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숲
<<조선 추존국왕 장조(사도세자) 이선의 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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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경왕후 홍씨 (혜경궁 홍씨)

출생 = 1735년 8월 6일
사망 = 1816년 1월 13일 (만 80세)

(슬하 2남 2녀)

사도세자(장조)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 10세이던 1744년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음.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으로 홍주원의 부인이 선조의 딸 정명공주였기 때문에 선조의 6대손이기도 했어.

명목상 간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초간택 때 이미 대왕대비인 인원왕후, 왕비인 정성왕후 등 높으신 분들을 뵙고 궁인들이 홍씨가 괴로워할 정도로 그녀를 안으려 다툰 것을 보아, 간택 전에 이미 그녀는 세자빈으로 낙점이 되었던 듯보임. 이때 그녀의 조상인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혼수로 들어와 기이하게 여겼다. 컴백홈이였는듯..

남편인 사도세자와 사이는 괜찮았는지 6번의 임신 중 2번은 유산했고 2남2녀 (의소세손.정조.청선군주,청연군주)를 낳았음. 둘 다 성장이 빨랐는지 만 15세에 장남 의소세손을 낳았다고 해. 시아버지 영조, 시어머니 정성왕후,영빈이씨와 시할머니 인원왕후에게는 총애를 받았다고 함.

사도세자의 광증으로 시아버지 영조와 대립 가운데 마음고생을 많이 했으며, 사도세자가 후궁 숙빈임씨를 낙태시키려고 하자 그녀가 너무 불쌍해 챙겨줄정도로 성격은 어질었다고 함.

한때는 사도세자가 광증 때문에 궁녀들을 마구 살해하자, 시어머니 영빈 이씨에게 가서 같이 울면서 의논했는데, 영빈이 영조에게 이야기하는 게 어떻냐고 묻자

대경실색하면서 왕에게 세자를 헐뜯은 걸 세자가 알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뜯어말렸다는 이야기가 있음. 세자빈인 혜경궁도 시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미쳐가는 남편을 말릴 수가 없었던 모양임.

임오화변으로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행으로 아사할 당시 오후 3시에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칼로 2차례나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칼을 빼앗아 실패했음.

홍씨는 사도세자를 만나기 위해서 달려갔으나 들어가진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단 말인가?"하고 남편을 원망 아닌 원망을 하며 울었다고 함.

그 뒤 잠시 사가에 나가있다가 시부인 영조가 그녀에게 "혜빈"이라는 칭호를 주었기에 다시 궁에 들어와 여생을 보냄. 한편 혜빈은 영조에게 세손이 경희궁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당시 혜빈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남편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아들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음.

한 번은 어린 세손이 혜빈에게 와서는 울면서 떨어지지 않자 영조가 이렇게 어미를 그리워하니 놔두고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는데, 혹 영조가 항상 함께 있는 할아비보다 어미를 더 좋아한다고 섭섭해할까 봐 영조의 성격상 충분히 섭섭해하고 그 뒤로 무한 증오를 퍼부었을 확률이 높기에 억지로 떨어트렸다고 해.


그 뒤 아들 정조가 즉위했을때 대비가 되지 못했는데 이유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시아주머니 효장세자(진종)의 아들로 입적되었기에 대비가 되지 못한거야.

거기다 왕실 서열 1위는 10살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 김씨였어. 만일 당시에 혜빈 홍씨가 남편이 국왕으로 추존되었다면 자신은 왕대비가 되고 정순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었을 것임

정조는 궁여지책으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인 효장세자와 효순빈을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하며 생모인 홍씨는 한 단계 낮은 '자궁(慈宮)'이라는 칭호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보다는 낮고 중전 효의왕후 김씨보다는 높은 대우를 하였음.

결과적으로 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해서 친어머니를 위로했어. 혜빈 홍씨가 궁호인 혜경궁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야.

