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숲

우리 의사, 박에스더 <1>

https://www.dmitory.com/forest/102264292                   








안녕 토리들! 잘 지내고 있니?

여성의사 박에스더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어! 댓글 달아준 토리들 너무 고마워!

그리고 한 토리가 댓글에 여성 과학자 관련 도서에서 박에스더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본 적 있다고 댓글 달아줘서 너무 반가웠어.


그 책과는 조금 다른 시각의 글이라는 토리의 말대로, 나는 과학자 박에스더보다는

19세기말~20세기초를 살아가던 조선 여성으로서의 박에스더의 삶,

그리고 당시 에스더 주변의 배경이나 사람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졌을거야.





자, 그러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1894년,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홀은 선교를 위해 평양에 있었어.

로제타는 윌리엄과 같이 평양 선교 책임자로 임명된 터라 윌리엄과 같이 가고 싶었지만,

먼저는 평양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을 뿐더러

1893년 11월 10일에 귀여운 남자아이, 셔우드를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산모였기 때문에 윌리엄을 따라갈수 없었지.


1894년 4월 중순,

로제타와 어린 셔우드, 그리고 에스더 부부, 셔우드의 보모 실비아가 제물포를 떠나 평양으로 향했어.

5월에 평양에 도착해 숙소로 가는 길 부터 서양인들이 왔다는 소식에 바글바글 모여든 사람들이 가득했어.

서양인, 그것도 한양 아니면 보기 드문 서양인 여성과 아기가 평양에 왔다니!

로제타 일행이 숙소에 도착해서도 구경 온 사람들은 돌아가지 않았고,

보다못한 윌리엄이 내일부터 10명씩 짝을 지어오면 5분씩 아내와 아기를 보게 해주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납득하고 돌아갔다고 해.


그 다음날은 로제타와 어린 셔우드에게 고난의 연속이었어.

처음에는 질서있게 순서를 잘 지키던 사람들이 서양인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숙소 마당은 물론 방 두개를 가득 채울 정도로 붐비게 된거야.

결국 로제타는 마당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셔우드를 안고 마루로 나가야 했어.


"아기 눈이 꼭 개처럼 파랗네."

"옷은 왜 이리 어둡게 입었지? 이상하네."
"머리는 개털같고 모양도 요상한걸."


평양 사람들은 로제타와 셔우드를 앞에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했어.

이러는 와중에도 서양인 여자와 아기를 보기위한 구경꾼은 점점 많아져서 숙소 담장이 무너질 지경이 되자

윌리엄은 힘들어하는 아내와 돌도 채 되지 않은 아기 셔우드가 걱정이 되었지.


하지만 평양 관아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는 윌리엄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어.

평양을 다스리는 평양 관찰사가 보낸 전령이었는데

이 전령은 여행용 여권만을 가진 외국인이 조선의 집을 사는 것은 불법이라며 윌리엄 일행을 쫓아내려 했어.

윌리엄은 이 집은 조선사람의 소유이며 우리는 그의 집을 빌려쓰고 있는 것이고,

머무는 목적은 환자를 돌보려는 것이라며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


당시 평양관찰사였던 민병석은 왕비의 친척이자 수구파였어.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해있던 김옥균을 암살하려 했으니 실패했을 정도로 강경한 수구파인 관찰사가.

외국인 선교사에게 호의 있을리가 없었지.


선교사들이 나갈 기미를 안보이자 관찰사는 윌리엄 홀에게 집을 빌려준 집주인, 평양에서 윌리엄을 도와주던 조선인 기독교인 등을

잡아다 감옥에 가두고 매질을 했어. 돈을 주거나 평양에서 나가지 않으면 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지.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로제타와 셔우드를 보겠다고 하루 종일 몰려왔어.


이시기의 에스더에 대한 기록은 잘 남아있지 않아.

이시기의 사료는 로제타가 쓰고 있던 일기를 주로 참조하는데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로제타는 자신과 셔우드를 챙기기도 힘든 상황이었거든.


하지만 에스더는 여기서도 로제타를 돕기위해 최선을 다한것 같아.

에스더는 주로 구경꾼들이 로제타에게 말을 걸거나

윌리엄이 없을 때 평양 관아에서 공문이 내려오거나 포졸이 말로 관찰사의 말을 전하면

그것을 번역내지 통역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걸로 예상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평양 관아의 협박은 계속 되었어.

이 협박에 겁을 먹은 숙소의 전 주인인 김씨와 관찰사의 명을 받은 포도대장이 숙소에 찾아와서는 집문서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렸어.

