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숲
조선 역사에는 총 22명의 대비가 있었고 그 중 대왕대비 자리까지 간 인물은 10명임. 우연히 역사공부를 하다가 흥미로워서 적어봐. 참고로 이 글에는 현왕의 어머니 자격으로 사실상 대비대접을 받거나 그에 준하는 대접을 받은 인물들도 포함했어.




https://img.dmitory.com/img/201910/5Lp/RUp/5LpRUpH6j8KCAucCKUe2gM.jpg





1. 성비원씨 (태조의 3번째 부인)


(13??년 ?월 ??일 - 1449년 12월 29일)


(1398 ~ 1406 = 성빈)

(1406~ 1499 = 성비)


사실상 태조 이성계의 3번째 왕비로 여겨졌던 여인으로 1398년 태조 이성계와 혼인해서 처음에는 "빈"이라는 작위를 받았어. 그러던 중 1406년 빈에서 비로 승격되었고 봉작된 이후부터 거의 대부분의 국가 현안에 관여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더군다나 그 아버지인 이성계의 말조차 지지리 안듣던 이방원조차 성비 원씨에게만큼은 꼼짝을 못했어.


이방원은 당시 아버지인 태조의 미움을 받고 있었기에 아버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녀를 비로 삼았고 자신의 보여주기식 효도에 그녀를 어머니랍시고 많이 이용했대.


아버지가 사랑하던 계모와 최종적으로는 사이가 나빠져 그녀 소생아들을 모두 결단내버렸으니 알랑거릴 필요가 있었을 꺼고. 이에 대해 당시 이방원이 그녀를 계모로 대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음.


그녀는 태조의 다른 후궁들과 달리 정실부인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이유로 왕비가 받을 수 있는 품계인 비(妃)를 받았으나, 그녀가 성비로 봉작되었을 당시 태조는 태상왕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태조의 정궁(正宮)으로 대우해야 할지를 놓고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고


결론적으로 대우를 후궁인 "빈"보다 높게 대우는 대비인 정안왕후나 중전인 원경왕후보다는 낮게 대우하는것으로 결정이 되었음.


자세한 생몰년도는 없으나 1449년에 죽었고 궁에 들어와 산 세월이 51년임. 조선건국 초기에는 중기나 후기처럼 11~13세에 혼인하는것보다는 17~20세에 혼인하는 경우도 많았던터라 대략 68~70대 초반에 사망한것으로 추정됨.





https://img.dmitory.com/img/201910/5K5/eGR/5K5eGRM7xEgeCqGk2Suy4I.jpg


(2) 정안왕후 김씨 (조선 정종의 왕비)


(1355년 1월 22일 ~ 1412년 8월 2일, 만 57년 6개월)


(37~43세 = 의안군부인)

(43~43세 = 왕세자빈)

(43~45세 = 왕비)

(45~57세 = 왕대비)


태조 이성계의 둘째며느리. 조선 정종의 부인으로 조선 건국 이전 시기에 정종과 혼인했고 조선 개국 이후 정종이 의안군으로 책봉되며 그녀 역시 의안군부인이라는 호칭을 같게 되었음.


그 뒤 정종이 뒤늦게 왕세자 자리에 오르자 세자빈이 되었는데 6개월만에 시아버지 태조가 양위하며 남편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고 2년뒤 시동생 태종이 즉위한 이후 남편이 "상왕"으로 물려나자 조선 최초 "왕대비"가 되었고 순덕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았음.


부드럽고 검소한 성격을 가졌지만 때론 강단이 있었는데 시동생 태종 이방원이 언젠가 자신들이 계속 왕위를 지키고 있으면 시동생이 본인부부를 위협할것을 알아서인지 남편에게 시동생에게 양위할것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해.


슬하에 자녀가 한명도 없는데 남편 정종은 많은 후궁에 서자,서녀들까지 있던걸로 봐서는 아마 그녀쪽 문제로 자녀가 없었을꺼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함.


자녀가 없어서인지 정종의 7명의 후궁들에게서 난 17명의 아들과 8명의 옹주들에게도 잘 대해줬다고 하며 정종과의 사이도 매우 좋았다고 해. 왕대비로 물려난뒤 조용히 살다가 1412년 57세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했고 개성시에 있는 후릉에 남편과 같이 묻혀있어.




https://img.dmitory.com/img/201910/34J/OXI/34JOXIQyPKsomacsMqEqCE.jpg


(3) (2) 원경왕후 민씨 (태종의 왕비)


(1365년 7월 29일 ~ 1420년 8월 18일, 55년 0개월)


(27~35세 = 정안군부인)

(35~35세 = 세제빈)

(35~53세 = 왕비)

(53~55세 = 왕대비)


태조 이성계의 셋째며느리로 만 17세에 부친 민제의 제자인 이방원과 혼인했어. 결혼하고 10년동안 위화도회군, 정몽주피살, 고려멸망을 바라보다가 시아버지 즉위 후 남편이 정안군으로 책봉되며 그녀 역시 정안군부인으로 책봉되었어.


남편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기를 주저하자 손수 남편한테 갑옷을 입히기도 했고 자기 남자형제들과 함께 힘을 보태서 남편이 시아주버니 뒤를 이어 즉위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남편 태종이 즉위 후 오빠,남동생들 다 죽이고 충격으로 아버지는 화병으로 사망 거기에 후궁들까지 들이면서 남편과의 사이는 최악이 되버렸고


큰아들 양녕대군은 망나니질하다가 세자에서 폐위, 둘째 효령대군은 출가해버리는 바람에 파란만장한 왕비 생활을 보냈고 셋째아들이자 세자이던 세종이 즉위한 이후 왕대비로 물려앉아있다가 1420년 말라리아로 55세 나이에 사망했어.


실제 왕비가 된 이후 화병증상으로 여러번 치료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도 그럴것이 태종은 즉위한 이후 후궁을 14명이나 더 들였음. 아무리 조선시대 여권이 낮았고 칠거지약 어쩌고 그지같은 법이 있어도 부처도 씨를 보면 돌아앉는다는데 아무리 보살같은 성격이여도 못참았을꺼야.


상당히 여장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되며 그녀는 남편 태종이 즉위했을당시 공동집권이라고 생각했음. 실제로도 그녀의 공이 커서 태종이랑 공동즉위여도 할말없는 상황이였고..


근데 태종이 계모 신덕왕후를 보면서 외척컴플렉스 때문인지 그녀의 남자형제들을 다 죽이면서 갈등이 생겨버린것임. 하지만 무작정 사이가 나빴던건 아닌지 그녀는 태종과 사이에 일찍 죽은 자녀들 (아들 3명)까지 7남 4녀를 낳았어.


사후에는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현릉에 안장되었고 2년뒤 사망한 태종도 그녀의 옆자리에 안장되었다고 해.




https://img.dmitory.com/img/201910/2IX/32I/2IX32ICgycEOkE4ccQC4io.jpg


(4) 정순왕후 송씨 (단종의 왕비)


(1440년 1월 14일 - 1521년 7월 7일. 81년 5개월)


(14~15세 = 왕비)

(15~17세 = 왕대비)

(17~81세 = 노산군부인)


만 14세 나이에 1세어린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된 인물이야. 하지만 간택당시 왕실에는 대비.대왕대비도 없던터라 대군부인들, 선왕의 후궁들이 참여했고 나이도 어렸던터라 허울뿐인 왕비자리였음.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간택된 이유였으나 고모가 영응대군의 부인이였다는게 큰 이유 중 하나였어.


왕비가 된 지 1년만에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려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았고 다음해 단종이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그녀 역시 군부인으로 강등되었어.


단종이 처형된 이후 아예 천민으로 신분이 하락되었고 단 신분은 천민이지만 노역에 참여는 하지 못하게 했어. 그녀의 부친인 송현수는 사형당했음 (단 어머니 민씨와 남동생 송거는 살아남았는데 각각 80세. 92세까지 장수함)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고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해. 정업원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살며 고모와 친정가족들과 가까이 살았음.


세조 사후 세조부인 정희왕후가 그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많이 해주었고 많이 챙겨줬다고 해.


그 뒤 세조 - 예종 - 성종 - 연산군 - 중중까지 4명의 왕의 시대를 살다가 1521년 81세 나이에 사망했는데 아마 노환으로 자연사하신거 같아. 말년에는 경혜공주(시누이)아들을 양자삼아 단종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고 전해짐.




https://img.dmitory.com/img/201910/2UM/9S0/2UM9S08Lqwmee2GKSEEKUg.jpg


(5) 정희왕후 (세조의 왕비)


(1418년 12월 18일 - 1483년 5월 6일. 64년 4개월)


(10~36세 = 삼한국대부인)

(37~50세 = 왕비)

(50~51세 = 왕대비)

(51~64세 = 대왕대비)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10세 나이에 당시 대군이던 세조와 혼인했는데 사실 그녀의 언니가 원래 세조의 배필감으로 낙점된 상황이였어. 근데 당시 중전 소헌왕후의 지시를 받은 높은 상궁이 그녀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중전에게 고했고 결과적으로 그녀가 세조의 배필이 되었다고 함. 베필이 된 이후 수양대군부인 혹은 삼한국대부인으로 불리심.


