명부를 총괄하는 총괄후궁이 되었고 소헌왕후의 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역할을 하기도 했어.
생전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러워 소헌왕후도 아꼈고 세종 사후 궁을 나가 머리를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했음. 1452년 그의 아들 의창군이 그녀가 머리를 기르게 하도록 왕(단종)에게 청원하나 이루어지지 않음.
아들 셋을 낳은 또 다른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가 세조에 의해 사형당하고 친정도 풍비박산난 반면, 신빈 김씨의 아들들은 수양대군과 가까웠으므로 계유정난의 정난공신으로 책봉받았음.. 또한 신빈 김씨가 죽었을 때에도 세조가 쌀, 콩 등 70석을 부의로 내리는 등 배려하였다고 전해짐.
https://img.dmitory.com/img/202002/1AU/50J/1AU50J4co0u60cymiM2ya6.jpg
3. 영빈 강씨
출생 = 1402년 출생
사망 = 1483년 1월 21일 사망
(슬하 1남)
화의군의 어머니로 본래 궁인 출신이거나 혹은 세종의 후궁으로 간택된 간택후궁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한것이 없음.
그녀의 아들 화의군(1425년생)은 여러번 사고를 쳐서 직첩을 빼앗기는 등 수모를 겪었는데 그 뒤 단종복위운동에 휘말려 화의군이 전라도 금산에 유배될때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왕실족보에서 삭제되고 같이 유배됨.
그 뒤 기록이 없는데 1483년 1월 그녀가 늙어죽고 아들 화의군 이영이 상을 치르는걸 돕게 했다는 기록이 끝임.
https://img.dmitory.com/img/202002/6Bq/3Xg/6Bq3Xgd8HuUScEmqiUACkQ.jpg
4. 혜빈 양씨
출생 = 1410년 전후 출생
사망 = 1455년 11월 9일
(슬하 3남)
현감 양경의 외동딸로 원래 세자궁(문종)의 궁인으로 들어와 병역한 세자를 간호하다가 세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고 함.
세종과 사이에 아들 3명 (한남군,수춘군,영풍군)을 두었는데 세자빈 권씨(헌덕왕후)가 아들을 낳고 얼마뒤에 죽자 단종의 유모를 권유한 세종의 요구를 기쁘게 받아들여 단종을 직접 키웠다고 전해짐.
세종 사후 신빈처럼 비구니가 되어 궁에 나가 살다가 문종이 다시 궁에 그녀를 들였고 단종은 평소 그녀의 처소에서 지냈다고 해.
그러나 그녀가 궁중을 장악할 것을 염려한 수양대군이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여 그녀를 대신하게 하자, 그녀는 더 이상 단종을 보필할 수 없었음.
왜냐하면 숙빈 홍씨는 간택후궁 출신이자 문종의 후궁 중 유일하게 귀인 품계일 정도로 가장 총애받았고, 왕비가 없는 문종 시절 내전을 다스렸기에 내명부의 역할을 하기는 숙빈이 더 명분이 있었던데다, 숙빈 홍씨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수양대군에게 더 유리했어..
그녀는 이 일로 수양대군을 원망한 듯보임.
이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선위하고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갔고 1455년 11월 의붓아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교형으로 생을 마감함.
그 뒤 그녀의 세아들인 한남군,수춘군,영풍군도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고 전해짐.
https://img.dmitory.com/img/202002/4NZ/qfc/4NZqfclBGow288sMsiY4g0.jpg
5. 숙원 이씨
출생 = 1418년 전후 출생
사망 = 1490년 이후
(슬하 1녀)
세종의 후궁으로 종4품 숙원에서 품계가 끝난 인물. 세종과 사이에 외동딸 정안옹주(1438년생)을 두었는데 그녀에겐 증손뻘인 성종시절 1490년 외손자 심언에 의해 비리를 저지른게 발각되어 탄핵받았다는 기록이 끝임.
https://img.dmitory.com/img/202002/BcZ/d2H/BcZd2HdMvS4OMAm8yGSU2.jpg
6. 상침 송씨
출생 = 1396년
사망 = 1463년 8월 21일
(슬하 1녀)
세종의 딸 정현옹주의 어머니로 왕녀를 낳았음에도 후궁첩지는 커녕 상궁의 품계인 정6품 상침에서 끊긴 인물. 세종 사후 정현옹주의 남편인 윤사로의 집에서 지내다가 1463년 68세 나이에 천식으로 세상을 떠남.
