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캐스커
베르세르크의 중심 인물인 가츠와 그리피스에 비해 캐스커는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 편이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츠나 그리피스에 비해서 캐스커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가츠와 그리피스, 캐스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캐스커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가츠와 그리피스 간의 동성애적 관계가 지나치게 돋보인 탓이 크다. 나 역시 처음 베르세르크를 읽었을 때 느꼈던 혼란은 가츠와 그리피스 간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왔다. 그리피스는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설정이었는데다가 타인에게 집착하지 않는 그리피스가 가츠에게 지나치게 몰입하는 모습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기 충분했다고 본다.
남자들의 우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라고 하기에는 그리피스가 조금 오버하긴 했지만) 여성 독자의 경우 이를 동성애의 서사시로 읽기 쉽다.
‘너는 내꺼야.’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가츠와 그리피스의 만남이나, ‘내가 너를 구하는 데 일일히 이유가 필요한 건가..?’라는 닭살 돋는 대사나, 가츠가 떠났다고 한 번에 모든 것을 잃은 듯이 무너져 내리는 그리피스의 모습이나, 공주와 하룻밤을 보내면서도 가츠를 생각하는 모습이나, 고문실에서도 가츠만을 생각하는 모습이나, 마지막 강마의식 때에 ‘너만이 내 꿈을 잊게 해줬다.’는 대사라던가...
적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베르세르크가 동성애라는 금기를 가차 없이 깨버리는 만화이기는 하지만(가츠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그리피스의 성매매적 행위 등) 그렇다고 해서 베르세르크가 여성향적인, 달리 말하면 야오이적인 트렌드를 지닌 만화는 아니다. 오히려 베르세르크는 지나치게 남성적인 기반 위에 서 있는 만화에서 나오는 동성애적 분위기가 더 강하다. 마초적 기반 위에서 동성애는 흔한 일이다. 감옥에서의 동성애는 반드시 게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듯이 전쟁터에서의 동성애 또한 마찬가지로 읽혀진다. 남성 성욕에의 무한 긍정인 셈이다. 베르세르크에 자주 나오는 섹스 장면들은 사랑과는 매우 무관한 장면들이 절대 다수를 이룬다. 정복한 대상을 유린하는 것은 하나의 옵션이자 놀이일 뿐,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원칙에의 종사일 뿐이다.
그리피스의 본성이 ‘소유’라는 점에서 봤을 때 그리피스가 가츠를 소유하려고 했던 점은 당연하다. 그는 우수한 장기말이었다. 물론 그의 존재가 점점 더 커져서 그리피스를 잡아 먹게 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연애적 감정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그리피스의 인격적 미성숙은 그가 타인을 포용하고 사랑하기에는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점은 앞에서 충분히 이야기한 바 있다. 가츠가 떠나려고 했을 때, 그리피스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수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미성숙한 인격은 캐스커가 그리피스를 배신하고(!) 가츠와 연인이 된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리피스가 캐스커를 강간하는 것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을 인격적 주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의 장난감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피스에게 ‘여자’ 혹은 ‘여성과의 연애’라는 점이 자신의 인생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리가 만무하다. 많은 순정만화에서 남자들이 연애나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과는 달리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남성상에서 여자, 여자와의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낮다. 그리피스가 여자에게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모습이 상상이나 되는가? 그에게 있어서 여자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이며 달리 말하자면 성욕의 대상, 노예적 존재, 있어서 편한 존재, 나를 받아주는 존재 정도가 된다. 그리피스가 여성에게 매너가 좋으며 신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가부장적이며 마초적인 남자라는 건 읽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자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리 잡지 못하는 세계관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중심축이 되어 흘러갈 수가 없다. 특히 그리피스쪽 스토리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피스의 여성관은 지독하게 노예적이며 도구적이다. 그리피스가 샬롯 공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지위,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샬롯 공주를 유혹한 건 캐스커조차도 아는 사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리피스가 정략 결혼의 형태로 꿈의 마무리를 지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리피스에게 캐스커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
그리피스에게 캐스커는 이미 자신의 여자였다. 동침하거나 하지는 않았어도, 내 것이라는 선언을 하지 않았어도 이미 뼛속까지 자신의 것이라는 자신이 있던 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자신감은 어느 정도까지 였는가 하면, 자신이 공주와 결혼한다 하더라도 캐스커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까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내가 바람을 피운다 하더라도 너는 나를 전부 받아들여 주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던 셈이다. 캐스커 또한 자신이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리피스와 공주 사이가 설령 가짜 사랑이라는 점을 알았어도 캐스커는 버텨내지 못했다. 만약 캐스커가 여자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서 그리피스의 꿈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동료로서의 자리는 가츠에게 뺏기고 여자로서의 자리는 공주에게 뺏겨버린 캐스커는 그야말로 설 곳이 없었다.