소헌왕후와 세종이 며느리인 그녀를 아꼈음. 소헌왕후는 임종을 그녀와 세조의 집에서 맞이했을정도로 아꼈다고 해. 1453년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고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어.


세조 사후 예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예종마저 단기간만에 사망하자 그녀는 일찍 죽은 큰아들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키고 섭정을 함.


의경세자의 큰아들 월산대군도 있었지만 결론적인 이유는 자을산군의 장인이 당시 조정의 핵심이던 한명회였어. 단종의 사례를 생각하면 힘있는 처가집 + 왕실 대비.대왕대비의 생존으로 반정같은 불상사에 대비할수 있었다는거... 다만 그녀는 글을 읽을줄 몰라서 주위의 도움을 받았대.


섭정 당시에 그녀의 과단성이 있는 성격과 훌륭한 정치적 감각 덕분에 조정은 평화로워 안정기를 구가하였다고 해. 사극에서 손주며느리인 폐비 윤씨를 옹호하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윤씨가 불순한 행실로 정희왕후의 눈 밖에도 나, 사사를 적극 주도했음.


사극에서는 며느리 인수대비에게 늘 밀리는 뒷방신세로 나오지만 오히려 인수대비가 그녀에게 실제로는 꼼짝 못하는 신세였고 성격도 오히려 사극에서 표현되는 인수대비의 성격이 정희왕후의 성격이였음.


남편 세조와 금술도 좋아서 세조는 그녀 외에 후궁을 딱 2명만 들였고 사냥을 나가더라도 그녀와 동행했어. 하지만 그녀가 낳은 자식들 의경세자(덕종), 예종, 의숙공주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말년에는 불공을 들이며 살았다고 함.


심지어 세조도 말년에 온갖 질병은 다 걸린걸보면 진짜 권력을 얻은대신 화목한 가족과 건강을 잃은 대표적인 경우인거 같아.


1483년 초겨울(1월)부터 감기가 심해지자 요양차 온양행궁에서 온천요양을 즐겼는데 이 일로 감기가 악화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그 해 5월 만 64세 나이로 며느리 안순왕후. 소혜왕후가 지키는 와중 세상을 떠났고


남편 세조가 잠든 경기도 남양주의 광릉 옆자리에 안장되었어




https://img.dmitory.com/img/201910/3tl/SpL/3tlSpLx8HCSAGiUiEK2gSY.jpg


(6) 안순왕후 (예종의 왕비)


(1445년 5월 11일 - 1498년 2월 3일. 52년 8개월)


(18~23세 = 소훈)

(23~24세 = 왕비)

(24~49세 = 왕대비)

(49~52세 = 대왕대비)


예종의 두번째 왕비로 1461년 왕세자 예종의 세자빈 장순왕후가 요절하자 2년뒤인 1463년 18세에 동궁전 후궁인 "소훈"으로 입궁하였어. 후궁의 입장이였으나 정1품 빈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소훈시절에 제안대군과 명숙공주 그리고 일찍죽은 두자녀까지 4남매를 낳아 세자빈급으로 대접받았어.


세조가 임종 직전 예종에게 양위할 당시 그녀를 왕비로 삼으라 했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지. 하지만 남편 예종이 즉위 1년만에 사망했는데 족질로 죽어버림...당시 대군이던 제안대군은 너무 어렸던터라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시조카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켰고 그녀는 겨우 25세 나이에 왕대비가 되어 "인혜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음. 서열도 밀리게 되었는데 일찍 죽은 시아주버니 의경세자가 왕인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그 부인 수빈 한씨역시 왕대비로 책봉되었어.


서열도 손윗동서인 인수왕대비 한씨가 더 윗전이 되면서 사실상 허울뿐인 신세가 되버린거지. 하지만 성종과의 사이는 좋은편이였다고 해.


아들 제안대군 때문에 며느리를 2번이나 내쫓았음.. 첫 번째 며느리 김씨는 간질을 앓아 제안대군이 싫어하고 손자를 보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에 내쫓았고 두번째 며느리는 아들 제안대군이 싫다고 찡찡대고 전부인이랑 재결하고 싶다 해서 자신한테 불손하다는 이유로 쫒아내버림....


딸인 현숙공주역시 배우자와 사이가 안좋아서 사위를 귀양보내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어.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인수왕대비와 함께 대왕대비로 진봉되어 "명의대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았어. 인수대왕대비가 그녀보다 더 오래살아서 늘 2인자 신세였다네.


연산군과 사이는 오히려 좋은편이였고 말년에는 소갈증(당뇨)를 심하게 앓다가 1498년 만 52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사후에는 경기 고양의 남편 예종이 잠든 창릉에 합장되었어.


제안대군이나 명숙공주는 자식이 없어서 그녀 역시 슬하에 손주를 보지 못했어.




https://img.dmitory.com/img/201910/1tf/ioZ/1tfioZ8MYgeAUYaQSiWcQo.jpg



(7) 소혜왕후 한씨 (의경세자, 덕종의 왕후)


(1437년 10월 7일 - 1504년 5월 11일. 66년 7개월)


(13~18세 = 자산군부인)

(18~20세 = 세자빈)

(20~33세 = 수빈)

(33~38세 = 인수왕비)

(38~57세 = 왕대비)

(57~66세 = 대왕대비)


조선 성종의 어머니이자 연산군의 할머니로 의경세자의 부인임. 인수대비라는 호칭으로도 유명해. 13세 나이에 수양대군의 아들 자산군과 혼인했는데 그녀의 고모 둘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였고 둘째고모는 황실의 태비(선황제의 후궁)인 공신태비 한씨였음.


시부 세조가 반정으로 즉위하자 18세에 세자빈이 되었지만 2년만에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며 아들 월산대군.자을산군 그리고 딸 명숙공주와 출궁하여 수빈이라는 호를 받고 사가에 살았어.


하지만 시동생 예종이 즉위한지 1년만에 죽자 시어머니 정희왕후.사돈인 한명회와 손잡고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켰음. 남편 의경세자가 처음에는 "의경왕"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비"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현왕의 모후가 어떻게 "왕비"냐는 조정의 의견으로 의경왕이 "덕종"으로 추존되자 그녀 역시 "왕대비"로 봉승되어 "인수왕대비"라는 호칭을 받았어.


매우 학식이 뛰어나서 산스크리트어로 회화가 가능했다고 전해지며 내훈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음.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차라리 수빈이 섭정하는게 좋겠다 말할정도로 뛰어났고 한글을 모르는 시어머니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해.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며느리 폐비윤씨의 죽음에 적극 도모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아들 성종과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적극 추진했지 그녀와 인혜왕대비는 분위기에 휩쓸려 갔다는게 실제 역사임.


성격은 강직하고 우직해서 시아버지 세조가 "폭빈"이라는 호칭을 지어줬을정도로 강직했지만 실제 조정에 나선건 딱한번, 아들 성종이 불교탄압정책을 펼쳤을때 딱 한번 나선거 외에는 잘 조정에 간여도 하지 않고 살았음.


아들 성종. 큰아들 월산대군. 딸 명숙공주가 잇다라 죽자 화병을 얻어 자주 치료받았고 성종 사후 손자 연산군이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자숙대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았어.


1504년 갑자사화 당시 손자 연산군이 머리로 가슴을 들이받았다 가슴을 발길질했다 등등 충격으로 죽었다는데 갑자사화 이전인 1503년 11월부터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몹시 위독했어.


손자인 연산군이 그당시 장례준비를 논의할정도로 건강이 매우 나쁜 상황이였는데 아마 실제로는 평소에 잔치도 베풀어주고 조정에 복잡한 일도 같이 논의해주던 손자가 갑자기 할머니한테 대들고 꼬장부리니 충격으로 사망한것으로 보임.


인수대비는 죽기전 남긴 유언으로 "자신이 죽은 후 3일 이내에 왕이 고기를 들도록 하라"고 했고 죽어가면서도 손자를 걱정하다 세상을 하직하심.


이렇게 손자걱정을 하다 죽은걸 보면 반정세력이 일부로 명분을 만들려고 과장되서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폭행을 가해서 죽었다는 식의 조작을 만든거 아니냐는 역사학자의 의견도 있음.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경릉으로 남편 의경세자의 릉보다 크고 화려한데 남편은 세자신분으로 죽었지만 그녀는 왕실 대왕대비로 죽었기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4Ey/2Z9/4Ey2Z9yEdOQ6a6ASu8UQUm.jpg


(8) 정현왕후 윤씨 (성종의 마지막 왕비)


(1462년 7월 21일 - 1530년 9월 13일, 68년 1개월)


(11~17세 = 숙의)

(18~32세 = 왕비)

(32~42세 = 왕대비)

(42~68세 = 왕대비)


조선 성종의 3번째 왕비로 아명(이름)은 "윤창연"으로 11세이던 1473년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함. 1479년 연산군의 모친 중전 윤씨가 폐위된 이후 그녀가 왕비로 간택되어 다음해 책봉되었어.