충남 아산 도고면에 그녀의 묘가 있음.
https://img.dmitory.com/img/202002/5aq/BhA/5aqBhALo4USUGQguCUyg6W.jpg
7. 사기 차씨
출생 = 1410년 전후 출생
사망 = 1444년 음력 7월 10일
(슬하 1녀)
1430년 세종의 딸인 옹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후궁첩지도 못받고 이도저도 아닌 상궁 품계로 있던 그녀는 1444년 7월 10일 연생원뜰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실록에 나와있음.
https://img.dmitory.com/img/202002/7B2/4lm/7B24lmZEFWUiAMQ8yKCSMU.jpg
8. 귀인 최씨
출생 = 1408년 전후 출생
사망 = 1453년 10월 이후
(슬하 자녀 없음)
판돈녕부사 최사의의 딸로 1424년 정식적으로 간택령을 내려 후궁으로 간택된 세종의 후궁으로 처음에는 명의궁주로 있다 4년뒤인 1428년 종1품 귀인으로 봉해짐.
보통 후궁간택이 10대 중반~10대 후반에 이루어진걸 보면 그녀는 1408년 전후에 태어난듯함.
세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으며 1453년 10월 그녀가 궁에 입궁하여 혜빈양씨의 처소로 들어가 몆날몆일을 나오지 않고 있다는게 기록의 끝임. 그 이후에 세상을 떠난걸로 보여짐.
https://img.dmitory.com/img/202002/6N4/q07/6N4q07hlF8uky42KG2ASc4.jpg
9. 귀인 박씨
출생 = 1409년 출생
사망 = 미상
(슬하 자녀 없음)
1424년 당시 귀인최씨와 함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했고 처음에는 궁주의 품계를 받았고 그 이후 종1품 귀인에 봉해짐.
안변도호부사 등을 지낸 박강생의 딸로 박강생은 딸이 후궁이 되기 2년전인 1422년 사망함. 그녀는 세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으며 언제 죽었는지 기록조차 없음.
https://img.dmitory.com/img/202002/29I/yab/29Iyab9TjWIa8YEEG0y6SK.jpg
10. 소용 홍씨
출생 = 미상
사망 = 1452년 2월 4일
(슬하 자녀 없음)
세종의 후궁으로 1434년 숙용시절 모친상을 당해 부의를 내렸다는 기록이 없음. 세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으며 언제 후궁이 되었는지조차 전해지지 않으나 1452년 2월 4일 그녀가 죽어서 부의를 내렸다는게 공식적인 기록의 끝임.
https://img.dmitory.com/img/202002/4Sg/GVq/4SgGVqlnaEk0CgmquAcUmC.jpg
11. 숙의 조씨
출생 = 미상
사망 = 미상
(슬하 자녀 없음)
품계와 성씨만이 전해지는 세종의 후궁으로 자식이 없고 그 외 기록자체가 없음,
ㅡㅡㅡ
세종은 11명의 부인들 사이에서 18남 4녀를 자녀로 두었음.
1. 소헌왕후 심씨
출생 = 1395년 10월 12일
사망 = 1446년 4월 19일 (만 50세)
(슬하 8남 2녀)
세종대왕의 정실부인이자 가장 평가가 높은 조선왕비 중 한명이야. 문화시중 심덕부의 손녀로 1408년 14세에 당시 대군이던 세종과 혼인하여 "삼한대국부인"으로 봉해졌어.
그녀가 충녕대군의 배필이 된 이유는 숙모가 태종의 여동생인 경선공주인 까닭이 컸다고 해. 1418년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자 왕세자빈이 되어 "경빈"이 되었고 그 뒤 즉위하자 중전(왕비)가 되어 "공비"라는 별호를 받아.
그 해, 아버지 심온과 숙부 심정,심종이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당하였고 소헌왕후의 어머니와 남동생들이 관노가 됨(다만 중전의 모친.동생들인지라 노역에 투입되진 않았어)
당시 소헌왕후에 대한 폐비론이 있었으나 이미 왕자를 둘이나 낳은 상황에 안평대군을 임신중이여서 폐비되진 않았음.
무엇보다 이때 한바탕 숙청한 이유가 왕비가 아닌, 외척을 없애기 위함이었음. 폐비시켰다간 다시 왕비를 간택해서 맞아들여야 하고, 법도상 조실부모한 규수는 간택 자격이 없으니 새로운 규수를 간택하면 또다시 외척이 생김,
만일 소헌왕후를 폐비하고 세종대왕이 새로운 왕비를 맞아 또 아들을 본다면, 세종의 후계구도는 매우 복잡해짐. 이복동생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 계모 신덕왕후와 갈등을 빚고, 끝내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탈취한 태종으로선 손자대에서 또 같은 역사가 반복되길 바라지 않았을 것임.