‘진정한 아내’라는 훈장이 캐스커에게는 있지만, 그런 위로로 버텨내기에는 그리피스의 공백이 너무나도 컸다. 캐스커도 여자였기 때문이다. 설령 그리피스가 공주와 정략 결혼하여 왕이 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리피스가 캐스커를 옆에 둔다고 하더라도 캐스커의 처지는 열악할 수밖에 없다. 그리피스의 진정한 연애적 감정이 캐스커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말했듯이 그리피스에게는 타인이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낮다. 특히 여자나 연애 같은 일들은 매우 부수적이고 사소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점을 날카롭게 꿰뚫어 본 남자가 쥬드였고 그래서 쥬드는 캐스커가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가츠만이 캐스커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본 쥬드는 결과적으로 옳았다.
그리피스는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원했다. 그리고 그리피스는 그 존재의 이름을 ‘친구’라 명명했다. 그리피스에게 ‘연인’은 자신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여자’가 자신과 동등하게 맞먹고 자신의 ‘꿈’과 같은 비중을 갖는다는 건 그리피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자와 연인, 사랑, 연애는 부수적인 일이고 자신의 지배 하에 있어야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피스는 하여간 대등한 존재를 원했고 그것을 친구라 말했지만 그건 동시에 대등한 ‘적’을 원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게 결국 그 둘은 적이 되어버렸다.
베르세르크는 남자가 사랑을 통해서 성장하는 순정만화의 스토리와는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 남자를 성장시키는 것은 남자이며, 남자를 통해서 남자는 변화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므로 대등하고 동등한 관계는 남자 사이에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의미 있는’ 관계는 남자 사이에서만 가능한 셈이다. 여자는 필요한 존재, 남자를 따뜻하게 해주는 존재와 같은 부수적인 위치에 머무른다.
그러나 여성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독해가 쉽지 않다. 여성에게 있어서 연애와 사랑이란 인생의 의미만큼 중요한 경우가 많으며 반대로 우정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지을 정도로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나도 이러한 편견이 마음이 아프지만 실제로 여성의 삶은 남성을 따라 가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의 우정은 흔히 과소평가된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의 축적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들 간의 뜨거운 우정을 우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랑으로 바꾸어 읽기를 즐겨하게 된다.
그것이 설령 적이라고 해도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찾는 그러한 갈급. 그리고 이러한 존재가 인생에서 연애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 이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남성의 로망이며 남성의 스토리텔링이다.
베르세르크가 지나치게 남성적인 만화라는 사실을 잘 생각해 보면 결국 남성적인 만화는 어느 정도 동성애적 서사가 내포될 수밖에 없음을, 베르세르크는 역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전쟁 영화에선 여자가 거의 등장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캐스커의 존재는 가츠와 얽매이면서 그 비중이 달라지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터프한 남성 가츠는, 외양은 여성적이나 속은 매우 남성적인 그리피스와는 정 반대로, 매우 여린 여성적인 자아를 갖고 있다. 가츠는 일단 가부장적인 남성은 아니다. 이는 나중 시르케나 파르네제, 마녀 플로라 등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다. 그는 남자건 여자건 아무래도 신경쓰지 않는다.