슬하에 진성대군 1남을 낳았고 연산군을 친모 대신 키워주었다고 함. 그래서인지 사이가 딱히 나쁘지는 않았어. 성격이 어질고 순한터라 성종이 그 많은 후궁들을 거느렸어도 딱히 뭐라하지도 않았고 조용히 지내다가


1494년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자순왕대비"로 봉승되었어. 갑자사화 이전까지 연산군이랑 사이는 좋았는데 갑자사회 당시 연산군이 정귀인.엄귀인을 죽이고 그녀의 처소에서 행패를 부렸는데 그녀는 불을 끄고 처소안에서 꼼짝 안하고 있었고 연산군부인 중전 신씨가 와서 연산군을 만류했다고 해.


정현왕후가 숙의였을 당시 폐비 윤씨와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었어. 시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먼 친척인걸 제외하고는 자녀가 일찍죽은 옹주가 한 명 있었고, 또한 폐비 사사 당시 겨우 19살이었기 때문에 귀인 정씨나 귀인 엄씨와 달리 별 영향력도 없었음.


그 뒤 반정까지 2년간 쥐죽은듯이 지내다가 중종반정으로 친아들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즉위했고 3대왕을 거쳤어도 대왕대비가 되지 않았는데 연산군의 왕비 신씨도 이미 폐위되었고 아들과 어머니 사이였던터라 그대로 왕대비 자리에 있었으며


"자순혜화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았음. 아들 즉위 이후 경빈박씨의 사사에 깊게 간여하기도 했고 며느리인 문정왕후와 사이도 나름 좋은편이였다고 해.


1530년 만 68세 나이에 중풍으로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났고 사후 남편이 묻힌 선릉에 같이 안장되었어. 임진왜란 당시 그녀와 성종. 아들 중종의 묘는 파해쳐져서 시신이 불태워졌기 때문에 지금 릉에는 그녀의 시신이 없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5yG/Ui5/5yGUi5pPP2maG0eWE0qukO.jpg


(9) 문정왕후 윤씨 (중종의 3번째 왕비)


(1501년 12월 2일 - 1565년 5월 5일. 63년 4개월)


(15~32세 = 왕비)

(32~33세 = 왕대비)

(33~63세 = 대왕대비)


공식적으로 조선 역사상 두번째 간택왕비로 "왕비 - 왕대비 - 대왕대비" 3단 코스를 다 경험한 인물로 조선왕비들중 최고의 권세를 누린 인물


15세 나이에 중종의 2왕비 장경왕후가 죽자 13세 연상의 중종의 왕비로 간택되었음. 중종에게는 이미 많은 서자와 후궁이 있었고 그녀 역시 공주만 3명을 낳았던터라 처음에는 의붓아들 세자 인종을 통해 궁에서 권력을 다지려 했으나


그녀가 34세 늦은 나이에 아들 명종을 낳으면서 야망을 다지게 됨. 당시 세자궁의 방화사건이나 각종 흉흉한 일들이 다 그녀가 배후라는 말이 있었을정도로 의붓아들 인종을 핍박함.


남편 명종 사후 의붓아들 인종이 즉위했는데 즉위한지 얼마 안가 급사했고 그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인종 살아생전에도 야사에 의하면 문안차 대비전에 들어온 인종에게 문정왕후 윤씨는 어린 경원대군을 옆에 앉혀 두고 "우리 모자가 전하의 손에 죽는 날이 멀지 않았소. 그려, 언제쯤 죽이려 하오?"하고 협박하듯이 따져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


인종이 죽고 친아들 명종이 즉위했는데 인종비 인성왕후가 살아있던터라 왕대비의 윗자리인 대왕대비로 올라갔고 섭정을 시작함. 섭정을 하며 자신의 남동생들을 통해 조정을 장악했고 조선 역사상 가장 강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음.


불교를 사랑하셨던터라 불교중흥정책을 적극적으로 피셨다고 해. 야사에는 명종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청 간섭했다. 아들 싸대기 때리고 회초리질도 했다 이러는데 실제론 명종이 성년이 되고 딱히 조정에 간섭하지도 않았고 늦은 나이에 낳은 오히려 아끼고 어하둥둥 귀한 내새끼라며 아끼던 아들이였음.


물론 워낙 섭정시절 영향력이 어마무시했던터라 조정신하들이 큰일을 논할때마다 대왕대비의 의견은 꼭 참고했다고 해. 실록에도 그녀가 아들 명종의 정책에 반기를 들거나 간섭한 기록도 없음.


그녀는 참 허망하게 돌아가셨는데 1565년 아들 명종이 손자 순회세자의 죽음에 충격이 컸는지 병에 걸림. 늦게 낳은 귀한 아들이 다 죽게 생겼는지 무당도 찾아가고 별짓을 다하다가 승려 보후가 "대왕대비께서 찬물에 목욕재계를 하시면 전하의 병이 쾌차하실겁니다"란 말을 했고


그 말대로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다가 심한 독감으로 63세 나이에 세상을 떠남. 엄청난 마마보이였던 명종은 어머니 살아생전 어머니 눈치로 외가에 큰 간섭을 못했으나 어머니 사후 본인 외가를 박살내버림. 외숙모 정난정, 외삼촌 윤원형이 대표적으로 작살나버린 경우였음.


문정왕후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유언에서 "주상이 이단(불교)을 박해하려거들랑 신하들 너희들이 좀 막으라"고 했는데, 정황상 명종이 불교를 신봉하려들어도 상황이 안좋던터라 그녀의 소망은 허망하게 무너짐(...)


사후 노원구에 있는 태릉에 안장되었는데 왕비의 무덤인데 능호가 클 태(泰) 자인 것을 보면 문정왕후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음. 크기도 웬만한 왕의 무덤보다도 더 큰편이야.


본래 문정왕후는 중종과 묻히고 싶어 중종의 능인 정릉을 장경왕후의 무덤 옆에서 선릉(중종의 아버지 성종의 능) 근처에다 이미 마련하였으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강 건너 북쪽인 태릉에 묻혔다고 해.



https://img.dmitory.com/img/201910/42M/hbf/42MhbfCgfKqmsGWus2ckQO.jpg


(10) 인성왕후 박씨 (인종의 왕비)


(1514년 10월 7일 - 1578년 1월 6일, 63년 2개월)


(10~30세 = 세자빈)

(30~31세 = 왕비)

(31~ 53세 = 왕대비)

(53~63세 = 왕대비)


인종의 왕비로 10세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입궁함. 남편 인종이 의붓시어머니 문정왕후와 사이가 안좋았고 본인도 딱히 사이가 좋았다는 기록은 없음. 슬하에 자녀가 없는데 인종이 다른 후궁들 사이에서도 자녀를 보지 못한걸로 봐서는 인종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음.


동궁전에 불이 났던 사건 당시 인종과 같이 동궁전에 있었고 밬에서 시아버지 중종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남편을 부축해서 나왔다고 하며 둘 사이는 좋았다고 해.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지만 일찌감치 단명하고 시동생 명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어 공의왕대비라는 호칭을 받았음.


온화한 왕비였지만 남편을 일찍 잃고 자식도 없었던 탓에 외롭게 살았고 본인은 물론 남편인 인종도 성격이 너무 착할 뿐만 아니라 효자였기 때문에 인종을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하며, 문정왕후도 이는 인정했는지 인종 사후 인종의 외가(윤임)를 숙청하면서 인성왕후나 인성왕후의 친정은 건들이지 않았음.


물론 인성왕후가 자식이 없었던 탓에,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야심을 품은 문정왕후와 맞설 입장이 아니었으니 굳이 숙청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음.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중종의 서손인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는데, 이미 대왕대비의 자리가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왕대비로 승봉되지 못하였는데 명종비 인순왕후와 항렬이 같다는 이유였다고 함, 그녀의 아래 동서인 명종비 인순왕후가 왕실 최고 여성의 입장으로서 선조의 수렴청정을 하였음.


말년을 정말 조용히 보내다가 1577년 63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 인종의 옆자리에 안장되었다고 함.




https://img.dmitory.com/img/201910/7my/TLP/7myTLPAFVKEcea4MEc8Gqs.jpg


(11) 인순왕후 심씨 (명종의 왕비)


(1532년 6월 27일 - 1575년 2월 12일. 42년 7개월)


(13~35세 =왕비)

(35~42세 = 왕대비)


조선 명종의 왕비로 13세 당시 간택되어 처음에는 부부인이였으나 얼마안가 시아주버니 인종의 의문사로 남편 명종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그녀 역시 왕비가 되었음. 서슬퍼런 시어머니가 건재했던터라 딱히 친정을 위해 영향력을 끼쳤거나 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음.


