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권고사직을 당한 내 경험이 반영된 글이야. 

나는 10년 정도 경력이 있고, 지난 여름 다니던 회사의 경영 악화로 백수가 됐어.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4~5개월을 보냈고, 지금은 경력직으로 입사를 앞두고 있어.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훨씬 탄탄하고 복지나 연봉이 좋은 곳이야. 나는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살던 4개월 덕분에 인생이 달라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혹시나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토리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써. 

1. 퇴사가 결정이 되었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1) 재입사를 염두에 두고 내가 가장 시급하게 채워야할 스펙이 뭔지 알아야겠더라. 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이야. 그래서 연도별로 대표+가장 최근 포트폴리오를 일단 다 파일로 만들어서 정리해뒀어. 내 10년 경력을 증명할 수 있게. 이러면 나중에 입사 지원할 때도 훨씬 수월하더라. 

(2) 제일 시급했던 건 어학점수였어. 학생 때 말고는 본적이 없었어서 ㅎㅎ; 직무마다 다르지만 내 분야는 웬만큼 규모가 있는 회사는 어학점수 제출이 의무더라고. 경력직 여부와 상관없이. 오랜만에 취업 시장에 뛰어들어서 몰랐는데 요즘에는 말하기 시험 성적 제출도 거의 반강제적이길래 일단 그것부터 했어. 그래서 퇴사하자마자 토익/오픽 책을 사서 집에서 공부를 시작했어. 결국 토익은 턱걸이로 900대 진입하고 오픽은 간신히 IH 받고 끝냈어. 한 달 반이 걸림. 

2.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한 일 

(1) 나는 흙수저야. 10년 동안 일해서 서울에서 투룸 전세를 구하니 끝이더라. 어릴 때부터 먹고 사는 것에만 급급해서 회사랑 일 말고는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었어. 수능 끝나고도 남들은 운전면허 따고 여행가는데 나는 알바했음 ㅠㅠ... 그래서 30대 중반인데도 운전면허가 없더라고. 어학 점수를 확보하고 나서 바로 운전면허 취득에 돌입했어. 이것도 한 달 정도 걸렸음.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막상 하고보니 큰 장난감을 다루는 것 같아서 재밌더라. 무엇보다 운전을 할 줄 알면 내 행동 반경이나 삶의 질이 크게 상승을 하는 거니까. 운전을 배우면서 열심히 일해서 차를 사야겠다는 또다른 꿈이 생김. 지옥철 탈출을 꿈꾸는 흙수저!!! ㅋㅋㅋ 

(2)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매우 노잼 인생을 살았어.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게 콤플렉스였어. 취미생활도 딱히 없었음. 근데 수영에 대한 로망은 꾸준히 있었어. 기회가 된다면 배워보고 싶었어. 다들 알겠지만 수영 강좌는 직장인이 듣기에는 시간대가 안 맞음. 자유수영 시간대도 보통 아침 8시나 오후 6시라서 직장인은 수영장을 이용하기 힘들지. 나는 시간 활용이 자유로운 백수니까 수영을 배웠어. 아침에 일어나서 수영하고,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부하고, 또 저녁에 수영하면서 몇 달을 보냄. 이제는 자유형이랑 배영은 어느정도 할 줄 알고, 500m 정도는 어렵지 않게 수영할 수 있어. 내 세계가 넓어진 것 같아서 정말 기쁘더라. 화려한 여름 휴가도 보낼 수 있을 거 같고 ㅋㅋ;

(3) 어학점수 갱신, 운전면허 취득까지 끝내고서는 피아노와 프리미어 프로(영상 편집 프로그램)를 독학했어. 이것도 회사 다닐 때 늘 배워보고 싶었던 거였거든. 둘 다 유투브를 보면서 배움. 피아노는 쉽게 진도가 안나가더라 ㅠㅠ 일단 나는 악보 보는 법도 몰랐거든 ㅋㅋ; 지금은 겨우겨우 동요 몇 곡을 친다 ㅋㅋㅋ 프리미어 프로는 생각보다 간단해서 이제 영상 컷, 붙이기, 자막 삽입 및 효과, 오디오 삽입과 조절 등등을 할 줄 알아. 브이로그 만들기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 이 부분을 면접 때 어필했더니 좋은 반응을 얻었어. 아무래도 내 일이 콘텐츠를 다루는 거다 보니까. 