캐스커를 인간 그 자체로 보아주었던 건 가츠였다. 캐스커의 이야기를 캐스커의 입장에서 들어주었고 그녀의 아픔을 받아들여주었다. 둔한 가츠가 얼마만큼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캐스커는 적어도 본능적으로 가츠가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용기 내어서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가츠는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도구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 낮은 자신감과도 연관이 되어 있겠지만, 동시에 전쟁터에서는 모든 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캐스커는 그리피스를 숭배하면서도 그와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가 가츠와 만나게 되면서 겨우 쌍방 통행적인 의사소통 관계를 성립하게 된다. 아무리 열렬한 사랑도 일방 통행이 지속되면 식는 법이다. 그리피스와 가츠의 대결에서 그리피스가 진 후, 떠나가는 가츠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건 캐스커의 진심일 터였다. 이 시기 쯔음에 캐스커는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그리피스에게서 어느 정도의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자기밖에 모르는’ 그리피스에게서 지쳐가고 있던 캐스커. 자신을 부하가 아닌 동료로 받아들여 준 가츠에게 어느 덧 깊은 감정을 갖게 된 건 자연스러운 전개다.
보통 만화 전개 과정에서 좋아하는 상대가 바뀌는 케이스는 흔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볼 때 캐스커의 갈아타기(?)는 어느 정도 욕을 먹을 만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리피스가 공주와 맺어졌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피스와 맺어질 수 없다는 이유로 캐스커가 가츠와 연인이 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캐스커는 자신의 첫사랑을 극복했으며 가츠에 이르러 진정한 사랑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외적인 매력에 빠져서 그리피스를 숭배했던 시기의 캐스커는, 사랑을 하는 여성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아이돌을 숭배하는 10대 소녀팬의 모습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숙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소통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동등한 인격체와의 만남이다. 적어도 그리피스가 그렇게 매의 단을 허무하게 떠나버린 이후로 캐스커는 그리피스에 대한 환상을 깼을 것이다. 캐스커가 가츠에게 마음을 고백할 때에는 캐스커는 그리피스가 회복 불가능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때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피스가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자신은 가츠를 선택하겠다는 결심이 선 상태였다는 뜻이다. 캐스커는 그리피스를 극복했으며 오히려 그리피스보다는 가츠를 간절하게 기다렸다는 해석까지도 가능하다. 이 시점에서 캐스커를 지탱한 것은 그리피스에 대한 연모의 정보다는 매의 단을 지키자는 의리에 더 가까워 보인다.
베르세르크에서 가장 사랑이 충만하고 따뜻한 광경은 역시 캐스커와 가츠의 사랑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상처를 딛고 일어선 두 사람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앞으로 가츠가 겪을 수많은 고난들을 지탱해주는 힘이 될 정도로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욕구와 쾌락만을 앞세우는 장면들만이 넘쳐나는 베르세르크에서 한 줄기 빛이 되는 장면이다.
밥조차도 먹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던 캐스커 또한 가츠에 의해 구원받았다. 항상 틱틱거리고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던 캐스커. 솔직하지 못하고 뭔가 군기반장처럼 굴었던 캐스커. 하지만 캐스커는 가츠와 연인 관계가 되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뀐다. 가츠의 얼굴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는 장면이나, 가츠에게 찰싹 붙어서 애교를 부리는 장면이나, 제발 살아만 있기를 바라는 모습 등은 그리피스의 질투심을 미친 듯이 폭발시키게 되긴 하지만, 하여간 캐스커 본연의 모습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피스가 캐스커의 여성성을 억누르는 존재였다면 가츠는 캐스커의 여성성을 회복시킨다. 그리피스가 캐스커에게 주었던 메시지는 ‘너는 내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해.’라는 아버지의 것이었다면 가츠가 캐스커에게 주었던 메시지는 ‘너는 내가 지켜 줄게.’라는 어머니의 것에 오히려 가깝다. 그리피스가 캐스커를 여자로 보긴 했지만 부속물로 취급한 것과는 달리 가츠는 캐스커를 동등한 연인으로 보았으며,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여자라는 존재로서 캐스커에 동정심을 느꼈다.
결혼을 한다면, 그리피스라면 캐스커를 계속해서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겠지만 가츠라면 캐스커는 집에다 두고 본인은 용병하러 다니지 않겠는가? (캐스커야 따라가겠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그렇다.
