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경호원으로 시작, 교제 허락받아”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 아들에게 보통 사람의 삶 보여주고 싶어 항소
⊙ “참을 수 없는 모욕당했지만, 아내 지켜주고 싶어”
⊙ “돈을 요구한다, 술을 먹고 폭행했다”는 소문은 거짓
⊙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명예를 위해 소송
⊙ 어려웠던 아들 이제야 내 아들로 느껴
1999년 6월 말 혼인신고를 마쳤다.
6월 14일 서울 압구정동의 음식점에서 만난 임우재(46) 삼성전기 고문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임 고문은 이부진(44) 호텔신라 사장과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다. 지난 1월 이혼·양육권 소송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抗訴)했다. 오랜 소송에 지쳐 있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여유 있는 모습으로 기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임 고문과의 만남은 언론인들과 가볍게 점심을 하면서 평소의 소회(所懷)를 이야기하기 위해 임 고문 측이 마련했다. 언론과의 접촉을 부담스러워했고, 본인도 인터뷰가 아닌 인간관계를 쌓는 것이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소송 중인 관계로 재판과 관련된 이야기는 피했으나, 평소 자신에 대해 잘못 알려진 소문에 대해서는 해명했다.
특이한 것은 이날 참석한 언론매체였다. 월간지로는 《월간조선》, 주간지로는 《시사인》, 신문으로는 《한겨레신문》, 해외매체로는 일본의 《월간문예춘추》였다. 월간, 주간, 일간, 해외매체까지 다채로운 구성이었다. 기자들 역시 처음 만나는 관계로 명함을 교환하며 인사를 나눴다.
대체로 언론 등을 통해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는 내용이 많았다. 임 고문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지만 재판 중이라 미안하다”며 “추후 신변이 정리되면,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점심식사를 하며, 자신에 대해 잘못 알려진 소문들에 대해 부담 없이 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계속되자 오랜 기간 숨겨 놓았던 속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인터뷰라기보다, 친구를 그리워하는 보통 사람 같은 대화였다. 재판과 별도로 임 고문의 인생역정을 들으면서 화려할 것만 같았던 재벌가 맏사위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됐다.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보통 사람의 삶’
2월 임 고문은 1심 판결에 불복하며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A4용지 2장 분량으로 작성해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아버님을 비롯해 저희 집안 내의 대부분의 식구들이 아들이 태어나서 면접교섭권 허가를 받기 전까지 단 한번도 보질 못했다’ ‘아들이 처음으로 라면을 먹어 보았고, 떡볶이·오뎅·순대가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등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당시 임 고문은 이러한 현실을 알리며 ‘보통 사람들의 삶’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이번 언론인들과의 만남에서 임 고문은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 그러나 임 고문은 자신의 과거를 오히려 밝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몸에 맞지 않는 답답한 옷을 벗어 던지고 싶어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설명이다.
“장인어른(이건희 회장)의 경호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삼성가 사람들을 경호원으로 처음 만난 것이죠. 그러다 아내(이부진)를 경호하게 되었어요. 삼성물산 전산실로 입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룹에서 관리해서 그렇게 된 것이죠.”
임 고문이 이건희 회장 경호원 출신이라는 사실은 소문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면, 다양한 소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부진 사장과 결혼까지 이르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임 고문은 “아내가 젊었을 때 몸이 좋지 않았다”며 “지켜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치료 등을 목적으로 3년 동안 일본, 중국 등을 다니면서 애정이 싹텄다고 고백했다.
“아내가 치료차 일본, 중국 등을 다녔어요. 경호원 신분으로 같이했는데, 24시간 같이 있었던 것이죠. 연애하면서 지켜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어요. 등 떠밀려 결혼한 것은 아니에요. 처음에는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죠. 그러다 해외를 다니게 된 계기로 장인어른이 교제를 허락했어요. 그러면서 아내의 건강도 좋아졌죠. 아내의 건강이 좋아지면 언제든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장인어른이 결혼하라고 했어요. 거역할 수 없었어요.”
