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츠는 반항하는 존재이다. 그러면서도 ‘살아남는’ 존재이다. 반항이라는 말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반항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존 본능에는 아무런 선이 없다. 그리피스가 사회의 한계를 부수기를 원했지만 우주의 질서를 인정했다면, 가츠에게 사회니 우주니 하는 건 아예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이용했고, 자신의 생을 방해하는 존재면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베르세르크는 거대한 종교적 테마의 알레고리이다. 음울한 중세적 배경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가츠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인간의 표상을 보여준다. 베르세르크의 가장 큰 주제는 ‘주어진 운명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며 이를 실천하는 캐릭터로 가츠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그 어떤 거창한 이론이나 운명도, 자신이 ‘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종교가 기본적으로 내세와 관련이 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그의 ‘현실집착적인 라이프스타일’은 일단 반종교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짚고 넘어가자. 베르세르크는 흥미롭게도 신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만 정작 악마라는 단어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르세르크에 정작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건 오로지 ‘악마들’(고드핸드, 여러 가지 사령들) 뿐이다. 그러나 그들을 악마라고 칭하는 단어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신 신의 부재를 틈타 그들은 자신이 신적인 존재로 등장하며 세상의 질서를 다스리는 존재로 자처한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가츠의 ‘반항’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악마를 향한 반항’이다. 가츠는 ‘진정한 신’에게 반항했던 적은 없다. (애초에 만난 적이 없다.)
악마들이 신의 탈, 혹은 천사의 탈을 쓰고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아버지=진정한 신’은 이러한 무질서를 방관한다. 이러한 신의 부재와 무관심이 악마의 번영을 낳았기 때문에 나는 가츠의 반항을 궁극적으로는 신을 향한 반항이라고 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침묵하는 신에 대한 가츠의 절규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는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마의 존재들의 등장에 기도하는 파르네제나 기타 등장 인물들을 가차 없이 비웃는다.
신은 이 땅에 기적을 간단히 내리지 않는다고 근엄하게 답하는 파르네제에게 가츠는 일갈한다. 초자연적인 현상,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현상이 ‘기적’이라면 자신은 이미 실컷 보아 왔다고.
마족들의 등장 앞에 두 손을 모으며 “신이시여”를 내뱉는 파르네제에게 가츠는 또 다시 화를 낸다. 기도하면 두 손이 놀기 때문에, 기도 따위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두 손으로 마물들을 물리치는 것이 훨씬 더 자신이 살 확률이 올라가기에 그는 화를 내는 것이다.
가츠는 자신만을 믿는다. 신이건 악마건 그는 괘념치 않는 듯 보인다. 그는 신앙을 가진 사람도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악마 숭배자도 아니며 자연 숭배자도 아니다.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예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당장,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그는 믿고 그에 소용이 없는 것이면 믿지 않는다.
신을 포함한 타인을 믿고 타인을 기대며 살아가기에는 그의 태생부터가 너무 죽음과 가까웠다 할 수 있다. 만화에서는 주로 그의 타인불신과 애정결핍적인 성격, 좀처럼 집단과 융합하지 못하는 솔로플레이적인 면모를 부각시켰지만, 실제로 그는 매우 타인의존적이다. 그리피스가 자존심은 높았지만 자존감이 낮았다면 가츠의 경우는 자존심과 자존감 모두 낮은 케이스이다. 가츠는 감비노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음에도 감비노에게 인정받는 것만을 원했고 또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감비노는 가츠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츠를 학대하여 가츠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했지만 그럴수록 가츠는 더더욱 감비노를 귀찮게 만들었다. 감비노는 결국 초강수를 두게 되고, 가츠는 그 유명한 ‘등짝을 보자!’는 대사와 함께 용병단을 떠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살해라는 원죄를 짊어진 가츠. 그는 자신의 아픈 유년 시절의 기억과 함께 이 원죄를 후에 캐스커를 만나서 풀기까지 버리지 못하고 짊어지고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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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비노를 살해하고 용병단을 떠난 가츠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한 마디는 위의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은 가츠가 커서 성인이 되고 나서도 가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같은 건 가질 겨를도 없었다. 차라리 이런 생 따위 죽어버리면 편할 텐데도, 몸은 멋대로 움직였다. 그의 생존에 관한 본능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런 그의 생존 그 자체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은 그리피스와 지극히 대조적이다. 가츠를 보고 있노라면 그는 ‘혈혈단신’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짐도 별로 없고, 인상에 남는 거라고는 거대한 칼 한자루 뿐이다. 여기 있다가 저기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는 걸리적 거릴 것이 없다. 별로 폼은 나지 않더라도 그는 얽매임이 없기에 자유다. 자유이기에 그는 진정 살아 있는 존재인 셈이다. 그는 지위나 명예, 돈 등에 의존하지 않는다. 지독히 불신적인 성격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는 것은 저런 겉치레의 것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돌도레이 성 공략 이후 그리피스가 백봉 장군의 자리에 오르고 매의 단원들 또한 작위를 받게 되었을 때에도 가츠는 여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남의 힘, 남의 손을 빌려서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한 회의가 있는 것이다. 가츠가 매의 단을 떠날 때 그는 떠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라는 대사에서 나오듯이 그는 나만의 것,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어했다.