박여선이 그들을 말리려고 밖에 나갔지만 되려 상투를 잡히고 그들의 발에 채이며 폭행을 당했지.

윌리엄과 로제타는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집문서를 내줄 수 밖에 없었어.


이런 상황은 영국과 미국 영사관에서 조선정부에 청원을 하면서 감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어.

하지만 그러면서 로제타와 셔우드가 머물기엔 평양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돌아가라는 권고를 내렸지.


이 무렵 남쪽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어.

일본은 이를 트집잡아 자신들도 군대를 파견했지.

우리가 잘 아는 청일 전쟁의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던거야.

평양에 있던 선교사들은 영사관의 권고에 의해 한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어.


결국 1894년 7월 23일,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남의 나라 조선 땅에서 한달을 넘게 싸우며 몇만명의 사상자를 냈어. 


이와중에 에스더는 출산을 했어.

몸무게가 1.8kg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사내아이였어.

임신한 몸으로 평양에서의 고된 업무와 바닷길을 오가는 것을 견디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 작은 아기는 36시간을 엄마 곁에 있다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청일 전쟁은 9월의 평양 전투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음으로서 일본의 승리로 끝났지.

하지만 윌리엄과 다른 선교사들이 10월이 되어서야 도착한 평양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어.

성벽가까이 쌓인 청나라 군사들의 시신들은 방치된채 썩어가고 있었고,

이 시체들이 악취, 이질과 열병 등 전염병을 유발했지.


윌리엄은 이런 환경에서 평양 사람들을 돌보다가 이질에 걸렸고,

한양으로 오는 뱃길에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9일가까이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로 방치 되었어.

로제타가 기다리는 한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발로 걸을 수도 없어서 사람들이 그를 들어서 침대에 옮겨놓아야 할 지경이었지.

윌리엄은 자신의 병이 혹여 셔우드에게 전염될까 마지막 가는 길에 사랑하는 아기를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채

11월 24일 조선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로제타에게 굳어가는 혀로 '사랑합니다, 내가 평양에 간 사실을 후회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남긴채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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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에 있는 윌리엄 홀의 무덤>




윌리엄의 죽음은 모두에게 충격이었어.

로제타는 사랑하는 남편을, 갓 돌이 지난 셔우드와 로제타의 뱃속에 있던 아기는 좋은 아빠를,

에스더와 박여선에게는 본이 되는 멘토이자 스승을 잃게 된 셈이었지.

특히 로제타는 남편을 잃고 자신이 더이상 조선에서 일을 제대로 해낼수 없을것 같다고 생각했어.

로제타가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자 에스더는 간청했지.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이야.

그러자 로제타도 자신이 에스더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꿈을 기억해 냈어.

에스더를 의사로 만들어보이겠다던 일기장에 적은 그 꿈 말이야.






선교부의 허락과 지인들의 장학금 지원으로 로제타는 에스더와 박여선 부부를 미국에 데려가기로 했어.

박여선은 에스더보다 영어가 서투니, 농장을 운영하는 로제타의 집에서 일하며 영어를 배우기로 하고,

에스더는 미국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의대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거야.


그렇게 격동의 1894년이 끝나가던 12월 7일, 로제타는 셔우드와 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미국으로 출발했고,

1895년 1월에 미국에 도착한 에스더는 2월부터 뉴욕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해서 미국 고등학교 과정을 밟았어.

주중에는 리버티 시내에서 하숙을 하고, 주말에는 로제타의 친정인 리버티 농장으로 돌아왔지.

이 농장에는 박여선이 허드렛일을 하거나 로제타의 아이들을 돌보며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

박여선은 이 월급을 대부분 아내의 공부 뒷바라지에 사용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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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와 박여선, 로제타와 셔우드, 그리고 이디스. 1895년 9월에 찍힌 사진이야>



사려깊고 성실한 에스더는 무려 한학기만에 미국의 보통 고등학생의 학력성취도를 따라잡았고

10월부터는 뉴욕의 유아병원 소아병동에서 수간호사를 보조하며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고 해.

의과대학 진학을 위해 라틴어, 물리학, 수학과외를 받으며 간호사 일까지 병행하다니,

이때 박에스더의 나이가 만 18세였던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지?


이렇게 일과 입시준비를 병행하면서 미국에서의 생활을 이어가던 중 1896년 2월, 에스더는 딸을 낳아.

또 당해 10월에는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에 합격하면서 한국 최초의 여성의사로서의 길에 더욱 가까이 다다를수 있었어.


박여선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삶에서 세번째로 기쁜 순간이라고 했대.