가츠는 전사로서의 캐스커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캐스커의 여성성, 캐스커의 보호본능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이는 캐스커에게 미래를 주었다. 그리피스와는 꿈꿀 수 없었던, 다정하고 따뜻한 스위트홈을 바라는 미래를.
꿈을 갖게 된 여성으로서의 캐스커는 내가 보아도 매력이 넘쳤다. 더이상 샬롯 공주도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리피스 구출 작전에서 샬롯 공주를 대면했을 때 계속해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며 그리피스에게 미련을 두는 듯한 발언들을 하여 가츠를 속썩이기는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한 순간에 돌아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다 이해가 가는 정도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캐스커가 가츠나 그리피스 둘 중에서 고민을 할 때 그녀가 어떠한 세속적인 계산도 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그리피스의 첩이 되는 것이 가츠의 부인보다 더 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리피스가 지독하게 속물적인 것과는 달리 캐스커는 한 번도 그리피스를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존재’로 여긴 적은 없었던 듯 싶다. 캐스커야 그리피스가 조그마한 도적 두목으로 머물렀어도 끝까지 충성했을 것이다. 이는, 말했지만, 남성으로서 연애 대상으로서의 충성이라기보다는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캐스커를 여성으로서 일깨운 존재는 아무리 보아도 그리피스보다는 가츠다.
그리피스 구출 후 캐스커는 자신이 그리피스보다는 가츠와 함께하고 싶어한다는 점을 깨닫고 훌쩍인다. 그리피스는 캐스커에게 있어서 오히려 부모에 가까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자신은 그리피스와 남아야 한다는 점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슬퍼한다.
그리피스를 사랑할 때는 가츠가 옆에 있었고, 가츠를 사랑할 때는 이제 그리피스 곁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운명의 장난 속에서 이제 강마의 의식이 치러진다.
베르세르크에서 그리피스는 강간을 두 번 하는데, 첫 번째가 샬롯 공주이고 두 번째가 캐스커이다. 샬롯 공주의 경우도 나는 강간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가 제대로 된 동의를 받은 상태도 아니었고,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야말로 창문 열고 쳐들어 와서 부들부들 떠는 공주를 유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하여간 사랑해서 한 게 아니었다는 젤 문제다. 중요한 점은 샬롯 공주를 찾아가게 된 계기가 가츠가 떠났다는 데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그리피스는 자신이 힘을 잃어버렸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성적인 행위로 표출시킨다. 많은 독자들이 황당해했던 점이, 가츠가 떠났다고 대체 왜 샬롯 공주와 하룻밤을 갑자기 보내느냐는 점이었다. 늘 침착해보였던 그리피스의 저런 돌발적인 행동에 독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피스가 매우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며 자신의 욕구에 매우 충실한 이기주의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자존심이 꺾였을 때 그것을 남근으로부터 보상받으려는 행위는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도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꺾인 자존심이 매우 컸기 때문에, 그 행위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일국의 공주 쯔음이 되어야 충분한 벌충이 되었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아무 여자나 붙잡고 하룻밤을 보냈어도 되었을 일인데 그리피스의 에고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일국의 공주를 정복했다는 정복욕이 자신의 일부인 가츠가 자신을 거절한 상처를 약간은 회복시키리라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었겠지만... 물론 결과는 처참했다.
대부분이 다 동의하는 베르세르크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인 캐스커의 강간 장면은 베르세르크의 악명을 높이는 데 절반 정도의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 또한 읽으면서도 몇 번을 경악했는지.
중요한 점은 그리피스가 힘을 회복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여성과의 성애라는 점이다. 보통 힘을 회복하고 나서는 다른 일을 먼저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적을 죽인다던가 주위를 청소한다던가) 여기서는 먼저 여자를 범한다. 이러한 솔직성에 많은 독자들이 두 번 놀라지 않았나 싶은데, 이는 참 직설적인 남성주의적 욕망의 현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피스가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의 첫 번째 행위가 캐스커를 강간하는 점에서 그가 머릿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간에 일차적으로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남성성이 거세당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츠와 캐스커의 다정한 장면들을 불구의 몸으로 날카롭게 살피며 노려보던 그리피스. 이 부분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리피스의 선택이 ‘감정적’으로 이해가 간다. 자신은 고문 당하느라 병신이 되어서 있는데 그 사이에 자기를 그렇게 만든 가츠와 캐스커가 희희낙락대는 꼴이라니. 캐스커 같은 애정결핍 타입은 본래 1명만을 바라보는 스타일이라, 벌써 그리피스는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피스 바라볼 때는 가츠나 다른 동료들은 눈에도 안 찼듯이.