슬하에 외아들 순회세자가 있으나 세자는 12살에 요절했고 명종 사후 선조를 즉위시켰고 그 이후 1년간 대리청정을 시켰음. 대리청정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575년 42세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함. 노원구에 위치한 강릉에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1UJ/SaP/1UJSaPtiwg2ou0AiAKUsO6.jpg


(12) 공회빈 윤씨 (순회세자의 부인)


(1550년 ?월 ??일 - 1592년 4월 4일, 만 41~42세 사망)


(11~13세 = 세자빈)

(13~42세 = 덕빈)


정확한 생년은 미상이나 실록에 의하면 간택되었을 때 10세였다고 함. . 1561년 순회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으나 2년 뒤인 1563년에 순회세자가 서거하자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 덕빈이라고 불림.


선조 즉위 이후에도 궁에 살았고 대우는 중전 의인왕후와 동일하거나 좀 더 위였다고 하며 사실상 대우는 준 대비나 마찬가지였음. 임진왜란 직전 지병으로 급사했는데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상례를 준비하던중 전쟁이 터져버림.


선조와 신하들이 의주로 급히 피난을 가면서 어가가 벽제에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1593년에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을 때 찾지 못하였음.


어쩔수 없이 위패만을 순회세자와 함께 모셨다고 함.




https://img.dmitory.com/img/201910/5DT/yfM/5DTyfMBWFiYmGyu4Gs2yqk.jpg


(13) 인목왕후 김씨 (선조의 두번째 왕비)


(1584년 12월 15일 - 1632년 8월 13일. 47년 7개월)


(18~24세 = 왕비)

(24~34세 = 왕대비)

(34~39세 = 서궁)

(39~47세 = 대왕대비)


선조의 두번째 왕비로 18세 나이에 선조의 왕비로 간택됨. 당시에는 임진왜란 시기여서 혼기를 놓친 상황이였음. 선조의 왕비로 간택되어 정명공주, 영창대군을 차례로 낳았고 당시 세자이던 광해군을 위협하는 입지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녀의 입지가 흔들린건 남편 선조가 죽은 후부터였음. 24세 어린 나이에 왕대비가 된 그녀는 10년간 위태위태한 대비생활을 보내다가 친정이 박살나고 본인 역시 대비자리에서 폐위되고 아들은 처형되는 비극을 격게 됨.


전체적으로 특별할 것 없는 왕비였고 다만 명문가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세상물정 모르고 자라다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터라, 철이 너무 없어서 처신을 잘못한 점은 있었음.


선조의 총애를 반던 후궁 인빈 김씨이 처음에는 자기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암암리에 움직이다가 결국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후엔 재빨리 광해군으로 갈아타 관계를 개선했던 것과는 달리인목왕후는 처세술이 모자랐는데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선조에게 "왕자를 세자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대군으로 부를 것인지"를 물어보는 경솔한 짓을 했으며, 선조에게 부탁을 해서 무려 400여명에 이르는 궁녀들을 자신의 처소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로 만들었는데, 이 궁녀들 중에는 원래 광해군 처소에 있던 궁녀가 10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함.


또 영창대군을 마치 세자처럼 차려입히는가 하면, 친정 아버지인 김제남과 함께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 데 열중하여 눈총을 사기도 했고, 중궁전 소속 나인들이 동궁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음.


광해군 폐위되는 인조반정 당시 그 한이 깊었는지 "광해군부자를 씹어먹고싶다" 등등 몹시 분개하였고,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질이 유배지를 탈출했을때 인조에게 그를 처형할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하였음.


인조가 즉위하고 따지면 인조에게 그녀는 할머니뻘이여서 대왕대비로 봉승되었고 "소성대왕대비"로 불림. 편안한 말년을 보내다가 1632년 8월 여름 앓고 있던 지병이 초여름부터 심해지면서 불과 47세 나이에 세상을 떠남.


한마디로, 의붓 아들의 손에 친정 가문과 하나 뿐인 아들을 전부 잃고 겨우 살아남아 딸과 함께 모진 유폐 생활을 견뎌 다시 복권돼 일생을 왕실의 대왕 대비로 살았지만, 그토록 증오하던 의붓 아들보다 일찍 죽은 참으로 애석한 인생을 살았음.


사후 남편 선조가 묻힌 경기 구리의 목릉에 안장됨.




https://img.dmitory.com/img/201910/7EI/9xd/7EI9xdYjMQyGC64mOKCIiK.jpg


(14) 인헌왕후 구씨 (인조의 생모)


(1578년 4월 17일 - 1626년 1월 14일. 47년 7개월)


(15~44세 = 연주군부인)

(45~47세 = 계운궁)


인조의 친어머니로 정원군의 부인. 처음에 선조의 손자 정원군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으로 불리었고 아들 인조가 즉위하자 "계운궁"이라는 궁호를 갖고 궁에서 살게 되었음.


1626년 47세 나이에 사망했는데 아들 인조가 상주를 서지 못해 인조의 동생이 상주노릇을 대신했다고 해. 사후 1632년에 남편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함께 왕후로 추존되어 인헌왕후라 하였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7qI/5Y5/7qI5Y5kgXC22akKskmCgEW.jpg


(15) 장렬왕후 조씨 (인조의 2번째 왕비)


(1624년 12월 16일 - 1688년 9월 20일. 63년 8개월)


(14~25세 = 왕비)

(25~35세 = 왕대비)

(35~50세 = 대왕대비)

(50~63세 = 대왕대비)


인조의 2번째 정실왕후로 간택 당시 인조보다 25세나 연하였고 인조의 3아들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보다 나이가 어렸음. 그녀가 왕비였을때 궁중은 이미 후궁 귀인조씨가 꽉 잡고 있던터라 인조 역시 그녀에게 관심 없었고 20대 나이에 풍까지 앓은터라 거동 역시 불편했음.


정말 힘 없는 왕비였으나 의붓아들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로써 대우 받기 시작했으나 예송논쟁에 시달리고 상복 역시 7번이나 입는 등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기도 함.


인조 임종 당시 조귀인이 그자리를 지키고 있던터라 그녀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나 의붓아들 효종덕에 왕대비로 대우받았고 "자의왕대비"라는 호칭을 받음. 효종이 즉위 10년만에 죽은터라 36세 나이에 대왕대비가 되었는데 이는 조선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였음. 손주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공신대왕대비"란 존호를 받음.


워낙 나이차이 나는 남편과 산터라 증손주인 숙종과는 불과 37살 차이였고 이로 인해 4대왕(인조.효종.현종.숙종)을 거침. 숙종 즉위 이후 4대왕을 거쳤는데도 대왕대비자리에 있었는데 효종비 인선왕후가 이미 고인이였던터라 대비는 그녀와 손부인 현종비 명성왕후 둘뿐이였기에 그대로 대왕대비자리에 머뭄.


자식도 없었고 힘도 권세도 없던터라 숙종시절에도 뒷방신세였고 말년에 조카를 통해 궁녀한명을 들이고 딸처럼 아낌. 그 궁녀가 바로 희빈장씨임. 근데 손부인 왕대비 명성왕후가 그녀 허락 없이 장씨를 출궁시킴.


손자며느리한테도 밀리는 신세였던 장렬왕후는 손부인 명성왕후보다도 장수해서 명성왕후 사후 다시 희빈장씨를 입궁시켰고 1688년 고손자 경종의 탄생을 앞두고 63세 나이에 중풍으로 세상을 떠남.


사후 동구릉 안의 휘릉에 안장되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6uv/KMq/6uvKMqqj0QAQyOCecOgG0e.jpg


(16) 인선왕후 장씨 (효종의 왕비)


(1619년 2월 9일 - 1674년 3월 19일. 55년 1개월)


(14~25세 = 부부인)

(25~30세 = 세자빈)

(30~40세 = 왕비)

(40~55세 = 왕대비)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14세에 혼인해서 "풍안부부인"으로 불리었음.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8년간 심양에서 기거하였을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많이 뒷바라지를 하였고 그곳에서 현종을 낳았음.


시아주버니 소현세자가 죽고 남편이 세자가 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며,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인 봉림대군의 즉위로 왕비에 진봉되었으며 2년 후에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음.


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던 인선왕후는 효종과 더불어 검소한 생활을 하였는데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의 2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고. 이렇게 준비된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에 사용되었음.


하지만 효종이 죽으며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실권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왕대비인 그녀는 실권에서 멀어져버림. 효종이 죽고 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효숙왕대비"로 봉승됨.


인선왕후는 죽기 2년 전부터 병으로 투병하였는데, 이 병의 원인은 시아버지 인조, 남편 효종이 승하했을 때 너무 심하게 곡을 하는 바람에 얻은 병이라고 전해짐. 거기에다가 뇌졸증이 겹쳐서 왼손을 아예 사용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실제로도 매우 건장한 체격을 가졌다고 전해짐.