즉위 초반 반대파들의 공격에 친정이 수난을 당했으나 정조는 끝까지 외가를 보호했고, 즉위 중후반 이후로는 정조가 직접 외가에 대한 명예 회복에 나서며 아들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평온한 시절을 보냈고 환갑잔치를 화려하게 치루기도 했어.

한중록에는 임오화변 당시 앞날이 막막했으나 당시 11살이던 아들은 왕이 되었고 10살이 되지 않았던 딸들은 현재 모두 장성하여 40세가 넘었다'며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함.

하지만 정조 사후 그녀의 큰 고난이 시작되었어. 혜경궁의 친정 풍산 홍씨와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가 대립했기에,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혜경궁의 남동생 홍낙임을 처벌하려고 하자 단식 투쟁을 벌였고, 수빈 박씨도 합세해 둘이서 순조에게 기대어 막아 정순왕후의 뜻을 일단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사사되어버렸음.

아이러니 하게도 10살이나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는 본인보다 11년이나 일찍 죽음..,이건 혜경궁이 만 80세, 한국나이로 82세까지 장수했기에 그런거일수도 있음. 혜경궁이 죽었을때 며느리인 효의왕후(정조의 정실부인)은 62살이였음.

1814년 팔순을 맞이한 해에 그녀의 친정은 복권되었고 2년뒤인 1816년 1월 겨울. 82세 나이에 협심증과 노환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어.

고종 시절 남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었기에 그녀 역시 혜경궁에서 "헌경왕후"로 추존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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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숙빈 임씨 (임유혜)

출생 = 1732년
사망 = 1773년 (만 40~41세)

(슬하 2남)

사도세자(장조)의 서자인 은신군과 은언군의 어머니로 사도세자(장조)의 후궁이야. 한중록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이 "유혜"였다고 해.

1752년 사도세자의 승은을 입고 세자의 후궁이 되었고 그와 사이에 아들인 은신군과 은언군을 낳았어. 하지만 1762년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으로 처형되자 그녀 역시 궁에서 퇴출되어 사가로 쫒겨나버림.

 1767년 영조의 명으로 그가 살 집을 해조에 분부하여 한성에 자택을 마련해주었음. 이는 후일 양제궁으로 불렸으며 그녀의 장남 은언군 이인의 처 상산군부인 송씨 등이 한때 거주하였어.

그 뒤 그곳에서 살다가 선원보략에 따르면 1773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 하지만 사후 그녀의 두아들은 불행을 겪게 되는데 장남 은언군과 그의 처 송씨는 천주교를 믿었다가 그들의 양조모인 정순왕후에 의해 처형되었고 차남 은신군은 17세 어린 나이에 후사없이 죽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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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빈 박씨 (박빙애)

출생 = 1736년
사망 = 1761년 1월 (만 24~25세)

(슬하 1남 1녀)

원래 사도세자의 할머니인 대왕대비 인원왕후를 모시는 나인출신으로 이름은 "빙애"였음. 1757년 11월 인원왕후 사후 사도세자의 승은을 입은걸로 보이는데 당시의 기준에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곧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전해져.

그 뒤 사도세자와 사이에 은전군과 청근현주를 낳았음.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던 박씨는 사도세자의 비행에 대해 자주 지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화를 부르게 했다고 함.

박씨는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사도세자의 옷을 시중드는 도중에 사도세자의 의대병이 발병해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어.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우물에 빠질 듯 사랑하더니 왜 죽였냐고 다그치는 대목이 나옴.

그녀가 사도세자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노론 벽파에서는 그녀의 아들 은전군 찬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을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음. 그런 이유로 은전군은 노론에 의해 택군의 대상이 되었지만, 1777년 7월과 8월 노론벽파 측에서 매수한 자객이 체포되면서 적발당하고, 은전군 역시 역모의 수괴로 몰려 1778년 사사되었음.