거기에 훌쩍 성장해서 강해져 버린 가츠의 모습은 그리피스를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어느덧 멋진 남자가 되어버린 가츠에 비해 자신은 단 한 번의 실패로도 나락에 떨어질 만큼 실제로는 나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캐스커의 선택은 가츠를 향해 기울고 말았다. 오히려 그 선택이 그리피스가 불구가 되어서 한 선택이었다면 그리피스의 자존심은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캐스커의 선택은 그리피스가 졌을 때, 가츠가 떠날 때 이미 내려졌던 결정이었다. 그것을 그리피스는 참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성적인 묘사가 쉬지 않고 이어지는 베르세르크 특성상 신기하게도 그리피스의 성애적 행위는 캐스커 강간에서 끝이 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리피스가 연모의 정을 느꼈던 여자라고 한다면 캐스커 단 한명이었다. 그리피스와 얽힌 여자가 캐스커 한명 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캐스커와의 정사는 좀 더 관능적이다. 샬롯과의 정사는 일종의 도피 행각으로서의 느낌, 가츠에로의 집착이 느껴져서 무엇인가 분산되었다는 느낌이라면 캐스커와의 정사씬은 훨씬 더 에로틱하다. 강간이면서도 동시에 황홀경을 주는 무엇인가가 거기에는 있다.
그것은 유일하게 그리피스가 남자로서, 여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자신의 니즈를 인정했을 때 보인 욕구이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이 정사씬은 게논 백작과의 성매매적 관계나 계산된 샬롯 공주와의 정사와는 다르다. 그리피스는 친구로서의 가츠의 필요성도 부정했지만 동시에 연인으로서의 캐스커의 필요성 또한 부정하면서 살아왔다. 타인을 부속품화하면서 살아온 인생이었덤 셈이다. 샬롯과의 관계 또한 정략 결혼 정도야 자신이 충분히 참아낼 수 있으며 감당해낼 자신이 있어서 내린 결단이었을 것이다. 독자로서는 그리피스가 계산된 결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이 그렇게까지 강하기만 한 존재였던 것일까? 그리피스의 몰락만큼이나 인간은 나약하다. 남녀 간의 사랑도 이용하려고만 했던 그리피스였지만 실제로는 본인도 캐스커와의 사랑에 빠져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단지 잃고 나서 깨달았을 뿐이다. 캐스커가 자신 외에 다른 남자를 쳐다볼 줄은, 그리고 여성스로서의 모습을 열 줄은 몰랐을 것이다.
가츠 앞에서 캐스커를 마음껏 취한 그리피스는 실은 그가 당한 걸 그대로 돌려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피스 마음 속에서 가츠는 아들, 캐스커는 아내이다. 아버지의 부재 중에 아들이 어머니를 범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리피스가 보복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눈 앞에서 장면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둘이 그리피스 앞에서 희희낙락 한 것도 사실이었고, 허락도 받지 않고 그랬으니 그리피스 입장에선 어마어마한 배신이었으리라.
한편, 캐스커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캐스커는 페무토로 변모한 그리피스를 혼절한 상태에서도 한눈에 알아본다. 만약 가츠가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캐스커가 그리피스를 완전히 거절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캐스커를 백치로 만든 것은 동료들의 전멸과 그리피스의 강간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가츠 앞에서 당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피스는 캐스커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캐스커를 강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해골기사의 덕분으로 일식을 빠져나가긴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그리피스는 캐스커와 가츠를 일이 끝난 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는 게 된다. 한마디로 본래 둘 다 죽여버릴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페무토의 강간은 죽음의 욕구와 휘말려서 더욱 관능미를 품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페무토로서 처음으로 발현한 행위는 지나치리만큼 솔직하다.