그뒤 태종 사후인 1426년 어머니인 부부인 안씨와 동생들은 직첩을 되찾고 다시 양반이 되었음.
이후로는 조용히 내명부를 통솔하다가 세자인 문종의 정실(세자빈)인 휘빈 김씨의 미신 사건, 순빈 봉씨의 레즈비언 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두 세자빈을 질책하기도 하였어. 실록에는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
특히 세종 8년 한양에 큰 불이 났을때 세종은 사냥을 하러 지방에 나가있었는데 당시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화재진압을 진두지휘했고 영의정인 황희는 그녀에게 보고를 올렸다고 함.
남편 세종과 사이가 좋아서 아들 8명(문종,세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딸 2명 (정선공주,정의공주)까지 10명을 낳음.
그녀의 모친인 부부인 안씨 (1374~1444) 역시 3남 6녀를 낳은걸 봐서는 부모님처럼 사이가 좋았나 봄. 며느리들중 수양대군부인(정희왕후)를 아꼈고 말년에는 수양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나가 그곳에서 인생을 마쳤을정도였어.
생전에 설탕을 좋아해서 와병 중인 상태에서도 설탕을 먹고 싶어했는데, 후에 장남 문종이 설탕을 얻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영전에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설탕은 사탕수수가 열대작물인지라 조선에서 재배할수없었고 사탕무도 전래되지 않았던지라 모두 해외에서 무역을 통해 구입해야 하는 물건이어서 매우 값비싼 사치품이었어. 그래서 왕비인 소헌왕후조차 함부로 구할 수 없었음.
일생동안 가족에 대한 많은 비극을 겪었던 왕비로 일단 그녀가 죽기 전에 자식을 셋이나 떠나보냈어. 그녀가 30대가 되고 나서 큰딸 정소공주가 세상을 떠났고, 50대가 되었을때 5남인 광평대군이 요절하고, 어머니인 부부인 안씨. 이듬해 7남 평원대군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서 그 충격에 소헌왕후마저 건강이 악화하게 이르러 사망하게 되었음.
생전이 워낙 파란만장해서인지 불교에 의지해 인생을 살았다고 전해짐
https://img.dmitory.com/img/202002/3Ou/ytq/3OuytquuAMu2ci8oQCCig2.jpg
2. 신빈 김씨
출생 = 1406년 출생
사망 = 1464년 9월 4일
(슬하 6남 2녀)
원래 내자시의 여종으로 신분은 천민이였음. 13세이던 1418년 소헌왕후의 궁인으로 원경왕후에게 발탁되었고 그 뒤 승은을 입고 세종의 후궁이 되어 아들 6명 (계양군,의창군,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과 딸 2명(일찍 요절)을 낳음.
세종이 정말 총애했는지 소헌왕후 사후에는 내명부를 총괄하는 총괄후궁이 되었고 소헌왕후의 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역할을 하기도 했어.
생전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러워 소헌왕후도 아꼈고 세종 사후 궁을 나가 머리를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했음. 1452년 그의 아들 의창군이 그녀가 머리를 기르게 하도록 왕(단종)에게 청원하나 이루어지지 않음.
아들 셋을 낳은 또 다른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가 세조에 의해 사형당하고 친정도 풍비박산난 반면, 신빈 김씨의 아들들은 수양대군과 가까웠으므로 계유정난의 정난공신으로 책봉받았음.. 또한 신빈 김씨가 죽었을 때에도 세조가 쌀, 콩 등 70석을 부의로 내리는 등 배려하였다고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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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빈 강씨
출생 = 1402년 출생
사망 = 1483년 1월 21일 사망
(슬하 1남)
화의군의 어머니로 본래 궁인 출신이거나 혹은 세종의 후궁으로 간택된 간택후궁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한것이 없음.
그녀의 아들 화의군(1425년생)은 여러번 사고를 쳐서 직첩을 빼앗기는 등 수모를 겪었는데 그 뒤 단종복위운동에 휘말려 화의군이 전라도 금산에 유배될때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왕실족보에서 삭제되고 같이 유배됨.
그 뒤 기록이 없는데 1483년 1월 그녀가 늙어죽고 아들 화의군 이영이 상을 치르는걸 돕게 했다는 기록이 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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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혜빈 양씨
출생 = 1410년 전후 출생
사망 = 1455년 11월 9일
(슬하 3남)
현감 양경의 외동딸로 원래 세자궁(문종)의 궁인으로 들어와 병역한 세자를 간호하다가 세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고 함.