그녀가 죽었을 때는 인조의 계비로써 자신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었던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던 상황이라 남편인 효종의 사망 이후 문제되었던 예론이 또다시 불거졌고, 결국 인선왕후의 사망은 제2차 예송논쟁의 시발점이 되었음.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로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가 딸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지칭한 일이 있었는데, 본래 왕의 자녀는 후궁보다 품계가 높아서 생모라고 하더라도 반말을 할 수 없었음. 이 일을 두고 효종이 안빈 이씨에게 큰 벌을 내리려 하자, 인선왕후가 한사코 말려서 겨우 넘어간 일이 있었으며


효종과 인선왕후 내외가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는 자리가 있었는데 효종은 중전의 눈치가 보여 정실 소생 자녀들에게만 선물을 주고 숙녕옹주는 그냥 넘어갔는데, 인선왕후가 따로 숙녕옹주를 불러서 선물을 주었다고 함.


사후 남편 효종이 묻힌 영릉에 안장되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25s/meH/25smeHxfwY2K2AyM2MugE6.jpg


(17) 명성왕후 김씨 (현종의 왕비)


(1642년 6월 13일 - 1684년 1월 21일. 41년 7개월)


(9~17세 = 세자빈)

(17~32세 = 왕비)

(32~41세 = 왕대비)


조선에서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남편인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왕비가 되고 왕이 죽은 뒤 자신의 친아들이 즉위하여 대비가 된 전형적인 왕후의 삶을 산 왕비로 알려짐.


9세 나이에 세자빈이 되었고 매우 천재적인 머리를 지냈고 덕분에 아들 숙종. 손자 영조. 고손자 정조까지 이 dna가 전해짐. 하지만 성격이 매우 다혈질로도 유명했고 아들 숙종도 엄마의 성격은 닮아서 엄청 다혈질이였다고 함.


아들인 숙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에 오르면서 조정의 일에 자주 간섭하여 남인들의 비난을 샀으며 시숙 인평대군의 세아들이 아들 숙종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 판단하여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모함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홍수의 변임.


이 때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전까지 와서 통곡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이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 때 총대를 매고 삼복(인평대군의 아들들)을 탄핵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복과 반대 당파에게 무고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서 이랬던 것임.


또한 시할머니 자의대왕대비(장렬왕후)가 아끼던 궁녀 희빈장씨를 출궁시키기도 했고 왕대비로써 실권이 매우 강력했다고 함.


숙종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평소 무속 신앙을 신봉했던 명성대비는 숙종의 무사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는데, 무당이 왕의 쾌유를 위해서는 "왕의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벌을 서야 한다"고 계시를 내림.


이에 명성왕후는 무당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아들여 혹독한 겨울 날씨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지독한 독감을 얻어 41세 나이에 세상을 떠남.


경기 구리시 남편이 묻힌 숭릉에 같이 안장되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5wR/4vF/5wR4vF3fRCAyGG4eQ8Esyq.jpg


(18) 인원왕후 김씨 (숙종의 마지막 왕비)


(1687년 11월 3일 - 1757년 5월 13일. 69년 5개월)


(15~33세 = 왕비)

(33~37세 = 왕대비)

(37~69세 = 대왕대비)



15세 나이에 26살이나 많은 숙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함. 의붓아들 경종은 그녀보다 1세연상(...) 영조는 불과 6세 어린 나이였음.


궁생활 당시 엄격한 궁중 생활, 장난아니게 까다로운 나이 많은 남편, 나이 차이 별로 안 나는 의붓 아들들 사이에서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던 것 같음. 입궁하자마자 1년 만에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종기, 피부병, 전염병 등 이런 저런 병을 달고 살았음.


입궁한지 7년 만에 소박 맞고 경덕궁으로 쫓겨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와 비교하면 그렇다고 딱히 숙종과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그냥 존재감 없는 왕비로 있는 듯 없는 듯 무난히 살았던 것으로 여겨짐.


숙종 사후 의붓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경종이 후사가 없던터라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심. 당시 왕실에는 인원왕후보다 윗대의 대비들이 없었기에 34살의 젊은 나이에 왕실 최고 서열이 된 것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당시 경종의 부인 선의왕후가 생존했던탓에 대왕대비로 봉승되었고 영조 시절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고 함. 영조가 즉위한 후에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와 더불어 영조와 사도세자의 대립이 격화될 때 두 사람의 중재를 하려 애를 썼고 사도세자를 무척 아꼈다고 함. 하도 그녀가 사도세자한테 이것저것 먹여서 세자가 뚱뚱해졌다고 영조가 불평했을정도임.


온후하면서도 심지 강한 성격이였는데 인원왕후는 어려서 일찍 궁에 들어와서 그런지 왕실의 법도를 엄하게 가르쳤음. 일례로 대천록에 따르면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가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함부로 대들었는데. 당시 궁중 예법상으로 세자의 어머니에게 해서는 안 될일이었였음. 인원왕후는 이를 알고 노발대발하여, 세자와 영빈 앞에서 숙의 문씨의 종아리를 때렸다고 함.


그랬던 그녀는 1757년 69세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사후 서오릉의 명릉에 숙종과 함께 안장되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2br/IYK/2brIYK9XyoI2GwGMG4ws2y.jpg


(19) 선의왕후 어씨 (경종의 왕비)


( 1705년 12월 14일 - 1730년 8월 12일, 24년 7개월)


(13~15세 = 세자빈)

(15~18세 = 왕비)

(18~24세 = 왕대비)


만 13세 나이에 본인보다 17살이나 많은 세자 경종과 혼례를 올렸고 세자빈이 되었음. 2년뒤 숙종이 죽고 남편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음.


종 1년, 경종 부부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하여 노론 4대신과 왕대비 김씨(인원왕후)의 강력한 추진으로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을 때, 선의왕후의 나이는 갓 17세에 불과했어.


일설에 따르면 연잉군을 반대하여 종실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혹은 밀풍군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하였으나 경종의 급서로 실패하였다고 함.


시동생 영조가 즉위하고 불과 18세 나이에 왕대비가 된 이후 시동생 영조, 의붓시어머니 인원왕후와 잦은 갈등을 보였고 왕실행사를 대놓고 불참하는 등 갖은 갈등을 보여줌. 영조 2년에는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에서 지냈음.


효장세자 독살 사건에 배후로 추정되는데 당시 세자를 독살한 궁인이 왕대비 어씨를 끌어들이기도 했고 이인좌의 난 당시에선의왕후가 이인좌 등에게 비밀리에 언문교서를 내렸는데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 잡아라"는 하교를 내렸다고 전해짐.


1730년 24세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선의왕후를 죽음으로 이끈 병명은 밝혀지진 않았으나 실록에서 왕후가 죽기 전날의 기록을 보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떨며 통곡을 하고 읍성(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을 냈다고 함. 또한 손으로 뭔가를 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영조가 의관들에게 그러한 증후를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중관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고 기록됨.


선의왕후가 사망한 이유는 지문에 기록된 대로 오랜 지병을 앓아서가 아니라, 죽기 약 4개월 전인 1730년 4월 15일에 발생했던 영조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어조당에 유폐되자 분개하여 식사를 거부한 끝에 아사한 것이라는 야사도 있음.


사후 시동생 영조는 대놓고 엿맥이듯이 장례를 엄청 간소히 했고 후궁 이씨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를 위해 큰 잔치를 벌이기도 함. 선의왕후는 남편 경종 옆자리에 안장되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6aA/D6F/6aAD6FsGd28GaaqgeWOUCk.jpg


(20) 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왕비)


(1745년 12월 2일 - 1805년 2월 11일. 59년 2개월)


(13~30세 = 왕비)

(30~54세 = 왕대비)

(54~59세 = 대왕대비)


만 13세 나이에 53년 터울의 영조와 혼인하였음. 말이 53년이지 정순왕후의 조부보다 영조가 더 나이가 많았음. 의붓아들 사도세자와 실제 사이는 나쁘지도 않고 그냥 그럭저럭이였는데 당시 정순왕후는 너무 어렸고 사도세자에 세손인 정조도 있던터라 그녀가 영향력을 부릴 위치도 아니였음.


남편이 죽고 30세 나이에 왕대비가 되었는데 의붓손자 정조와 사이는 나름 괜찮았다고 전해지며 되려 크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쪽에 속했으며, 지금 봐도 크게 정도에 벗어나는 정치를 하지 않은 쪽에 속했음.


정조 사후 의붓증손자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써 섭정을 했는데 이때 의붓며느리 본인보다 10세 연상인 혜경궁 홍씨와 큰 갈등을 빛기도 했고 천주교를 강하게 탄압한 신유박해를 저지르기도 했음.


