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의 9대황제 흠종은 1100년 휘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아버지 휘종은 국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림과 서예에만 빠져 살았으며 외부로는 북방의 요나라(거란)과 금나라(여진)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금나라 군대가 수도인 개봉에 쳐들어오자 휘종은 아들 흠종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한 뒤, 안전한 남방으로 도망가버린다. 흠종은 금나라에 굴욕적인 강화를 맺으며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 등을 통해 겨우 여진군을 되돌려보냈고 아버지 휘종도 다시 모셔왔다.
평화가 찾아오자 상황 휘종은 다시 예전의 향락적인 생활에 빠져 살았고, 흠종은 아버지와 달리 사치와 주색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나라의 재정과 기울어가는 국운을 되살릴 재능이 없는 평범한 군주에 불과했다. 더불어 금나라가 물러간 후, 주전파 신료들이 굴욕적인 강화의 철회를 주장하고 나서자 국제정세 파악에 미숙했던 흠종은 신료들의 의견을 그대로 따라 금나라와의 강화를 철회한다.
분노한 금나라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와 황제 흠종, 아버지 휘종, 10살 무렵의 태자까지 포함한 황실 일가족은 물론 대소신료와 궁녀 환관을 포함한 1만여명을 포로로 끌고간다. 흠종과 휘종은 이것이 고국 송나라를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었으며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정강의 변)
흠종은 검은 옷과 모자가 씌워진 채 병사들의 감시 하에 금나라로 끌려갔는데, 망국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늘에 곡을 했지만 그때마다 금나라 병사들에게 욕을 먹으며 질책을 받아 이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미인으로 이름 높았던 황후 주씨의 신세는 더욱 비참했다. 금나라의 일개 장수가 황후 주씨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자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여진족인 금나라 장수가 노래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 오히려 흥겨워하며 자신의 술 시중을 들라 명했다.
황후 주씨는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금나라 장수 택리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남편 흠종이 이에 격분하여 반항하자 택리는 흠종도 죽이려 했으나, 어찌되었든 황제라는 상징성 때문에 생포해가야 했기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황후 주씨는 이 날의 일로 몸져눕게 되었는데 흠종이 아내를 치료해달라고 눈물로 간청했으나 묵살당해 결국 주씨는 숨을 거두었다. 더욱 비참한것은 일국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을 금나라군은 멍석으로 대충 말아서 아무곳에나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금나라 황제 태종의 어전으로 압송된 흠종과 아버지 휘종은 발가벗겨진 채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가축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굴욕을 당했다. 또한 금 태종은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정신이 혼미한 자), 흠종에게 중혼후(重昏候- 정신의 혼미함이 중한 자)의 벼슬을 내려 또 한번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심지어 '공'과 '후'는 일개 제후에 불과하였으니 제왕의 지위마저 부정당한 것으로서 한때 일국의 황제였던 그들로선 오랑캐들에게 최악의 조롱을 당한 것).그리고 오국성(오늘날의 하얼빈)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결국 이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흠종의 유해는 죽어서도 고국 송나라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그의 얼마되지 않는 자손들 모두 금의 폭군 해릉왕에게 살해당하여 대가 끊겼다. 함께 끌려갔던 황족이나 고관대작들도 그 곳에서 죽었으며 그들의 처자는 금나라 장수들의 첩이 되거나 세의원(기방)의 창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무리 전근대시대 전쟁이라도 적국의 황제쯤 되면 최소한의 대우는 보장해주는게 관례였는데
(일례로 한반도에서도 백제 성왕이 포로로 잡혔을 때 신라군은 절을 올린 후 목을 베었다고 함)
상대가 호전적인 유목민족이기도 했고 송나라를 심하게 얕보았기에 일어난 흔치않은 사례로 볼 수 있을듯
로그인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