집안 차이로 결혼 망설여
처음 재벌가 맏사위로 받아들여졌을 때의 심정에 대해 “좋은 대학도, 집안도 아니었고,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하기 싫었다”며 “마음씨 좋은 아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은 “동생(이서현씨)이 결혼을 서두르자, 이건희 회장이 언니(이부진)가 먼저 결혼하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겠다”고 해 결혼까지 이르게 됐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임 고문은 스스로 보통 서민 출신임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본인이 말한 대로 “낙천적인 성격은 본성”이었다. 특히 다음의 부분에서 크게 공감이 됐다.
“어쩌다 재벌가 사위가 되었지만, 집에서 일하는 분들이 저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운전하시는 분, 집안일 도우시는 분 등을 한 번도 하대해 본 적이 없어요. 밖에 나가서 음식도 같이 먹고 싶고 그랬어요. 저도 경호원으로 시작했는데 뭐가 다르겠어요.”
부사장 월급을 받고 살았을 뿐
사람들은 삼성가의 사위로 들어와 삼성그룹의 주요 직책을 거치면서, 임 고문이 큰 부를 일구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세간의 예상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친동생이 있어요. 평범하게 살아요. 보통 사람처럼요. 제가 도와주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 왜 못하느냐고 물으시겠죠. 저는 지금까지 평범한 월급쟁이였어요. 크게 많은 돈을 받은 것이 아니었어요.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여유가 없었어요.”
의외의 현실이었다. 임 고문은 이러한 현실과 함께, 자신을 억지로 포장해야 하는 현실에 힘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혼 전부터 그런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몰려왔는데 힘들었다”며 “그나마 배우기 쉬웠던 일본어를 익혀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었으나, 장인께서 미국 유학을 권해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경영대학원(미국 MIT)을 다녔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임 고문은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하루 14시간 영어 공부를 했다”며 “낙천적인 성격으로 학창시절, 대학 재학 시절에 크게 걱정하지 않고 지냈고, 영어가 약해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미국 MIT 경영대학원에 입학한 후에도 삼성가 맏사위라는 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힘들게 버텼음을 털어놓았다.
이렇듯 힘들었지만, 반대로 아내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이런 부분 역시 결혼 생활을 힘들게 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아내는 대원외고에서 전교 1등을 했고 영어·불어에 능통했다”며 “토플 시험 등을 꾸준히 보게 했는데, 점수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 고문은 항상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느끼고 당했을 스트레스의 정도를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담담하게 그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등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었음을 이야기했다. 특히 자살을 기도했던 호텔까지 찾아와 아내가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도 이야기했다.
참을 수 없는 모욕당해
그렇다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작에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임 고문은 “조용히 물러나려 했다”며 “참을 수 없는 모욕 때문에 재판을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술을 완전히 끊게 된 이유도 언급했다.
“제가 돈을 요구한다거나, 술을 마시고 아내를 때렸다고 하는데 정말 아니에요. 우리 부부가 사는 집에 18명이 근무했지만 그 누구도 제가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어요. 증거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도 자꾸 저를 이상하게 몰고 가니 화가 나요.”
그가 당했다는 모욕은 무엇인가. “삼성 고위 임원이 저에게 ‘옛날에 부마(駙馬)가 잘못하면 산속에서 살았다’고 모욕하기도 했다”며 서운했던 경험들을 털어놓았다. 또 “너무 화가 나서 JY(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도와달라는 문자를 보냈다”며 “형님(이재용 부회장)이 그냥 나가라면 나가겠으나, 이렇게 모욕하지는 말아달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자 부탁에 이 부회장은 “초심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일이 해결될 것이다”는 추상적인 내용을 답문으로 보냈다고 기억했다.
내 아들도 어려워
그렇다면 임 고문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이혼을 피하려 하고 있으나, 아내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은연중에 암시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애착은 정말 컸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억눌렸던 설움을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폭발시키는 것 같았다. 아들 이야기가 자신이 털어놓는 이야기의 반 이상이었다.
“아들을 어려워하는 아버지를 상상할 수 있나요. 이건희 회장님의 손자이기에, 아들이 어려웠어요. 친할아버지·할머니가 자신의 손자를 9년 가까이 한 번도 못 봤다는 것이 이해가 되나요. 사실이에요. 저도 아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못했어요. 이혼 재판을 진행하면서, 면접교섭권을 갖게 되어 이제야 편하게 아들을 밖에 데려가고 있어요. 아들이 라면을 좋아해요. 라면도 먹고 그래요. 그런데 1심에서 아들을 한 달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게 했어요. 너무 억울해요.” 원래 임 고문은 아들을 한 달에 두 번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이를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였다.