수렴을 거두고 얼마되지 않아 1805년 59세 나이에 갑자기 급사했고 사후 영조와 함께 원릉에 안장됨.



https://img.dmitory.com/img/201910/4t9/CA1/4t9CA1mZ1uyycw62ka86sE.jpg


(21) 헌경왕후 홍씨 (장조, 사도세자의 정실부인)


(1735년 8월 6일 - 1816년 1월 13일. 80년 5개월)


(9~26세 = 세자빈)

(27~40세 = 혜빈)

(40~80세 = 혜경궁)


1744년 9살의 어린 나이로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혼인하였다. 명목상 간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초간택 때 이미 대왕대비인 인원왕후, 왕비인 정성왕후 등 높으신 분들을 뵙고 궁인들이 홍씨가 괴로워할 정도로 그녀를 안으려 다툰 것을 보아, 간택 전에 이미 그녀는 세자빈으로 낙점이 되었던 듯함.


세자빈 시절 2남2녀를 낳았고 그 이후 시아버지와 남편의 갈등을 지켜보다가 결국 남편이 뒤주에 갖혀죽는걸 보게 됨.


한때는 사도세자가 광증 때문에 궁녀들을 마구 살해하자, 시어머니 영빈 이씨에게 가서 같이 울면서 의논했는데, 영빈이 영조에게 이야기하는 게 어떻냐고 묻자 대경실색하면서 왕에게 세자를 헐뜯은 걸 세자가 알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뜯어말렸다는 이야기가 있음.


사도세자 사후 혜빈으로 책봉되어 잠시 사가에 나가서 살다가 정조와 함께 궁에 들어왔고 그녀는 창덕궁에 정조는 경희궁에 지내게 되었고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혜경궁"이라는 궁호를 받았고 자궁(慈宮)이라 불리게 됨.. 전통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국왕의 적모를 일컫는 칭호는 자전(慈殿)이었음. 그러나 홍씨는 왕의 어머니이자 왕실 여인 중 가장 연장자였지만 홍씨의 살아생전에 사도세자가 국왕으로 추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왕대비가 되지 못했음.


실질적으로는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보다는 낮고 중전 효의왕후 김씨보다는 높은 대우를 하여 결과적으로 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는데 정조 사후 시어머니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남동생 홍낙임이 처형되기도 했음.


정순왕후가 죽고 9년뒤인 1814년 친정이 복권되었고 다음해인 1815년 80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10년전인 1805년부터 담현증(협심증)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워있었음. 사후 남편 사도세자가 묻힌 용릉에 안장됨.




https://img.dmitory.com/img/201910/2sR/a2f/2sRa2frUOqqKGGaS4g8Wyw.jpg


(22) 효의왕후 김씨 (정조의 왕비)


(1754년 1월 5일 - 1821년 4월 10일. 67년 3개월)


(8~22세 = 세손빈)

(22~46세 = 왕비)

(46~67세 = 왕대비)


만 8세이던 1762년 세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얼마안가 시아버지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으로 죽고 영조가 혜경궁 홍씨와 효의왕후에게 제각기 친정으로 가라고 명하였으나, 효의왕후는 자신의 친정으로 가지 않고 시어머니와 함께 있기를 원하였음. 그러자 영조가 그 말을 듣고 매우 착하게 여기어 같이 혜경궁 홍씨의 친정으로 가라고 허락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들어오라고 명함.


정조와의 금술은 그렇게 좋지 않았고 왕비가 된 이후 한차레 상상임신을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와있음. 자식이 없던터라 후궁이 낳은 아들 순조를 양자로 입적시켜 세자로 삼았으며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공순하고 검소하였고, 효심이 깊었다고 함. 어렸을 적에는 어떤 아이가 자라나는 풀을 뽑고 있는 것을 말릴 정도로 심성이 고왔다고 전해짐.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는데 여러차레 존호를 올리는걸 다 거절했음. 아마 시어머니 혜경궁을 의식해서였을것임.


1815년에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시어머니 혜경궁을 직접 간병하였고 그 이후에는 손주인 세자 (효명세자, 익종)을 보는 낙으로 살다가 1821년 67세 나이로 사망해서 정조가 묻힌 건릉에 안장되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645/VLm/645VLmXPEY2M6K0awQIm00.jpg


(23) 현목수대빈 박씨 (정조의 후궁, 순조의 생모)


(1770년 8월 8일 - 1822년 12월 26일)


(17~30세 = 수빈)

(30~52세 = 가순궁)


정조의 간택후궁으로 순조의 생모 조선 역사상 아들의 치세를 누린 유일한 후궁이였음. 17세 나이에 삼간택을 거쳐서 최종간택되어 수빈으로 책봉되었음.


후궁이 되기전 그녀의 집안은 노론 명문가였으나 그녀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고, 부친인 박준원은 그녀가 입궁하기 몇 달 전에 과거에 합격하였기에 평탄한 유년생활을 보내지는 않았음.


슬하에 순조와 숙신옹주를 낳았고 순조를 낳은뒤부터는 사실상 세자의 생모로써 중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지만 매사에 겸손한 성품이였다고 해.


어질고 온화한 성품에 검소한 생활을 하여 정조는 수빈을 어진 빈[賢嬪]이라 부르며 총애했고, 수빈의 처소 집복헌과 가깝게 위치한 영춘헌에 머물렀음. 정조 사후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가순궁"이라고 불리었고


시할머니 정순왕후는 명색이 왕의 생모인데 대우를 높여야 한다고 해서 중전인 순원왕후보다는 위, 왕대비인 효의왕후보다는 낮게하여 내명부 의전 순위는


정순왕후 - 효의왕후 - 혜경궁 - 가순궁 - 순원왕후 순서가 되었음. 또한 그녀의 딸 숙신옹주 역시 공주 - 옹주 나이 직위를 만들어서 주자는 의견을 펼치기도 함. 순조 즉위 후에도 시할머니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시어머니 혜경궁, 왕대비 효의왕후에게 하루 3차례 문안하였음. 아랫 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복식과 그릇은 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상시 말수가 적었다고 해.


사망하기 전년 늦가을에 갑자기 풍담(중풍) 증세가 생겼는데 얼마 후에 조금 차도가 있었지만. 병환이 차츰차츰 더 심해져 일어나지 못했고 1822년 52세 나이에 사망했어.


순조는 친어머니 장례를 왕비에 준하는 예로 치르었고 반대하는 신하들은 죄다 유배 보내버렸다고 함.





https://img.dmitory.com/img/201910/HD8/egC/HD8egCqVIy8se6mioGmqO.jpg


(24) 순원왕후 김씨 (순조의 왕비)


(1789년 6월 8일 - 1857년 9월 21일, 68년 3개월)


(13~45세 = 왕비)

(45~60세 = 대왕대비)

(60~68세 = 대왕대비)


순조의 왕비로 정조가 승하하기 이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힘있는 집안 안동김씨 집안의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낙점했는데 그 딸이 바로 순원왕후였어.


근데 정조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바람에 3년상이 다 지난 1802년 13세 나이에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했는데 초년에는 시어머니 2명(수빈박씨,효의왕후). 시할머니(혜경궁). 시증조할머니(정순왕후)까지 층층시하에서 맘고생을 많이 했는지 병치례를 많이 했다고 해.


슬하에 효명세자와 3명의 공주를 낳은걸보면 남편과의 사이는 좋은편이였음. 그러던 중 효명세자가 만 20세에 요절하고 남편 순조는 그 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했고 순조 사후 세손인 헌종이 즉위했는데 즉위당시 만 7세였기에 조모인 그녀가 수렴첨정을 했어.


그녀는 손자가 즉위하자 마자 아들 효명세자를 "문조"로 추존했고 본인은 왕비에서 대왕대비로 올라갔으며 효명세자빈 조씨는 왕대비로 올라가게 됨.


헌종이 이후 친정을 할 때 친위군을 강화하고 친정 안동 김씨를 내치자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며 헌종과 갈등 관계가 심했짐. 순원왕후 언문 어찰에서는 그가 헌종이 죽기 며칠 전엔 손자를 폐위하기를(!) 바랐고, 그가 죽자 '거리 낄 것이 없어서 속 시원하다'(!!)고 여겼다는 대목도 있어.


실제로 실록에서만 해도 죽은 헌종에 대해 '남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이 많으며, 시기심이 강하다'고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처음엔 헌종을 아꼈지만, 이후로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어린 손자로밖에 생각하지 못한 모양임.


어쨌든 헌종이 그녀의 섭정 이후 친정을 시작하고 얼마 안가서 21세 나이에 죽자 강화도에서 먼 종친을 자기와 남편 순조의 양자로 삼아 즉위시키는데 바로 철종임(....)


즉위 당시 왕실에는 남편 없는 왕비가 3명이였는데 순조비 순원왕후. 효명세자빈 신정왕후. 헌종비 효정왕후였음. 결과적으로 "왕비 - 왕대비 - 대왕대비"였던 기존의 구도를 "왕비 - 대비 - 왕대비 - 대왕대비"라는 4단계로 내명부를 개편함.


철종이 즉위하고 또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으며 3년간 섭정을 한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안좋아지더니 투병 4년만에 만 68세 나이로 사망했고 남편 순조 옆자리에 안장되었다고 해.