에리히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라는 책을 잠시 빌려서 이야기하자면 그리피스는 소유적 삶을 택했고 가츠는 존재적 삶을 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피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남의 것을 빼앗아 차곡차곡 쌓아가는 삶을, 가츠는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 셈이다.
그런 가츠의 선택을 동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유일하게 쥬드만이 그의 결정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인다.
큰 남자가 결정한 거야. 보내 줘.
쥬드는 그리피스 밑에 있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일생의 사랑을 포기한, 비겁한 남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쥬드는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최고가 될 것 같은 녀석 아래 있자.’는 결정을 할 수 있었던 현명한 남자라고도 할 수 있다.
쥬드는 캐스커의 행복을 바랐다. 그리고 그걸 이뤄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가츠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츠를 말리지 않고 떠나 보낸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았을 때 그리피스 옆에 캐스커가 계속 남아 있을 경우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그건 쥬드가 캐스커의 본질을 꿰뚫어 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본인들보다도 더 빨리 눈치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츠가 그리피스를 만나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가츠가 가츠답게 살아갔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츠는 소유적 삶을 추구하는 그리피스를 만나면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동시에 또 자신이 가진 장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깨달아 갔을 것이다. 그리피스와의 만남은 가츠의 욕망을 일깨웠다. 그의 바닥과도 같은 자존감의 늪은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 따위는 될 수 없다.’는 수렁에 빠져서 그리피스를 벼랑으로 몰고 가긴 했지만, 동시에 그건 ‘이제는 나도 나 스스로 무언가가 되어 보고 싶다.’는 외침이기도 했다. 즉, 가츠가 그리피스를 떠나려고 했을 때 그는 ‘그리피스의 대등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망, ‘나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오랫 동안 잊고 있었던 존재론적인 욕구가 솟구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츠의 욕망은 양날의 검이 되어 가츠를 상처 입혔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 간다.. 저는 그런 삶은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피스의 저 대사를 가츠는 자신의 폐부를 찌르는 듯이 들었을 것이다. 감비노의 죽음 이후, 다시 만나게 된 인정 받고 싶은 대상인 그리피스가 자신을 저렇게 평가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비록 그리피스가 가츠를 염두에 두고 저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가츠는 그렇게 듣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저 대사는 그리피스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견딜 수 없이 텅 빈 삶’이기 때문에 그리피스는 ‘의미 없이 반짝이는 성’을 향해 시체의 산을 쌓아간다. 이 또한 그다지 정상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우수한 부하입니다. 여러번 함께 사선을 넘은... 나의 꿈을 위해 몸을 던지는 소중한 동료.. 하지만 내게 있어 친구란.. 다릅니다. 결코 남의 꿈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정하고 나아가는 자... 그리고 그 꿈을 짓밟는 자가 있다면 전력을 다해 대항하는.. 만약 상대가 나라해도.. 내게 있어 친구란 그런 대등한 자라 생각합니다. | ||
샬롯 공주와 그리피스의 대화는 가츠를 깊게 상처 입혔다. 그건 그리피스가 준 새로운 상처가 아니라 가츠가 생존하느라 잊고 있었던 ‘인정 받고 싶음’ 에 대한 욕망을 그리피스가 일깨웠기 때문이다.
이 대화에 대하여 그리피스는 이미 가츠를 대등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츠가 그리피스를 오해했다는 평가는 옳지 않다고 본다. 그리피스는 재생의 탑 지하에서 고문당하고 있던 시절에서도 가츠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그리피스가 가츠의 존재를 이해하게 된 시점은 강마의 의식 마지막에 ‘바친다.’라고 말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너만이 내 꿈을 잊게 해줬다.