가츠 앞에서 캐스커를 범함으로써 캐스커를 벌하고, 또 가츠에게서 자신의 아내를 뺏은 죄를 단죄한 페무토는 열렬한 행위와는 별개로 내내 무서울 정도로 표정이 얼어붙어 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로 단지 쾌락욕구에 충실한 사도를 잘 드러내주었다고 생각한다. 캐스커와 가츠를 향한 증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만한 복수를 그리피스를 효과적으로 해내었다.
나는 또 다른 해석도 제시해 본다. 그리피스가 캐스커를 범한 것은 가츠에게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된다고. 만약 그리피스가 캐스커를 범하지 않았다면 가츠는 매의 단을 전멸시킨 그리피스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가츠의 그리피스를 향한 증오는, 캐스커에 집중되어 있다. 눈 앞에서 유일하게 소중한 존재인 캐스커가 당하는 장면은 이미 어린 시절 강간 당한 경험이 있는 가츠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되살려내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존재로서의 그리피스를 각인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페무토가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한 해석이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고 보이긴 한다. 그래도 또 모를 일이긴 하다.
이외에도 그리피스의 성애적 측면은 흥미로운 면이 많다. 그리피스는 샬롯 공주를 정복한 뒤 이후 다시 재림하여 공주를 모셔왔다고 해도 연인으로서의 다정함은 어디에서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얼어붙었다 하더라도 쾌락적인 면에서는 더욱 충실한 사도인 만큼 이미 정복한 여자에게는 흥미가 없다는 지독한 남성주의적인 사고방식의 발현이 아닐까?
탄생제의 편에서 재림한 그리피스는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가츠와 캐스커와 재회한다. 그리고 가츠가 보호에 실패한 캐스커를 보호한다. 이 그리피스와 캐스커의 투컷씬은 가츠의 마음을 미어지게 만들긴 하지만...
여기서 다시 관계의 구도는 바뀐다. 캐스커와 가츠의 자식의 몸을 그리피스가 빌려서 있는 이상, 이제 아버지는 가츠이고 어머니는 캐스커이며 자식은 그리피스가 된다.
이 끊임없는 삼각관계 속에서 캐스커가 제정신으로 버티는 건 불가능하다. 과거 그리피스의 감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는 캐스커가 제정신을 갖는 게 가능했을지 모르나, 관계 구도가 뚜렷해진 이상 캐스커는 어차피 둘 중 누구도 선택할 처지가 못 된다. 캐스커가 가츠를 선택하고도 마음을 놓았던 것은 그리피스가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큰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캐스커는 그리피스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의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신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예 궁금해하지조차 않는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리피스가 자신을 여자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캐스커는 어떨까? 예전처럼 가츠를 선택하고도 안심할 수 있을까? 불구가 된 그리피스 옆에 남기로 결정한 캐스커의 마음은 의리에 가까웠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리피스가 나를 여자로서 필요로 한다는 자신감은 캐스커에게 없었다. 그렇지만 그리피스가 여자로서 남아주기를 캐스커에게 청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츠 앞에서 강간당한 충격이 대단했긴 하겠지만 나는 캐스커가 정신을 놓아버린 데에는 위에서 설명한 요인도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이제 캐스커는 가츠도 그리피스도 어디도 선택할 수가 없다. 작가 입장에서도 캐스커를 어찌할 수가 없어서 백치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이 지경까지 몰아놓고 그리피스 곁으로 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가츠와 함께 여행을 하거나 가정을 꾸린다는 것도 말이 되질 않는 것이다.
나는 30권 이후의 베르세르크를 읽으면서 가츠에게 많은 여자 캐릭터들이 호감을 표해오는 것이 못내 마음이 걸렸다. 혹시라도 가츠가 캐스커에게 지쳐서 변절하거나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번째 정도 읽을 즈음 그런 걱정은 참으로 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캐스커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되려나 하는 걱정들을 하는 듯 싶다. 그렇지만 나는 캐스커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 여전히 그리피스를 고민하는 가츠에게 큰 힘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자책하는 가츠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혼을 내주고서는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는, 매의 단의 큰 누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존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