첫째는 기독교를 알게 된 것이요,

둘째는 당신을 만나 결혼했던 것이요,

셋째가 바로 에스더가 의대에 합격한 지금이라는거야.


박여선이 얼마나 에스더를 아끼고 사랑했는지 잘 드러나는 일화인것 같아.







에스더는 의과대학에서도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며 지냈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교수회장인 유진 코델은 에스더가 1학년 과정을 마치자

에스더가 지적이고, 앞으로의 3년의 수업을 잘 마칠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는 평을 내렸대.

또한 에스더는 졸업 전에 교수진으로부터 미국에서의 일자리를 소개받은 경험도 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의 선생님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어.


하지만 운명은 어찌 이렇게 잔인할까.

1897년 3월, 갓 돌을 지난 에스더의 딸이 폐병으로 사망해.

그리고 그해 5월에는 에스더를 이 곳으로 데려와준 로제타가 다시 조선으로 떠나게 되었지.

로제타는 에스더에게 의대를 그만두고 자신과 같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얘기를 하는데,

이때 에스더는 이렇게 답해.





저는 당신이 저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한국으로 돌아가 제가 준비될때까지 우리의 불쌍한 자매들을 도왔으면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돕기 위해 훌륭하고 헌신적인 친구를 보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배울 수 없다면 그 때 포기하겠습니다.

이전에는 아닙니다.』





로제타는 에스더의 결정을 존중했어,

1897년 9월 6일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와 딸 이디스만을 데리고 한국으로 떠났고

리버티 농장에서 일하던 박여선은 에스더가 있는 볼티모어로 와서 식당일을 하기 시작했대.








하지만 운명은 또 에스더를 뒤흔들어 놓을 사건을 준비해 놓았어.

1899년, 농장일, 식당일 등 궂은일 마다하지 않으며 에스더를 지원하던 박여선이 급성 폐결핵에 걸린거야.


에스더는 자신의 모교와 연계되어있는 병원에 남편을 입원시키고,

낮에는 의학공부와 병원비, 생활비를 벌기위해 고군분투하고, 밤에는 남편의 병간호를 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어.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여선은 1년 정도를 투병하다 1900년 4월 28일, 에스더의 졸업시험 3주 전 사망했어.


이런 아픔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에스더는 무너지지 않았어.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1900년 6월에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사가 된거야.


이국 땅에 어린 딸과 남편을 묻고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수 없지만,

이렇게 1900년대 후반, 에스더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조선 사람들이 말이 통하는 의사님이라며 붙여주었던 별명,

'우리 의사' 박에스더의 여정이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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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로제타가 세운 기홀병원과 광혜여원, 기홀병원의 이름은 죽은 남편의 이름을 따와서 지었어.>




에스더는 이제는 대한제국이 된 자신의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로제타가 있는 평양을 찾아가.

로제타는 에스더가 없는 동안 평양에 기홀병원, 광혜여원 같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굵직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스더가 의료 방면의 일을 맡아 줌으로서 로제타는 사업적인 면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지.


로제타와 에스더는 평양에서의 10개월 동안 무려 2414건의 진료를 했다고해.

이중에서 절반 이상이 에스더의 진료건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또한 1901년에는 보구여관을 맡고 있던 여의사 커틀러가 미국으로 돌아가자 새로운 담당의로 보구여관에 부임해.

로제타 홀의 조수로 있었던 자신이, 의사로서 다시 돌아오다니 얼마나 감회가 새로웠을지!


이렇게 여러 곳의 병원에서 근무하고 왕진을 다니면서

에스더는 한국 여성들이 건강과 위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 


박에스더가 보고한 예를 들자면,


발목을 삐어 염증을 일으킨 여자아이에게

뜨거운 돼지고기, 개고기로 만든 국물을 마시게 하거나 침을 놓는 등의 민간요법을 시행하다

염증이 심해서 관절을 잃게 된 사례 라던가,

폐결핵 말기의 젊은 부인을 생매장하려 준비하면서 그녀의 입에 쌀을 채워넣어

이 쌀을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쓰려한 가족의 사례 등이 있었지.

콜레라가 비위생으로 인해 생기는 병을 알지 못해 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 쫓으려고 한 사례도 있었어.


에스더는 이런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위생교육을 하는 한편,

업무가 끝난 시간에도, 휴일, 휴가 때 찾아와 치료와 처방을 간청하는 사람들을 돌보았지.


또한 보구여관에 간호원 양성소를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어.