성격은 굳세고 유약한 남편 순조 대신 강단있는 여장부성격이였으나 슬하 딸 3명과 아들 효명세자까지 다 본인보다 먼저 죽고 손자까지 먼저 보낸뒤로는 매우 쓸쓸해하기도 했다고 전해짐.





https://img.dmitory.com/img/201910/66A/yYu/66AyYu6oJa0KGGK220mQay.jpg


(25) 신정왕후 조씨 (효명세자, 문조의 부인)


(1808년 1월 21일 - 1890년 6월 4일, 82년 4개월)


(11~22세 = 세자빈)

(22~26세 = 효빈)

(26~41세 = 왕대비. 아들 헌종시절)

(41~51세 = 왕대비. 시동생 철종시절)

(51~55세 = 대왕대비. 시어머니 순원왕후 사후)

(55~82세 = 대왕대비. 고종 즉위기간 당시)



11세 나이에 1세 연하의 효명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으며 만 19세에 아들 헌종을 낳았음. 하지만 남편이 불과 만 20세에 요절했고 불과 태어난지 32개월인 아들 헌종과 홀로되었음.


세손의 생모였던터라 궁에 남아 살았고 시아버지 순조가 죽고 아들이 즉위하자 남편이 왕으로 추존되며 빈에서 바로 왕대비 신분으로 봉승되었어. 하지만 섭정은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했고 아들 헌종마저 일찌감치 21세 나이에 요절하면서 권력에서는 뒷방신세가 됨.


아들 사후 시어머니 순원왕후. 본인. 며느리 효정왕후까지 있던터라 대왕대비가 아닌 그대로 왕대비 자리에 있었고 며느리 효정왕후(헌종비)는 왕대비 아래 만들어진 대비자리에 봉해짐.


법적인 시동생 철종 (순조,순원왕후의 양자로 봉해짐) 재임기간 중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승하하고 궁중에 대비는 그녀와 며느리 효정왕후뿐이여서 왕대비에서 대왕대비로 승격하게 되었음 (효정왕후는 대비에서 왕대비로 승격됨)


그러던 중 철종 역시 후사없이 사망하자 흥선군의 아들을 남편 문조와 본인의 양자로 입적시켜 즉위시키는데 그가 바로 고종임. 대왕대비 자격으로 단기간 섭정을 했다고 해.


당시에도 궁중에는 3대비 (문조비 신정왕후. 헌종비 효정왕후. 철종비 철인왕후)가 계셔서 대비들의 서열을 대비 - 왕대비 - 대왕대비 순서로 나누었다고 함.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아버지이자 시아버지를 내쳤다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은 대원군이 아닌 신정왕후의 아들 및 며느리라는 걸 궁궐 내외에 보여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신정왕후를 매우 극진히 모셨다고 함.


자식이 없던터라 고종의 아들 순종과 의친왕, 완친왕을 아꼈고 매우 장수해서 갑신정변 당시에는 궁녀들에게 업혀서 피신을 가기도 했음. 사망 당시 나이는 만 82세로 조선 왕비들중 가장 장수한 기록을 세웠다고 해.




https://img.dmitory.com/img/201910/6BV/0U0/6BV0U0pgGs4uyC8O2Gk2sA.jpg


(26) 효정왕후 홍씨 (헌종의 2번째 왕비)


(1831년 3월 6일 - 1904년 1월 2일, 72년 9개월)


(13~18세 = 왕비)

(18~26세 =대비)

(26~32세 = 왕대비. 시할머니 사후 ~ 고종즉위까지)

(32~63세 = 왕대비, 고종재임 당시)

(63~66세 = 왕태후, 갑오개혁 당시기간)

(66~72세 = 황태후. 대한제국 건국 이후)


헌종의 2번째 왕비로 헌종의 첫 왕비 효헌왕후 사후 간택되어 입궁했어. 하지만 당시 헌종은 궁녀들과 후궁 경빈김씨를 총애하여 딱히 사랑받지 못했고 헌종이 불과 5년만에 죽는 바람에 18세에 홀로 되었는데


당시에는 선선선대 왕비 시할머니 순원왕후, 선선대 왕비 시어머니 신정왕후에 선대왕비인 본인까지 남편죽은 왕비가 3명이나 있어서 왕대비 아래 대비자리를 만들어서 18세 나이에 대비가 되었어.


너무 어린 나이였고 층층시하 시어머니,시할머니까지 계셔서 권력을 얻지 못함.


새로 즉위한 철종은 법적으로 시조부모 순조,순원왕후의 양자여서 그녀에게는 시숙이 되지만 그녀는 대비였기에 늘 문안을 받았다고 해. 시할머니 순원왕후가 사망하자 궁중에 대비는 그녀와 시어머니 신정왕후 둘뿐이였기에 둘 다 한단계식 승격되어 시어머니 왕대비 신정왕후는 대왕대비로 올라갔고 그녀는 대비에서 왕대비로 승격되었어.


문제는 철종이 죽으면서 생김. 철종이 죽자 철종비 철인왕후와 그녀의 서열문제인데 법적으로 철인왕후는 순조,순원왕후의 며느리로 효정왕후에게는 시숙모임. 그래서 서열을 철인왕후가 더 높게할지 그녀를 더 높게할지를 두고 의견이 생겼는데 조정에서 의견은


신정왕후와 철인왕후를 대왕대비로 정하고 효정왕후를 그대로 왕대비로 두자는 의견


신정왕후를 대왕대비로, 효정왕후를 왕대비로, 철인왕후를 대비로 두자는 의견


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를 싫어했고 만일 동서 철인왕후가 본인과 같은 대왕대비 자리에 있으면 권력에 영향을 받을수도 있다는 시어머니 신정왕후의 뜻에 의해 효정왕후의 서열이 철인왕후보다 높게 되어


대왕대비 신정왕후(문조비) - 왕대비 효정왕후(헌종비) - 대비 철인왕후(철종비) 순서로 나누어짐.


문조,신정왕후 양자자격으로 즉위한 고종과는 법적으로 형수와 시동생 사이였지만 나이차이는 거의 모자지간이였기에 사이는 좋았으며 시어머니 신정왕후 사후에는 궁중에 선왕의 왕비는 본인뿐이였기에 그대로 왕대비 자리에 있게됨.


갑오개혁 이후 조선이 자주국이 되며 왕대비에서 왕태후로 불리었고 대한제국 이후에는 황태후로 책봉되어 "명헌태후"로 불림. 20세기에도 생존하여 을미사변을 지켜보았고 말년에는 덕수궁으로 피신하여 여생을 보내게 되었음.


1904년 1월 2일 72세 나이에 고혈압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남편 헌종 우측자리에 안장됨.





https://img.dmitory.com/img/201910/7CS/qEE/7CSqEEdDI4Y0CeKss6Mgce.jpg


(27) 용성부대부인 염씨 (철종의 어머니)


(1793년 7월 20일 - 1863년 3월 25일. 69년 8개월)


전계대원군의 소실로 철종의 생모인 인물. 남편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이 상계군 사건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사건 등에 연루되어으므로 작위를 받지 못했음. 철종이 즉위한 뒤 남편이 전계군의 작위를 받은 뒤 다시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되면서 1849년(철종 즉위년)에 용성부대부인에 봉작되었음.


그 뒤 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863년 30년 가까이 앓은 소갈증(당뇨)로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아들 철종도 세상을 떠나게 됨. 사후 남편 전계대원군 옆자리에 안장되었음.




https://img.dmitory.com/img/201910/Tkd/SP6/TkdSP6b14qUssmgUO0Gia.jpg


(28) 철인왕후 김씨 (철종의 왕비)


(1837년 4월 27일 - 1878년 6월 12일. 41년 1개월)


(14~26세 = 왕비)

(26~41세 = 대비)


14세 나이에 6세 연상의 철종과 혼인했고 당시 안동김씨 집안의 대빵(...)이던 순조비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의중이 깊었을것으로 추정됨. 21세 나이에 원자 용준을 낳았으나 태어난지 6개월만에 죽었고 5년뒤 남편 철종도 사망했어 (만일 원자 용준이 장수했으면 이때 5살인데 고종대신 얘가 왕이 되고 동서 신정왕후가 섭정했을수도.....)


철종이 죽고 손윗동서 신정왕후에 의해 고종이 즉위했는데 이때 법적으로 조카며느리인 왕대비 효정왕후와 그녀를 두고 누구를 더 높게할지 서열싸움이 벌어졌지만 그녀는 아예 밀려서 조카며느리보다 더 아래인 대비자리에 봉해짐.


그녀는 단지 가문의 이해를 위해 간택되었을 뿐, 정작 철인왕후 본인은 단 한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음. 오히려 말수가 적고 기분의 좋고 나쁨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와 왕대비 효정왕후를 극진히 대했다고 함.


