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감한 얘기라, 직업이나 장르 비하처럼 느껴질까봐 생각을 좀 정리해서 쓰느라 뒷북치는 모양새가 되었네, 만일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댓 달아줘.
최근 아코/야해 두 제작사에서 스트리밍 원작으로 발표한 작품이 둘 다 공교롭게도 고수위의 씬 위주라 여기 게시판에서 꽤나 격한 글들이 오갔었지.
사람들마다 생각들이 다 다르니 그걸 갖고 뭐라 말할 건 아니고, 그저, 휴덕기 포함해서 20년간 띄엄띄엄이나마 이 바닥의 부침을 보아 온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라 적어볼게.
아주 오래전 일드씨 팠던 톨들은 기억할 지 모르겠는데...
아이노쿠사비라는 소설 원작의 드씨와 애니에서 주인수 역할을 하셨던 세키 토시히코상(통칭 세키상)이라는 성우님이 있었어. 목소리만 들어도 미청년이구나 싶을 정도로, 결코 여리지 않으면서도 색기어린 허스키 톤이 매력적인 성우님인데, 어느날 벨드씨계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이유는,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친구들 사이에 알려져서 이지메당할까봐.
다른 사례로, 일본 성우계에서 전설의 레전드로 통하는 이시다 아키라상(통칭 아-상)이 있어. 소년틱한 목소리면서도 광역계에, 연기력도 장난 아니어서 벨드씨 포함해서 어마어마하게 다작하셨지. 이 분도 어느날 벨드씨계에 더이상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지. 정확한 이유를 밝히진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벨드씨들이 점점 스토리 없이 씬범벅으로 흐르면서 이쪽 장르 자체를 고사하셨던 거라고...
우리나라는 벨드씨가 극 마이너인데다가 역사 자체가 길지 않아서 아직 이런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성우 업계에서는 여러번 시끄러웠었지.
대표적인 사례가 '13년에 성우협회에서 성우들의 품위 유지를 위해 벨드씨에 출연 자제를 협회원(성우들)에게 권고한 거야. 기강 빡센 성우계에서 이건 거의 금지명령에 가까웠고, 당시 적극적으로 반대해주신 용감한 성우분들도 있었지만, 몸 사린 성우분들도 많았지. 나서주신 성우님들이 대단하신 거지, 결코 몸 사린 성우님들을 탓할 수는 없는 거였어.
나는 그래서 앞으로 벨드씨계가 고수위 씬에 집중한 작품들을 주류로 흐를까봐 걱정하고 있어.
이건 성우님들이, 작품 속 캐릭터를 대신하는 '성대'가 아니라, 그 본체가 가정도 있고 사회생활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분들은 직업적 사명감 이전에, 본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온/오프라인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이고.
이번에 직업정신을 거론하며 그분들껜 직업이니 괜찮다는 말들을 많이 봤는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봐.
가장 큰 오류 하나.
그분들은 성우가 직업이지 벨드씨 출연이 직업이 아니라는 거.
벨드씨 출연 제의는 고사하면 그만이야.(위에서 언급한 세키상과 아-상처럼...)
프로 성우가 스스로 작품을 선택했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성우님의 선택을 당연히 존중하고, 이미 선택한 작품에서는 최선을 다하실 거란 걸 의심하지 않지만, 그분들이 다음에도 이쪽 장르에 출연해 주실까 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야.
좀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볼까.
예를 들어 지금 벨드씨에서 활약하시는, 아직 미혼이시거나 신혼이신 성우님들이,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 커서 학교에 들어간다면-을 생각해보자고. (너무한 상상같니? 난 세키상이 딸을 걱정해 더이상 벨드씨 출연 않겠다고 선언하셨단 걸 알았을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어...) 혹은 지금보다 벨드씨가 좀더 양지로 나가고, 동시에 씬위주의 고수위물이 주류를 이루는 바람에 이 사실을 경계한 성우협회가 또다시 말도 안되는 제재를 가한다면-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
벨드씨계가 씬범벅으로 자극적이 되어갈 수록 이런 상황은 좀더 빠르게 다가올 거야.
물론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 당연히 이지메하는 가해자가 나쁜 거고, 직업적 자유를 제한하는 권위적인 협회가 나쁜 거겠지만, 그들이 나쁜 것과는 별개로, 그 사이에 낀 성우님들은 고민할 수 밖에 없어. 사회적인 인간이니까. 그걸 계기로 이쪽 바닥을 영영 뜬다 해도 누가 원망할 수 있겠어.
그래서 나는, 장르의 다양화는 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측면에서는 반가우면서도, 출연하실 성우님들에겐 심리적 장벽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걱정스럽네.
벨드씨판에 뵐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시영준님이 천추세인 2편 플톡에서 한 얘기들이 참 기억에 남아. 시영준님은 이런 퀄리티 높은 성인 컨텐츠 시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아셨던 것 같고, 성우라는 직업의 새로운 가능성에 흥분하신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물론 그분이 무협팬이어서 더 흥분하셨던 것도 있겠지만ㅎ). 천추세인에서 특별출연 정말 많았고, 하나같이 엄청난 연기력들을 가지신 분들이라, 나 개인적으로는 천추세인의 출연 경험을 통해 다양한 성우님들이 많이 벨드씨계에 들어와주시면 정말 좋겠다고 기대를 가졌어.
그리고 이 기대의 반대편 끝에, 만일 앞으로 씬 위주 고수위 드씨가 주류가 되고, 그런 트렌드에 질린 성우님들이 아예 벨드씨계를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지.
(내겐 그렇게 떠나신 세키상과 아-상이 트라우마라서 그래...;;;)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 모든 벨드씨가 진지하고 복잡한 스토리 위주여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소릴 하는 건 아니니까.
원작팬들에게는 일단 좋아하는 원작의 드씨화가 가장 중요할 테니 당연히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고,
나는 다만 성우님의 연기를 벨드씨로도 오래오래 즐기고 싶은 성덕 입장에서 앞으로 이 바닥이 어떻게 흐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좀 복잡한 것 뿐이야. 성우님의 연기야, 광고나 더빙, 나레이션으로도 즐길 수 있지만, 벨드씨는 장편의 연기파티라 귀가 정말 만족스럽거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토리들...없으려나?^^;;;
아직 스트리밍 작품들이 출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 하는 게 넘겨짚기나 재뿌리기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번 두 작품들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 것도 결코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다양한 장르/소재가 나오는 것도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즐거워.
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다음 작품을 선정하느라 고민을 하고 있을 아코/야해가 부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는 수준에서 현명한 선택을 해주길 바라는 성덕의 마음으로 이 글을 썼어.
Ps.
며칠 전 게시판 분위기 좀 격해졌을 때, 성우들 생각은 그렇게 해주면서 작가님 생각은 안해주냐는 제목의 글도 올라오던데...
드씨 제작 텀 빨라지고 상업유명작 줄줄이 나오면서 성우방에 다른 쪽에서 들어오는 비율이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해.
예전보다 확실히 글 리젠도 빨라지고 복작복작해져서 정말 좋아.
같이 앓는 사람들 많아서 즐겁고. 반가워.
하지만 게시판에 저런 식의 제목이 올라오는 건.... 여기 성우방 아니었던가...?;;
원래 게시판 이용하던 성덕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머리채 잡힌 느낌인데.
텃세를 부리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게시판의 정체성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은 좀 해주면 좋겠어...
이왕 글 쓰는 김에 덧붙여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