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 소현왕후, 현덕왕후 살았으면 계유정난 없었을까
하는 글 보고 나도 if 생각나서 써 봤어 좀 길어
대부분 숙종의 자식은 경종, 영조, 연령군까지 알고 있지만
숙종은 무려 6남 2녀를 두었고 출생 순서는 아래와 같아
공주 1677년 ~ 1678년 (인경왕후 소생, 조졸)
공주 1679년 ~ 1679년 (인경왕후 소생, 조졸)
경종 1688년 ~ 1724년 (희빈장씨 소생)
성수 1690년
(희빈 장씨가 중전이었을 때 대군으로 탄생, 2달만에 조졸)
영수 1693년 (숙빈 최씨 소생, 조졸)
영조 1694년~1776년 (숙빈 최씨 소생)
미상 1698년 (숙빈 최씨 소생, 조졸)
연령군 1699년~1719년 (명빈 박씨 소생, 숙종45년 후손없이 요절)
둘째 공주가 죽고 10년 동안 궁에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아
형제도 사촌도 없는 상황이라서 숙종 본인뿐 아니라
왕실도 조정도 몹시 위태로운 심정이었을테고
두 공주를 먼저 보내고 28살에 얻은 경종과 그를 낳은
희빈 장씨에 대한 총애는 남달라서 인현왕후를 내치면서
중전으로(기사환국, 1689년) 삼을 만큼 대단했지
화무십일홍 그 사랑도 식고 희빈 장씨는
1694년 갑술환국으로 취선당으로 물러 나야 했어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온 건 음력 4월의 일이고
영조가 태어난 것은 음력 9월
인현왕후가 재입궁할 때 숙빈 최씨는 임신중이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숙종의 유일한 자식은 경종뿐이었어
그런데 성수 왕자가 계속 살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인현왕후가 과연 재입궁할 수 있었을까?
희빈으로 물러 났을 때도 신하들 중에서는
“9년과 6년,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것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가?’ 하고 상소 올리면서 인형왕후와 장희빈이
왕비로 있던 것은 세월이 오래고 짧은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세자가 있으므로 도리어 중하다고 한 걸 보면
장희빈에게 세자와 더불어 대군까지 있었더라면
인현왕후의 복귀는 글쎄?
신하들 입장에서도 세자와 대군 두 왕자를 낳은 중전을 폐하자고
하면 당파와 상관없이 결사반대하지 않았을까?
숙빈이 임신중이었지만 아들을 낳는다는 보장도 없고
당시의 영아사망율을 볼 때 노론도 필패의 도박이었을 거야
대군의 지위도 문제가 돼
인현왕후가 복위했을 때
경종은 인현왕후의 양자가 됐는데 그럼 대군은?
엄마는 후궁인데 본인은 대군이 되는 황당한 경우가 발생하게 돼
그렇다고 엄마한테 맞춘다고 아무 잘못도 없는 대군을
군으로 강등할 수도 없고
조선 시대 종법상 장희빈 제사를 지낼 봉사손이 없어지니까
인현왕후가 경종이랑 성수 왕자 둘 다 양자로 들일 수도 없고.
설령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이 사약을 받았더라도
성수 왕자가 있었으면
경종 시절에 노론이 보여줬던 하극상이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
경종이 온갖 모욕을 참으면서도 연잉군(영조)을 살려 줬던 이유는
삼종(효종,현종,숙종) 혈맥을 이은 오직 하나뿐인 후계자였으니까
그런데 내 친동생이 있다면
그것도 연잉군보다 4살 연상인 적통대군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져
2살 아래여서 바람막이 하나 없던 경종에게도
의지가 꽤 됐을 것이고 성수 왕자가 왕세제가 안되더라도
성수 왕자의 자식으로 후계자를 삼을 수 있었을 테니
노론이 그렇게까지 무시할 수도 없었을 거고
알고 보면 꽤나 성깔 있던 임금님 경종도 막 휘두르고 살지 않았을까
연잉군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종친 중 하나로 살았겠지…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성수 왕자가 살았더라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아니라
폐비 민씨와 인현왕후 장씨로 알려지지 않을까
지루하면 어쩌지...
그럼 사죄의 의미로 조선판 사랑과 전쟁 태종과 원경왕후 글 쪄올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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