3. 실업급여로 인생이 바뀌었다 

(1) 실업급여는 28일을 한 사이클로 쳐서 받아. 1일당 6만원대로 책정이 되는데, 곱하기 28을 하면 월 170만원대 후반 정도야. 부양할 가족이 있다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1인 가구인 나한테는 정말 풍족한 금액이었음. 전세라서 대출 이자랑 관리비,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는 딱히 지출할 게 없었거든. 그래서 어학 공부, 수영 배우기, 운전면허 따기 등등에 다 투자했음. 덕분에 4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훨씬 더 할 줄 아는 게 많은, 재미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었어. 먹고 살 걱정없이 자기 개발하라고 누가 돈을 쥐어주는 기회가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 할 줄 아는 게 많아지니까 내 삶의 반경도 넓어지고, 더 많은 걸 꿈꾸게 되더라. 특히 나처럼 흙수저인 토리들은 잘만 활용하면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이 인생에서 정말 귀중한 경험이 될거라고 확신해. 내가 이렇게 혜택을 누려보고 나니까 세금 열심히 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2)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내가 제일 공을 들인 건 시간 관리였어. 맨날 늘어져서 있으면 시간이야 잘 가지만,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평일에는 보통 아침 7시에 기상해서 아침 수영을 가고, 9시부터 6시까지 공부를 하거나 뭔가를 배우고, 또 저녁 수영을 가는 식으로 살았어. 맞아, 회사원 사이클이지 ㅋㅋ 회사를 다니는 패턴으로 사니까 쓸데없는 잡생각도 안 들고, 시간도 잘 가더라. 물론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고 놀러다녔음 ㅎㅎ 

(3) 지금 합격한 회사 면접을 봤을 때 면접관이 내게 물었어. 4개월 동안 뭘 했냐고.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 했어. 어학점수 갱신하고 수영과 피아노, 프리미어 프로, 운전을 배웠다고. 보통 회사에서 요구하는 역량이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잖아. 내가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배웠던 것들이 그 명분이 되더라. 

(4) 풍족한(?) 통장 잔고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어. 퇴사를 하면 퇴직금을 받잖아. 내가 실업급여를 받지 않았다면 그걸 먹고 사는데 다 썼을 거야. 하지만 재취업을 앞둔 지금도 내 통장에는 퇴사할 때 받은 천만원 정도의 돈이 있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돈은 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예전에는 통장에 돈 백만원도 없어서 마음이 너무 팍팍했어. 내 돈은 전부 전세금으로 묶여있었으니까. 근데 이제는 여유 자금이 있으니까 뭔가 자신감이 생겨 ㅎㅎ 취직해서 돈을 더 열심히 모아야겠다는 동기 부여도 되고. 

사실 '인생을 바꿨다'라고 썼지만, 위에서 나열한 일들은 웬만한 토리들은 다 할 줄 아는 것들일 거야. 운전면허도 스무살 앞두고 다들 따는 거고 ㅎㅎ 수영도 애기 때 다들 배우더라. 난 그럴 여유가 없었지만... 그걸 뭐 그렇게 요란하게 자랑하듯이 썼냐고 하면 할 말이 없어. 내가 남들보다 느리긴 한 거니까 ;_;... 그래도 나는 내년 여름에 내가 운전하는 차를 끌고 휴가를 가서 수영을 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콩닥콩닥하다. 권고사직 당한 토리들아! 상심이 크겠지만 지금이 내 세계를 넓혀서 인생을 더 다채롭게 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재미있게 살아보자! 화이팅 :-D 다들 행복한 새해를 보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