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소설집 《02》(2010),와 《더 나쁜 쪽으로》(2017)에 실린 단편들에서 발췌해온 문장들이야.
김사과의 작품은 파편적, 해체적, 실험적인 성향이 강하기도 하고 호불호가 많이 갈려서 함부로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좋아하는 편이야.
나 대신 화내주는 느낌도 있고 말 맛이 좋거든ㅠㅠ 워낙 문장 리듬이 좋은 작가라 발췌하면서도 문장이 자꾸 길어졌어.
7년이란 시간 동안 작품의 느낌 역시 달라졌는데 《02》를 관통하는 정서가 '분노'라면 《더 나쁜 쪽으로》를 관통하는 정서는 '무력감'과 '투항'이야. 톨들이 읽으면서 느껴줘.
1.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열 시간의 고통과 십분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백 문장의 진실과 한 문장의 진실은 다르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삼초의 고통이 아니라 천 문장―삼천초의 고통을 안겨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아주 오래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느껴야 한다. 한 번 더 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말이다. 그래야 영이가 당신 마음속에 오래도록, 영이가 죽고 내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02》, 「영이」
2.
이나는 두부공장과 짓다 만 씨멘트 건물, 끊임없이 불어오는 설탕가루같이 흰 연기, 언제나 흐릿하게 빛나는 태양과 무성한 잡초,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낡은 아파트의 세계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에 시달린다. 이나는 매일 밤 노동에 지친 부모의 얼굴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하루에 한 걸음씩 두부공장으로, 두부공장의 삶을 향해―라는 것이 이나 운명의 캐치프레이즈인 것만 같다.
《02》, 「이나의 좁고 긴 방」
3.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냉장고 냄새가 나를 맞이해요. 그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살구색 슬링백이 또각거리고, 이번달 휴대폰 요금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나왔나, 씨발 미용실에도 가야 한다.
《02》, 「이나의 좁고 긴 방」
4.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지루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너는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 내가 대답했다. 나는 대학에 다니지 않습니다. 내 딸은 연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씨티은행에서 인턴을 한다. 너는 뭘 하느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내 손자는 하바드와 스탠퍼드에 동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다. 너는 꿈이 뭐냐. 나는 아무런 꿈도 없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실망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쓸쓸해진 나는 할아버지 그 개새끼가 미웠다. 언젠가 그 개새끼한테 복수할 거라고 굳게 결심했다.
《02》, 「나와 b」
5.
그리고 무엇보다 서울에 대해서 생각했어. 너, 너의 도시, 타인들로 이루어진, 타인의 성지, 모든 것이 타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한 도시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어.
(...)
결국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 한순간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했다. 매순간 삶은 타인들에게 증명되기 위해 갱신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쓰이는 이 글과, 저 책,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지어지는 아파트를 위해서., 부서지고, 다시 생겨나는 서울은 이미 혁명의 땅이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미래에 고정되었고, 그래서 천천히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터질 듯 부풀어오른 꿈과 환상이 도시를 지탱한다. 꿈의 장면은 디즈니랜드, 밤마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악몽, 새벽의 버스와 지하철, 광고판에 붙은 청사진, 구호, 그리고 깃발들, 네온라이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 꿈은 벽에 걸린 스크린 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된다.
《02》, 「매장」
6.
춤을 출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모여 있는 우리들이 아무것도 서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춤 속에서 우리는 거리를 유지한다. 껴안지 않는다. 각자의 춤에 몰두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천국으로 간다. 예의바르고 겸손한 개인주의자를 위한, 그곳은 텅 비어 있다. (오직 음악이 있다.)
《더 나쁜 쪽으로》, 「더 나쁜 쪽으로」
7.
나는 쾌적한 쇼핑센터 안을 집에 갇힌 강아지처럼 빙글빙글 돌며 시간을 죽였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지겨워.' '뭐 하지.' '갈 데가 없어.' '도와줘, 구글.'
《더 나쁜 쪽으로》, 「비, 증기, 그리고 속도」
8.
"너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내가 말했다. "얼어붙은 흙냄새로 가득한 겨울밤의 공원. 그게 우리가 사는 삶이야. 우린 이미 귀신들이야. 우린 이미 무덤 속을 살고 있는 거야." 나는 너무 추워서 내가 무슨 말을 떠드는지도 몰랐다. "처음 만난 날 네가 나한테 그랬지. 같이 죽으러 가자고. 그건 농담이 아니었지? 맞아. 우리는 함께 죽을 거야. 그때까지 무덤 속 귀신들 처럼, 그렇게 함께 헤매 다닐 거야."
《더 나쁜 쪽으로》, 「비, 증기, 그리고 속도」
9.
요즘 기분이 어떠세요, 언니?
죽고 싶지 않으세요, 언니?
저는 요즘 더 보이 위드 디 아랍 스트랩을 듣는데, 그럼 더 죽고 싶어진다고......
언니, 언니는 자해해보셨어요?
언니, 자해에는 어떤 칼이 좋아요?
언니, 술 먹고 모르는 남자랑 섹스해본 적 있어요?
언니, 언니는 왜 살아요? 왜 안 뒈지고 계속 살아 있어요?
《더 나쁜 쪽으로》, 「세계의 개」
10.
인간들이 봄날의 황사같이 무기력하게 쏟아져 있다.
《더 나쁜 쪽으로》, 「세계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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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마구 욕 하고 싶을 때, 그런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절망하고 싶을 때, 꺼내보곤 하는 책이야.
톨들한테는 어떻게 읽혔을지 모르겠다.
좋은 밤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