말했듯이 그리피스의 ‘꿈’은 ‘멋진 꿈’이 아니라 텅 빈 자신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 이 ‘꿈’을 잊게 해주었던 존재인 가츠. 사람이 언제 꿈을 잊을까? 바로 현실에서 행복할 때일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러운 순간 사람은 미래를 잊는다.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사람은 미래를 말하며 미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법이니까.
가츠와 함께 있을 때만이 그리피스는 자신이 ‘현실’에서 ‘살아 있는’ 기쁨을 느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미래의 꿈과 이상 속에서가 아니라.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자신은 더 이상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현실이 행복한데 미래를 위해서 현실을 억누를 이유가 무엇이 있냐는 것이다.
그리피스는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반드시 계속해서 이겨야만 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지위에 있었다. 평민으로 시작해서 너무나도 높은 지위를 원했기 때문에 가진 것 또한 너무 없었다. 배수진으로서의 삶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에게 가츠라는 존재, 오로지 ‘지금 당장 살아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이 신기한 존재는 그리피스가 잊고 있던 ‘생의 의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리피스는 가츠를 통해서 자신에게 부족한 ‘존재적 삶의 양식 -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양식을 받아들이며 미래가 아닌 현실의 행복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반면 가츠는 그리피스를 통해 ‘지금 당장 무조건 살아 있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며 ‘미래’를 조금씩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 따윈 아무도 원하지 않는’ 다는 자신의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 대등한 존재로서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감비노의 컴플렉스를 여기서 극복할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가츠의 지독한 타인 불신과 자기 불신은 그저 처절한 생의 방황이랄까 생의 싸움의 모습으로 베르세르크 전체를 지배한다. 특히 초창기의 모습과, 강마의 의식 이후의 모습(1~4권, 로스트 칠드런의 장)은 그야말로 아귀와도 같은 모습으로 현현한다.
혹자는 가츠가 ‘자기 자신만’을 믿는 ‘강인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가츠는 매우 여리고 연약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그리피스의 추함이 외모적 아름다움에 가려졌듯이 가츠의 약함은 외적인 강함과 외적인 근육으로 가려진다.
그는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발걸음에는 방향이 없다. 그가 어린 시절 내뱉었던 ‘어디로...?’라는 물음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계속해서 싸워나갈 뿐이다. 삶의 방향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는 몇 번이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피스와 대등한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일념 하에 매의 단을 떠난 것이 그 첫 번째이고, 강마의 의식 후 백치가 된 캐스커를 두고 혼자서 떠나버린 것이 그 두 번째이다.
위에서도 가츠의 ‘떠남’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가츠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굳걷했더라면 가츠는 그리피스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는 그리피스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그리피스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것, 그가 지독히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라는 것, 자신의 능력보다 좀 더 허세가 심하다는 것 등을 깨닫고는 그의 겉으로 번지르르한 말 속에 숨겨진 그의 연약함을 찾아내어 그의 곁에 친구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드시 표현해야만 친구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자존감이 낮은 가츠 눈에는 그리피스는 어린 시절의 캐스커와 마찬가지로 숭배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피스를 읽는 데 실패했고 이는 곧 자신의 실패와 그리피스의 실패로 이어진다.
가츠가 두 번째로 떠난 건 캐스커인데, 이 과정 또한 그의 방향감각의 상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감비노가 가츠를 팔아넘겼을 때와 마찬가지로, 견딜 수 없는 삶의 순간이 다시 온 것이다. 가츠가 그리피스의 파멸을 그런대로 잘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농담을 하는 여유마저 가끔 보여준다.) 가츠는 캐스커의 상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어버린 매의 단과 자신을 배신한 그리피스에 대한 분노도 컸겠지만 만약 캐스커가 멀쩡했더라면 가츠가 저렇게 정신줄을 놓고 떠나가버렸을까?
가츠는 매의 단은 떠났지만 캐스커를 떠난 적은 없었다. 가츠는 캐스커를 좋아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가츠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싫어하지만 캐스커와의 동침만은 괜찮았다고 했다. 가츠가 떠난 큰 이유 중 하나가 캐스커 때문이라는 사실도 간과되어선 안 될 부분이다. 달리 말하자면 매의 단에 캐스커가 없었다면 가츠가 그리피스 곁을 떠났을까?