영조는 자신의 손주들인데도 은전군과 청근현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보여지는데 특히 청근현주는 부마 간택을 끝낸 후에도 3년 후에야 길례(결혼식)을 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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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3명의 부인들과 사이에 5남 3녀의 자녀들을 두었다고 기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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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22대 국왕 정조 이산의 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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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의왕후 김씨

출생 = 1754년 1월 5일
사망 = 1821년 4월 10일 (만 67세)

(슬하 자녀 없음)

9세이던 1762년 왕세손 정조의 베필이 되어 왕세손빈이 되었지만 몆달뒤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살해되어 영조가 혜경궁 홍씨와 효의왕후에게 제각기 친정으로 가라고 명하였으나, 효의왕후는 자신의 친정으로 가지 않고 시어머니와 함께 있기를 원하였음.

그러자 영조가 그 말을 듣고 매우 착하게 여기어 같이 혜경궁 홍씨의 친정으로 가라고 허락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들어오라고 명하였어. 이때 효의왕후가 어린 아이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차분하게 조신과 처사를 올바르게 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영조의 환심을 산 것임.

1776년 시할아버지 영조가 죽고 남편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어. 둘사이에는 자녀가 없는데 정조와의 관계는 세손 당시 주변 권력의 역학관계 등의 배경을 보더라도 지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관계였으나,

이후 왕과 왕비를 세손시절부터 방해하고 위협했던 정적들을 제거하는 정조 초기를 거치면서 (홍국영 등의 모함을 받을 때) 왕비의 의연함을 시작으로 서로 신뢰하고 지키며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보여.

정조 10년 문효세자,의빈성씨 사망 후,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로 정조 11년 수빈 박씨가 후궁으로 들어오고 그해 왕비의 산실청을 설치한 것을 보면 정조가 회임하지 못하는 30대 중후반인 왕비의 처소를 꾸준히 찾았던 것을 알 수 있음.

왕비의 임신에 정조가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에 상상임신이었음을 알고 산실청은 정조 12년에 철수되었음. 당시 궁내 분위기, 또한 이후로 달리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가짜 소동은 아니었고 그만큼 후손을 절실히 원했던 것을 알 수 있어.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공순하고 검소하였고, 효심이 깊었다고 함. 어렸을 적에는 어떤 아이가 자라나는 풀을 뽑고 있는 것을 말릴 정도로 심성이 고왔다고 전해지며 효심이 깊어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의붓 시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함.

시누이인 청연군주, 청선군주와도 우애가 대단했음. 뿐만 아니라 시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정조와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온갖 이간질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텼으며 화완옹주에게 예의를 갖췄다고 함.

원빈 홍씨의 오빠 홍국영과 대립한적이 있는데 홍국영은 여동생이 왕자를 낳아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그녀가 얼마 못 가 갑자기 사망하고 만 것.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의 죽음 뒤에 효의왕후가 있다고 생각하여 효의왕후를 모함했고,

함부로 효의왕후의 궁녀들을 잡아다 문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음. 그러나 정조는 효의왕후의 편을 들어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효의왕후를 모함한 홍국영을 귀양보냄.

자녀가 없어서 수빈박씨 소생의 순조를 양자로 들였고 정조가 즉위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어. 보통 왕대비와 대왕대비들은 별도로 존호를 받는데 대비가 되지 못한 시어머니 혜경궁을 의식했는지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는 일화가 있음.

1815년 혜경궁이 지병과 노환으로 위독하자 그당시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약 시중과 반찬의 맛 보는 일을 했다고 함. 효의왕후는 1821년 4월 만 6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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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빈 성씨 (성덕임)

출생 = 1753년 7월 8일
사망 = 1786년 9월 14일 (만 33세)

(슬하 자녀 5명, 3명은 유산)

이름은 성덕임으로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생모임. 1762년 10세 나이에 궁인이 되어 혜경궁 홍씨를 모시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어린 정조와 사이가 좋아지게 되었음. 출신 신분이 중인이었다는 점과 혜경궁이 수양딸로 키운 걸 보아 지밀, 침방, 수방과 같은 고위직속의 생각시였을 가능성이 높아.