보구여관 간호원 양성소를 졸업한 이 그레이스나 에스더의 동생이자 세브란스병원 간호원 양성소 1기 졸업생인 김배세는

에스더의 일을 돕기도 한 한국 초기 의료사업의 선구자들이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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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더와 김배세, 김배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니처럼 성을 바꾸지 않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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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혜여원에서 수술중인 로제타(왼쪽에서 두번째)와 이그레이스(오른쪽에서 첫번째)>



이런 시기를 거치며 에스더의 실력은 더욱 출중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1년에 40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하는 열정을 보였어.

방광질루, 관폐쇄증 등 당시 조선사람들이 손도 못쓰고 죽어가던 병들을 외과수술로 고쳐내는 박에스더를 보고

사람들은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라며 신기해 했어.

또한 시간이 나면 지방으로 다니며 그 지방의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위생에 대해 가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어.



에스더는 존재만으로도 여성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어.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름도 없이 살다 시집가면 아들을 낳아야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아들이 없다거나 죽었다는 이유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조선의 여인들에게

에스더는 여성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한줄기 빛이 된거야.

'에스더'라는 이름이 밤하늘에 반짝이 빛나는 별이라는 뜻을 가진 것을 생각해보면 참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이렇게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을 채 의료 선교를 하던 박에스더는 1905년부터 건강을 잃어갔어.

박여선의 목숨을 앗아갔던 그 지독한 폐결핵이 이번엔 에스더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한거야.

급성 늑막염과 심장합병증이 동반되면서 에스더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눕게 되었어.


하지만 에스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조금이라도 몸상태가 나아진 것 같으면 진료를 하고

다시 나빠지면 집에서 할 수 있는 번역일이라던가 선교활동을 지속하며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


시간은 흘러 1909년,

대한제국은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사회 발전에 공언하고 있는 여성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영회'를 개최했어.


이 환영회에는 한국 최초의 문학사이자 이화학당 교사인 하란사,

일본, 벨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유학하며 음악과 외국어를 배우고

한성고등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중이던 윤정원,

그리고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의료활동을 펼친 박에스더가 초청되었지.

이때 에스더는 그간의 활동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메달을 받았고 이 메달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고 해.


하지만 이미 에스더의 속은 폐결핵과 합병증으로 인해 의료활동을 할수 없을정도로 엉망이 되었고,

그렇게 에스더는 작은 언니 신마리아의 집에서 병상생활을 하다가,


1910년 4월 13일, 34세의 너무나도 창창한 나이에 조용히 눈을 감았어.











에스더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병세가 위중한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애통해했어.

특히 태어났을 때 부터 에스더를 봐왔고 에스더를 이모라고 부르며 따랐던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의 충격은 어마어마했지.

당시 10대였던 셔우드는 훗날 자신의 전기에 그때의 충격을 이렇게 이야기해.


『에스더의 죽음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였던 에스더를 앗아가고 수많은 한국인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결핵을 막아내는데

 내 온 힘을 바치리라고 결심했다.

나는 결핵을 공부하고 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올 것과  결핵 요양원을 세울 것을 맹세했다.』


실제로 셔우드 홀은 미국으로 건너가 결핵학을 전공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결핵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1928년 10월, 최초의 결핵 퇴치 요양소인 '해주구세요양원'을 만들었어.

그리고 1932년 12월에는 결핵퇴치 기금 모금을 위해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해 처음으로 발행했지.


그녀를 의사의 길로 이끌었던 로제타 홀은 에스더 사후, 미국이 아닌 한국 내에서도 여성의사를 양성해낼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어.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의학교육기관을 설립하자, 여학생들도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해 허락을 얻었고

1928년에는 경성에 여자의학교, 한국의 여성을 위해 세워진 최초의 의학교를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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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셔우드 홀의 아내이자 의사 메리안 홀, 셔우드 홀, 그리고 로제타 홀.

셔우드 홀 부부는1940년 일제에게서 스파이 혐의를 받아 추방당할때까지 의료사업을 계속했어.>







이렇게 박 에스더의 이야기는 끝을 맺게 돼.


짧은 생애를 살아가면서 별이라는 뜻을 가진 그 이름을 따라

당시 무지라는 어둠 속에서 헤메던 조선 여성들에게 온 몸을 불태워 희망이 된 박 에스더,

그리고 그 한 사람이 희망이 퍼뜨린 씨앗을 볼 때, 우리는 아직도 박에스더가 내던 빛으로 인해 살아가고 있는건지도 모르지.








여기까지 읽어준 토리들 고생했어!

기회가 된다면 또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로 돌아올게. 안녕!!





  • tory_1 2019.12.1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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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2 2019.12.1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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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10 2020.12.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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