세종과 사이에 아들 3명 (한남군,수춘군,영풍군)을 두었는데 세자빈 권씨(헌덕왕후)가 아들을 낳고 얼마뒤에 죽자 단종의 유모를 권유한 세종의 요구를 기쁘게 받아들여 단종을 직접 키웠다고 전해짐.
세종 사후 신빈처럼 비구니가 되어 궁에 나가 살다가 문종이 다시 궁에 그녀를 들였고 단종은 평소 그녀의 처소에서 지냈다고 해.
그러나 그녀가 궁중을 장악할 것을 염려한 수양대군이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여 그녀를 대신하게 하자, 그녀는 더 이상 단종을 보필할 수 없었음.
왜냐하면 숙빈 홍씨는 간택후궁 출신이자 문종의 후궁 중 유일하게 귀인 품계일 정도로 가장 총애받았고, 왕비가 없는 문종 시절 내전을 다스렸기에 내명부의 역할을 하기는 숙빈이 더 명분이 있었던데다, 숙빈 홍씨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수양대군에게 더 유리했어..
그녀는 이 일로 수양대군을 원망한 듯보임.
이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선위하고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갔고 1455년 11월 의붓아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교형으로 생을 마감함.
그 뒤 그녀의 세아들인 한남군,수춘군,영풍군도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고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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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숙원 이씨
출생 = 1418년 전후 출생
사망 = 1490년 이후
(슬하 1녀)
세종의 후궁으로 종4품 숙원에서 품계가 끝난 인물. 세종과 사이에 외동딸 정안옹주(1438년생)을 두었는데 그녀에겐 증손뻘인 성종시절 1490년 외손자 심언에 의해 비리를 저지른게 발각되어 탄핵받았다는 기록이 끝임.
https://img.dmitory.com/img/202002/BcZ/d2H/BcZd2HdMvS4OMAm8yGSU2.jpg
6. 상침 송씨
출생 = 1396년
사망 = 1463년 8월 21일
(슬하 1녀)
세종의 딸 정현옹주의 어머니로 왕녀를 낳았음에도 후궁첩지는 커녕 상궁의 품계인 정6품 상침에서 끊긴 인물. 세종 사후 정현옹주의 남편인 윤사로의 집에서 지내다가 1463년 68세 나이에 천식으로 세상을 떠남.
충남 아산 도고면에 그녀의 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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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기 차씨
출생 = 1410년 전후 출생
사망 = 1444년 음력 7월 10일
(슬하 1녀)
1430년 세종의 딸인 옹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후궁첩지도 못받고 이도저도 아닌 상궁 품계로 있던 그녀는 1444년 7월 10일 연생원뜰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실록에 나와있음.
https://img.dmitory.com/img/202002/7B2/4lm/7B24lmZEFWUiAMQ8yKCSMU.jpg
8. 귀인 최씨
출생 = 1408년 전후 출생
사망 = 1453년 10월 이후
(슬하 자녀 없음)
판돈녕부사 최사의의 딸로 1424년 정식적으로 간택령을 내려 후궁으로 간택된 세종의 후궁으로 처음에는 명의궁주로 있다 4년뒤인 1428년 종1품 귀인으로 봉해짐.
보통 후궁간택이 10대 중반~10대 후반에 이루어진걸 보면 그녀는 1408년 전후에 태어난듯함.
세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으며 1453년 10월 그녀가 궁에 입궁하여 혜빈양씨의 처소로 들어가 몆날몆일을 나오지 않고 있다는게 기록의 끝임. 그 이후에 세상을 떠난걸로 보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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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귀인 박씨
출생 = 1409년 출생
사망 = 미상
(슬하 자녀 없음)
1424년 당시 귀인최씨와 함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했고 처음에는 궁주의 품계를 받았고 그 이후 종1품 귀인에 봉해짐.
안변도호부사 등을 지낸 박강생의 딸로 박강생은 딸이 후궁이 되기 2년전인 1422년 사망함. 그녀는 세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으며 언제 죽었는지 기록조차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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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소용 홍씨
출생 = 미상
사망 = 1452년 2월 4일
(슬하 자녀 없음)
세종의 후궁으로 1434년 숙용시절 모친상을 당해 부의를 내렸다는 기록이 없음. 세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으며 언제 후궁이 되었는지조차 전해지지 않으나 1452년 2월 4일 그녀가 죽어서 부의를 내렸다는게 공식적인 기록의 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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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숙의 조씨
출생 = 미상
사망 = 미상
(슬하 자녀 없음)
품계와 성씨만이 전해지는 세종의 후궁으로 자식이 없고 그 외 기록자체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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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11명의 부인들 사이에서 18남 4녀를 자녀로 두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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