1766년 영조에 의해 세손의 후궁이 될뻔했는데 당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음. 이에 정조는 납득하고 물러났어.

정조 즉위 후 1778년 원빈홍씨를 간택하고 그녀가 죽자 화빈을 간택한 이후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화빈 간택 이후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음.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고 정조가 내린 승은을 받아들임.

정조와 사이에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고 유산된 아이 2명과 사망 당시 임신중이던 아이까지 5명을 낳거나 낳을수 있었을정도로 정조와 사이가 좋았음. 효의왕후가 자녀가 없는터라 의빈의 아들이 세자가 되었지만 3살때 죽었고 그 뒤 그 아들을 문효세자라는 호를 내림.

의빈은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칠정(마음의 병)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가 사망한 뒤에 중병에 걸려서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낫자 창덕궁으로 돌아왔음. 정조가 그날 그날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으나 병이 악화 되었음. 결국 1786년 임신 9개월이던 중 세상을 떠남.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던 것 같음. 같은 후궁인 화빈윤씨,내관 이윤목,은언군 등에 의한 독살설도 존재함.

정황상 정조가 가장 사랑한 부인임. 왕의 승은을 2번이나 입고도 거절하거나 거절을 시도할정도였고 정조의 부인들중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음. 또한 어린시절 어머니 혜경궁의 수양딸이나 마찬가지에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였어.

의빈이 죽고 20일이나 정사를 제대로 못볼정도로 정조는 슬퍼했다고 함.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서 바느질, 요리, 붓글씨가 뛰어나고 수학을 잘하며, 예의가 바르고 효의왕후를 공경하고, 재주와 용모를 잊을 수 없다는 등으로 보아 팔방미인이었던 듯 보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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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빈 박씨 (현목수대빈)

출생 = 1770년 5월 8일
사망 = 1822년 12월 26일 (만 52세)

(슬하 1남 1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 1787년 18세 나이에 정조의 후궁이 되었는데 당시 정조는 36세로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다고 함.

입궁 당시 그녀의 신분은 빈이였는데 후궁의 정1품 빈이 아닌 세자빈과 같은 무품빈이라는 파격적인 신분이였는데 원빈홍씨,화빈윤씨의 뒤를 이은 무품빈출신 후궁임.

바로 다음해에 아들 순조를 낳았기에 궁중에서 입지가 높아짐. 정조와 함께한 14년 동안 1남 1녀를 두었어. 어질고 온화한 성품에 검소한 생활을 하여 정조는 수빈을 어진 빈이라 부르며 총애했고,수빈의 처소 집복헌과 가깝게 위치한 영춘헌에 머물렀음.

1800년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가순궁"이라고 불리었고 순조 즉위 후에도 시할머니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시어머니 혜경궁, 왕대비 효의왕후에게 하루 3차례 문안하였는데. 아랫 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복식과 그릇은 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상시 말수가 적었다고 함

윗전들도 수빈을 아꼈음. 정순왕후는 수렴청정 당시 수빈의 아버지 박준원을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로 기용했으며 수빈을 '저하'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는데 또한 정순왕후는 수빈의 딸 숙선옹주를 일반 후궁의 딸로 볼 수 없다며 공주와 옹주 사이의 명칭을 주자고 주장하기도 했어.

사망하기 전년 늦가을에 갑자기 풍담 증세가 생겼는데 얼마 후에 조금 차도가 있었음. 그러나 병환이 차츰차츰 더 심해져 일어나지 못했음. 1822년 만 52세로 세상을 떠남.

아들인 순조는 어머니인 수빈이 후궁임에도 왕비에 준하는 예로 장례를 치르고 싶어 해서 궐 안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가 끝난 뒤에도 3년 동안 흰옷을 입었는데 반대한 사람은 죄다 유배 보냈다고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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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빈 홍씨

출생 = 1766년 7월 3일
사망 = 1779년 6월 20일 (만 12세)

(슬하 자녀 없음)

홍낙춘과 우봉 이씨의 딸이자 홍국영의 여동생이야. 흔히 후궁으로 알고 있는 빈은 정1품빈이고 세자빈의 경우 무품빈이라고
함. 그녀를 입궁시키기에 앞서 무품빈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니 그녀는 최초로 무품빈으로 입궁한 후궁으로 추정됨.