쥬드가 캐스커를 안고 싶지 않냐고 묻자 ‘지금의 나로서는 안 된다.’는 답변은 그가 왜 그리피스와 동등한 위치에 그토록 서고 싶어했는가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이 된다.
베르세르크는 남녀관계에 대한 기류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다른 소년만화나 순정만화가 취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소년만화의 경우 전투 중에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부끄러움과 수줍음이 동반되는 소년다운 과정이며 동시에 소년의 육체적 욕망은 개그화, 코믹화되어서 농담조로 승화된다. 이 둘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주변의 동의를 구하는 아이들의 사랑’이며 ‘어른들의 관심사’가 된다. 순정만화의 사랑은 당연히 언어적이면서도 동시에 소년만화보다는 좀 더 육체적인-가벼운 스킨십이 긴장감을 낳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베르세르크는 이 두 가지 공식 모두를 깨뜨린다. 베르세르크에서 사랑은 언어적 표현의 대상이 아니며 주위의 동의를 받는 대상도, 수줍음과 부끄러움의 대상도 아니다. 이는 철저한 행위적인 표현의 대상이며 이는 노골적인 성애 장면으로 표현된다. 이런 장면에서조차도 친절한 설명이나 등장 인물의 감정 표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섬세한 펜터치로 여러 각도나 인물의 표정, 시선, 조명과 빛으로 전반적인 이미지로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베르세르크의 성은 철저한 어른들의 전유물로 그려진다. 베르세르크의 성은 어린아이가 가질 법한 호기심이나 신비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생활의 일부, 전쟁터의 일부로서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 입장에서 좀처럼 감정 표현 한마디 없는 그리피스나 가츠의 연애적 감정이 캐스커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둘의 연애적 감정은 언어적 감정의 표현 대상이 아니라 육체적 표현의 대상이다. 그것은 어른의 사랑이기도 하며 그들의 사랑이 진지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가츠는 그리피스-캐스커 사이에 독립한 존재로서 진입하는 데 실패했다. 말했지만 이 둘 사이는 가츠를 만나기 훨씬 본래부터 성립된 사이이기 때문에, 가츠로서는 역부족일수밖에 없다. 이 한계가 가츠가 떠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추후에 가츠와 캐스커가 연인으로서 맺어졌어도 이 둘 사이에는 그리피스라는 존재가 빠질 수가 없다. 캐스커는 여전히 그리피스를 잊지 못한다. 만약 그리피스가 캐스커를 선택했더라면 캐스커가 가츠와 연인이 되었을까? 이 물음은 가츠가 아니라 하더라도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No.2로서의 가츠의 위상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재림한 그리피스와 마주쳤을 때 캐스커가 그리피스를 알아보는 눈빛을 하자 느꼈던 가츠의 절망과 일맥상통한다. 캐스커는 단지 자신의 자식을 알아보았을 뿐인데도, 가츠는 또 다시 이런 걸 알아차릴 여유가 없다.
운명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베르세르크의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진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가츠는 운명에 대해 반항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운명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다. 신이건, 운명이건, 인과율이건, 그는 무시해버린다. 그것들이 아무리 삶을 옥죈다 하더라도 눈을 돌려 버린다. 불사신 조드의 경고 ‘이 남자가 너의 진정한 친구라면 너에게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를 무시해버린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예언들이나 성직자들의 말도 무시해버리는 것도 그렇다. 그의 삶의 척박함이 ‘미래 따위’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게 한 것이다. 운명해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는 역설적이게도 운명을 받아들이는 위치에 놓인다. 운명을 알고 적극적으로 개척하려고 하던 그리피스와는 다른 점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계속해서 싸우지만 실은 삶에 있어선 매우 수동적인 위치에 놓인다. 다른 무언가, 좀 더 거대한 힘에 계속해서 휩쓸리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가츠의 태도는 탄생제의 장 이후 캐스커를 구출하고는 달라진다. 마녀 플로라와 시르케의 만남은 진정한 ‘이 세계의 근원인 힘’이 악마와는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끊임 없는 악의의 뭉침인 마족들과 다른 선의가 깃든 세계의 근원과의 만남은 가츠에게 자신이 어떤 운명에 휩쓸렸는지, 어떤 연결고리를 담당하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여기서부터 가츠는 ‘모르는 운명’에 휩쓸리던 시절에서 벗어나 ‘운명을 알아가는 쪽’으로 바뀐다. 자신이야 싸우다 죽으면 그만이지만 캐스커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이다. 자신의 죽음은 캐스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혼자만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한 가츠에게, 비록 캐스커가 그리피스에게 마음은 가 있다 할지라도(적어도 가츠는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보증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가츠는 묻는다. 지킬 것이냐, 복수할 것이냐.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그리피스가 복수의 대상이라는 것조차도 흐려져 간다.
