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고 자란 곳이
너를 낳은 혈육이 뒤에 있다.
네가 있을 곳이 어디란 말인가?"
"사람의 기억도 피의 연결도
노파의 치마 속에 잠시 들어갔다 나온 것만으로도
헝클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헛되고 허망합니다."
"그 어린 나이에 인연이 허황하고 부질없다 잘라 말했다.
어린 것이 이미 부서진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그리 단호히 달려간 것이 대견하고 감탄스러워 웃었다.
자네나 내가 어찌 감히 그에 미칠 수 있겠는가?"
"또 하나가 미안하구나. 네 선생은 그렇게 만들어놓고, 나는 후회하지 않거든.
이렇게 한심하고 비루한 꼴로 겨우겨우 살아 있으나 지금 와 다시 생각해보면
후회할 만한 일은 없더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네 선생이 나를 더욱 하찮게 여길까 봐 말하지 않았다만
후회하고 원망해야 옳은 것인가, 오래 생각했으나
돌이켜 바꾸라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구나.
누구나 인생에 꽃과 같은 시절이 있지.
그 시절을 후회한다면 사람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대가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기를 바랐다.
나는 세상에 아무런 뿌리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내 삶에 깊이 들어왔던 그대들이 곧 내 속세의 뿌리였어.
나와 함께 세상에 살아 있어 주기를 바랐지.
그런데 그대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군.
가야겠다면 보내줘야지 어쩌겠는가, 그런 얘기야."
"허도 실도 아닌 생명,
붙일 곳이 없는 몸을 자신들의 삶 속에 넣어 실로서 살게 해주었다.
둘 모두가 소중했다.
서로 알지 못하는 곳에 있더라도 나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주기를 바랐다.
기억이 없더라도 살아 있기를 바랐다.
허망하게 곁에서 빠져나가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것을
속절없이 바라보는 이런 날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오지 않게 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속세는 산 것들의 세상, 죽은 것이 산 것을 이길 수는 없다.
스스로 살아있음을 믿고 강해지거라."
"예전에 무진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꽃과 같은 시절이 있다고.
그런 시절이 있기에 삶을 버티는 것이겠지요.
제가 선생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견딘 것처럼요.
저에게 꽃과 같은 시절은 선생님과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꽃과 같은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아무것도 미리 단정하지 말아주세요. 사람의 앞날은 모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