1778년 13세 나이에 당시 후사가 없던 정조를 위해 대비 정순왕후가 직접 간택한 후궁임. 만 13세인 1779년(정조 3년) 4월 16일에 관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음, 정조와의 초야는 이 뒤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여짐. 그러나 1달 뒤인 5월, 창덕궁 양심합에서 갑작스럽게 죽어버림... 향년 한국나이 14세...

원빈 홍씨는 조선 역사상 삼간택과 가례의 절차를 거쳐 처음부터 빈으로 입궁한 최초의 후궁임. 빈호에도 정실을 뜻하는 "으뜸 원" 자를 써서,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의 심기를 건드렸음.

원빈 홍씨(숙창궁)의 조현례 과정을 그린 "숙창궁입궐일기"가 전하는데, 이 작품에서 효의왕후는 더위를 핑계로 원빈 홍씨의 인사를 받는 걸 며칠이나 미루는 모습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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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빈 윤씨

출생 = 1765년 4월 11일
사망 = 1824년 1월 14일 (만 58세)

(슬하 자녀 없음)

정조의 두 번째 간택 후궁으로. 삼간택을 거쳐 입궁하고 그녀 역시 무품빈으로 책봉된 뒤에 가례를 행하였음.

의빈 성씨가 7년 동안 5번이나 임신하고, 의빈 성씨 사후에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가 14년 동안 순조와 숙선 옹주를 낳았음.수빈 박씨가 입궁했을 때 화빈 윤씨의 나이는 23살로 한창 임신을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굳이 새 후궁을 간택한 것을 보면 화빈 윤씨는 총애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짐.

효의왕후와 의빈 성씨를 질투해 따로 방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당시 여성에게는 금기시되는 투기가 지나치게 심했던 것 같음.

명문가에서 태어나 입궁하여 빈호와 궁호를 받아 가례를 치르고 입궁한지 약 9개월 만에 임신까지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지만 상상 임신이었기에 출산 예정달에 출산을 못했고, 자신보다 12살이나 많은 승은 상궁인 의빈성씨가 10개월 뒤에 아들을 낳았음.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가 일찍 졸한 것을 볼 때, 만약 화빈이 투기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의빈 성씨 사후 정조가 새 후궁을 간택하지 않고 화빈에게서 아들을 얻으려 가까이 했을지도 모를 일이였음.

그라나 당시 18~19세였던 화빈은 중전 그리고 왕세자를 낳은 후궁을 투기하는 판단력 부족한 행동을 하였어. 이는 의빈 성씨가 정실 효의왕후를 배려하는 모습으로 정조를 편안하게 만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였음

그 후 독을 썼다는 이유로 기록이 없는데 의빈성씨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 이때 화빈 윤씨와 외숙부 조시위가 저주하고 독살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음.

문효세자 사망의 배후를 성토하는 과정에서 조시위는 화빈 윤씨의 산실청을 30개월이나 주관하여 세자 책봉을 늦추려 하였고,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에게 약을 잘못 올리게 했다는 의혹 등으로 위리안치되었어. 화빈 윤씨는 후궁의 지위는 유지한 듯 하나 이후 활동상은 찾을 수 없음.

시어머니 혜경궁이 집필한 한중록에도 정조의 다른 후궁들인 의빈, 원빈, 수빈만 언급되고 화빈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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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5명의 부인들과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고 3명의 아이들은 태어나지 못하였거나 유산되었기에 성별을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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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1 2020.02.1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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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2 2020.02.1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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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3 2020.02.1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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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6 2020.03.2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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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4 2020.02.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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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5 2020.02.1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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