그녀석을 본 순간 살의를 잊었다. 그것이... 용서가 안 돼!
그리피스가 한 잔인무도한 짓을 제쳐놓더라도 그에게 있어 그리피스는 어찌보면 동정과 이해의 대상이기도 하다. 가츠는 자신이 무언가를 지켜 나가면서, 또 소유해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동경을 받아가면서, 그리피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캐스커가 미쳐버린 지금 가츠는 어쩌면 최초로 그리피스가 느껴봤던 고독을 느껴보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피스는 항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고, 그것을 굳이 가츠에게는 감추려고 들지도 않았다. 가츠는 이런 그리피스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 굳건한 자신감에 매혹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재림한 그리피스가 가츠에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러한 의미에서 사실이다. 그리피스는 본래 그러한 성격이었고 ‘너만은 알고 있었다.’는 말 또한 그러하다. 적어도 그리피스는 가츠를 속이지는 않았다. 순진했던 쪽은 가츠였던 셈이다.
이러한 그리피스를 알고 있었던 가츠가 그리피스의 선택에 순도 100퍼센트의 증오를 오랫동안 간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독자들 또한 그리피스를 욕하면서도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인생이 망해버린 그리피스가 그냥 얌전히 안식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이해할 수 없다면 좋았으련만, 가츠의 광기는 그리피스라는 존재의 선택과 캐스커의 정신 놓아 버림으로 더욱 불이 붙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츠는 자신이 왜 그리피스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지 못했는가, 고문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그리피스 앞에서 좀 더 말조심을 하지 못했는가 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 후회를 했으리라고 본다. 캐스커와 연인 관계가 된 점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으리라 보지만, 그리피스의 캐스커를 향한 마음이 생각보다 컸다는 점에 대해서는 꽤 놀랐으리라고 본다. 한마디로 시간이 흐르면서 복수심보다는 그리피스를 향한 동정심이 커져갔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러니 저러니 해도 평민 출신의 잘난 용병단장이었을 뿐이다. 왕의 분노에 바닥까지 떨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을 뿐인 것이다. 그런 그리피스를, 너무 많은 존재들이 기대고 또 기대했다.
이렇게 작은 손으로 너무 많은 것을 쥐려고 했어.
캐스커의 천추의 한이 서린 한마디, 모든 것이 벗겨진 그리피스의 존재를 이제서야 들여다 본 캐스커의 감상은 저런 것이었다. 골목길에서 뛰어 놀던 대장놀이를 하던 아이의 모습. 대체 나는 무엇을 꿈꾸었던 것인가.
그리피스 대장은 동화속 인물 같아서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그리피스라는 존재의 속살인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캐스커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가츠와의 만남은 진정이었지만 그리피스를 떠날 수는 없다. 자신은 본래부터 그리피스에 매인 존재였던 것을 캐스커는 다시 그 운명의 고리를 깨닫는다.
초반 로스트 칠드런에서 보여주었던 마족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에서 벗어나 탄생제에서부터 가츠는 길을 달리 걷는다. 그리피스라는 존재에서 진정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자신이건, 캐스커건, 이제 더이상 그리피스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리피스라는 존재에서 벗어나자.. 이 둘이 연인이 된 것 또한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둘의 사랑이 진정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가츠와 캐스커 모두 알고 있을 터였다. 현재 가츠를 지탱해주는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요정의 섬으로 가는 여정에서도 그리피스의 존재는 대륙 사람들에게라면 모를까 더이상 가츠 일행에게 어떤 존재적인 의미로서 다가오는 장면은 없다. 가츠는 새로운 동료와 새로운 운명을 선택했다. 비록 인과율이 그를 내버려둘지는 미지수의 문제이지만, 그가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하며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올 테면 와 봐라!’라는 태도는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고 생각한다.
출처는 여기:
https://m.blog.naver.com/liannewp/110179256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