철종의 많은 후궁들을 잘 대해줬다고 하며 고종 즉위 이후 정말 조용히 지내다가 1878년 41세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서 남편 철종의 옆자리에 안장됨.




https://img.dmitory.com/img/201910/7uW/ixs/7uWixsajJKiQGWCUwMUwsS.jpg


(29) 여흥부대부인 민씨 (고종의 어머니, 흥선대원군의 부인)


(1818년 2월 3일 - 1898년 1월 8일. 79년 11개월)


13세 나이에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혼인했고 처음에는 현부인으로 불리다가 이하응이 흥선군이 되면서 "군부인"으로 봉작되었어.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녀의 둘째아들이 왕으로 즉위한 이후 "부대부인"이라는 봉작을 얻게 되는데 그녀의 며느리 명성황후는 12촌 자매사이였다고 함.


남편 흥선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와 사이가 최악이였던반면 그녀는 사이가 괜찮았는지 임오군란 당시 며느리가 안전하게 피신하는걸 돕기도 했고 이 일로 남편과 사이가 잠시 나빠지기도 했다고 해.


천주교 신자였고 1863년 아들이 왕이 되자 운헌궁에서 감사미사를 올렸다고 함. 몹시 오래 살아서 을미사변 이후까지 살았고 1898년 만 79세 나이에 운헌궁에서 남편 흥선대원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음.


대한제국 이후 흥선대원군이 대원왕으로 추존된 이후 그녀 역시 "순목대원비"로 추존되었다고 해.





https://img.dmitory.com/img/201910/6FE/BRe/6FEBRemBEcMsGY8mqmskS4.jpg


(30) 순정효황후 (순종의 2번째 황후)


(1894년 9월 19일 - 1966년 2월 3일. 71년 4개월)


(12~13세 = 황태자비)

(13~16세 = 황후)

(16~32세 = 이왕비)

(32~71세 = 이왕대비, 명목상 호칭)


순명효황후 사후 12세 나이에 황태자비로 간택되어 입궁하게 되었는데 아버지 윤택영은 사위보다 2살 아래였고, 세간에서는 아버지 욕심에 어린 생과부를 만든다며 태자비를 동정했다고 함.


20세 연상의 남편 순종과의 사이는 자식만 없을뿐 원만했으며 1907년 남편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음. 시어머니인 명성황후가 무속을 신봉하여 궁에서 굿판을 벌렸던 반면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무속을 멀리했다고 해.


하지만 황후가 된지 5년도 안되서 경술국치가 일어나는데 이때 옥새를 뺐기지 않으려고 치마속에 옥새를 감추고 있었으나 그녀의 숙부인 윤덕영에 의해 옥새를 뺐기었고


나라가 망하며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으로 강등되자 그녀 역시 이왕비로 불리게 되었고 순종이 사망한 이후에는 이왕대비라고 불리게 됨. 1926년 순종 사후 "나라도 잃고 남편도 잃었는데 단청을 입힌 집에서 살수 없다" 하여 대조전에서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욺기게 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후 순정효황후는 정부 수립 기념으로 수립 기념식에 참석하고자 도쿄에서 날아온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청옥으로 된 화병 하나를 선물해 주었는데


새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구황실을 매우 싫어했고 6.25 당시에는 서울에서 공산주의 인민군들에 의해 납북될 위기를 맞기도 했고 전쟁 이후에도 서울에 못오다가 박정희 집권이후 다시 낙선재에 돌아옴.


당시 tv에서 가수들이 춤추고 노래하는걸 보고 상궁들이 망측하다고 눈을 가렸던 반면 " 시대가 바뀌면 사람이 시대에 맞추어야 한다"라는 마인드를 가졌다고 함.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대지월(大智月)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또한 피아노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었다고 전해짐. 김명길 상궁의 회고록 <낙선재 주변>에 의하면 피아노 강습은 1주일에 한번씩 받았는데, 양손을 엇갈려가며 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지만 순종이 승하한 후에는 피아노 강습을 그만두고 오직 불경만을 읽으며 지냈다고 술회함.


고종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아침에는 커피와 케이크를 자주 즐겼다고 전해지며. 후일 황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만년에 쓰기 시작한 토스터와 커피포트를 부장품 중 하나로 관에 넣었다고 해.


1966년 71세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장례를 국장으로 치루었다고 함.





정리하면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살아생전 대비라는 작호를 받은 인물은 22명임. 22명의 대비들중 대왕대비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은 10명 (3대왕을 거친 효정왕후까지 포함하면 11명)


살아생전 아들이 왕이 된걸 본 후궁은 1명(수빈박씨). "빈"의 신분이였지만 대우는 대비급이던 인물 1명(공회빈) 등등이 있음.
  • tory_1 2019.10.02 10:52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 2019.10.02 10:55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3 2019.10.02 11:17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4 2019.10.02 11:26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0/08/02 08:19:52)
  • tory_5 2019.10.02 11:30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6 2019.10.02 12:01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7 2019.10.02 12:54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8 2019.10.02 13:13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8 2019.10.02 13:13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9 2019.10.02 14:02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0 2019.10.02 14:12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1 2019.10.02 14:17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2 2019.10.02 16:12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3/10 21:21:25)
  • tory_13 2019.10.02 16:35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4 2019.10.02 17:02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5 2019.10.02 17:34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6 2019.10.02 17:53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7 2019.10.02 19:58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8 2019.10.02 21:44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19 2019.10.03 00:10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0 2019.10.03 00:31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1 2019.10.03 01:53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2 2019.10.03 11:06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3 2019.10.03 17:47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4 2019.10.03 23:51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5 2019.10.04 04:21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6 2019.10.04 11:46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7 2019.10.07 17:45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8 2019.10.09 19:39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29 2019.10.20 21:06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30 2019.11.16 05:24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19/12/18 05:38:55)
  • tory_31 2019.12.27 13:45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32 2020.02.17 11:22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33 2022.06.20 10:19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조회
전체 【영화이벤트】 <링> 나카다 히데오 감독 작품 🎬 <금지된 장난> 구마 시사회 6 2024.05.21 323
전체 【영화이벤트】 여성 공감 시사회 🎬 <다섯 번째 방> 시사회 4 2024.05.21 941
전체 【영화이벤트】 이주승 X 구성환 찐친의 카자흐스탄 힐링 여행기! 🎬 <다우렌의 결혼> 무대인사 시사회 39 2024.05.17 4088
전체 디미토리 전체 이용규칙 2021.04.26 577219
공지 [식음료] 게시판 신설 OPEN 안내 🎉 2022.09.03 444244
공지 도토리숲 규칙 125 2018.05.19 559304
모든 공지 확인하기()
475 주거 아파트 리모델링 공부 어떻게 하니?? 30 2019.10.11 1538
474 취미 토리들만에 소소한 스트레스 푸는 법 있으면 공유해보자.! 57 2019.10.08 1600
» 역사 조선왕실에서 대비였던 왕비나 그에 준하는 위치에 있던 여인들 34 2019.10.02 6400
472 육아 자꾸 젖젖거리는 거랑 내 이름 없어지는 거 넘 싫음 70 2019.09.30 3788
471 육아 잊기 전에 쓰는 임신 후기 17 2019.09.30 1734
470 역사 조선시대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차이와 관계 22 2019.09.29 4563
469 육아 혹시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되면 많이 힘들까? 67 2019.09.28 3354
468 취미 글 쓰는데 스크리브너(scrivener) 진짜 신세계다 16 2019.09.19 2477
467 취미 할머니가 글쓰기 연습을 시작하셨는데 토리들아 한 번씩만 봐줘❤ 34 2019.09.12 1995
466 취미 타블렛 논쟁으로 보는 붕당정치(그림톨이라면 백배공감할) 44 2019.09.11 2365
465 주거 각자 사는, 살았던 동네 어땟는지 말해보자 62 2019.09.10 1983
464 취미 쇼핑을 좋아하는데 방치하던 토리가 추천받은 다큐멘터리 <소비는 감정이다> 78 2019.09.10 10898
463 다큐/교양 페미니즘, 성평등교육용으로 좋은 ☆영상☆ 있을까? 9 2019.09.09 771
462 취미 국악기 유랑기 19 2019.09.07 673
461 역사 요즘 한국사 공부하는데 우리나라 현재랑 너무 똑같아서 신기해.. 9 2019.09.03 1416
460 취미 서울토리들 중에 혼자 잘 돌아다니는 톨들 있어? 66 2019.08.30 6929
459 취미 요가원 고르는 소소한 팁? 15 2019.08.28 1116
458 육아 아가한테 엄마뱃속에서 뭐했냐고 물어봤어ㅋㅋㅋ 44 2019.08.28 3731
457 취미 변방의 장르작가톨이 소설 가독성 끌어올리는 법. 18 2019.08.28 2669
456 육아 우리 아들 혹시 자폐일까?? 51 2019.08.26 9862
목록  BEST 인기글
Board Pagination 1 ...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 55
/ 55

Copyright ⓒ 2017 - dmi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