이렇듯 어그러진 상황 속에서 이부진 사장에 대한 원망을 간간이 드러냈지만, 기본적으로 아내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이야기는 극도로 자제했다. 대화 도중에 “지켜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하는 등 경호원으로 시작해서 그런가 묘한 보호본능이 남아 있는 듯했다. 칭찬도 간간이 했다. “합리적이고 똑똑하고 논리적이에요. 가족 중에 아내를 이길 사람은 없을 정도였죠. 아내가 잘되기를 바라요.”
점심이 끝나갈 무렵, 임 고문은 “나와 한 시간만 이야기해 보면 속마음을 알 수 있다”며 “기자든 누구든 솔직하게 모두 이야기하면 될 것 같은데, 재판 때문에 못 해서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특히 아쉬워했던 부분이 있는데, 자신의 배경을 처음부터 솔직하게 공개하고 삼성가의 일원이 되지 못한 부분이었다. 거기서부터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낙천적인 성격에 본인은 언제든지 공개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월간조선》은 삼성 측에 반론을 요청하였으나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
취재경위
6월 14일 임우재 삼성전기 고문과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김영준씨다. 조계종 승려로 법명은 ‘혜문’이었으나 결혼해 아이를 낳고 환속(還俗)한 인물로,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로 활동 중이다. 4월 22일 김씨는 기자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임우재 고문이 《월간조선》과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며 자신이 자리를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5월 24일 김 대표는 기자에게 “6월 14일에 임우재 고문과의 약속을 잡았다”고 통보했다. 서로 인사를 하며 친분을 쌓는 자리라고 했다. 김씨는 약속 하루 전날인 13일, 약속 당일 강남의 한식당 ‘고기고’로 오라고 알려주면서 일본 《주간문춘》 기자도 올 것이라고 했다.
5월, 기자는 김씨(혜문)에게 회사에 알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는 오히려 “보고하라”고 했다. 굳이 회사에 알리라는 말을 듣고 이부진 사장 측에 언론접촉 가능성을 흘려 압박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의심했다.
모임의 성격을 김씨(혜문)는 인터뷰가 아니라고 했지만 정황은 다르다. 우선 한일 대표 매거진 기자를 불렀고, 공교롭게도 양 매체의 원고 마감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인터뷰를 원하는 측이 하나의 매체가 아닌 여러 곳의 매체를 부르는 것은 외부 압력으로 기사가 나가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해외 매체까지 참여하면 어쩔 수 없이 보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14일 《월간조선》, 《주간문춘》이 아닌 《월간문예춘추》, 《한겨레신문》, 《시사인》 등 4매체의 기자와 임우재, 임씨의 지인 윤모씨, 김영준씨 등 7명이 모였다. 일간, 주간, 월간, 해외 매체가 모인 것이다. 참석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한겨레신문》과 《시사인》 기자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에 당황했다. 기자회견 상황에 돌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 고문은 “2~3달 후 재판이 끝나면 여기에 모인 기자들과 인터뷰하겠다”며 보도는 후로 미뤄달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기자들은 모두 동의했지만 이상한 점이 많았다.
가사 사건의 경우 원칙적으로 사건 내용을 공개적으로 밝히면 안 된다. 임 고문은 잘못 알려진 사실을 언론에 알려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성할 필요는 있으나, 정식으로 인터뷰를 해서는 안 되는 애매한 상태다. 점심 후 기자들이 모여 향후 일정 등을 명확히 하지도 않았다. 언론관행에 ‘엠바고’라는 게 있다. 기자들끼리 서로 합의·약속하는 과정이다.
그날 4개 매체 기자들은 각자 일정에 따라, 서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 《월간조선》은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해, 14일 늦은 저녁 보도를 결정했다. 당일 밤 11시 김영준씨에게 15일 《조선일보》에 관련 내용이 보도될 것임을 알렸다. 김씨는 이 사실을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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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노력하셨대 ㅋㅋ 그래서 조단위로 꿀꺽 하시고 싶으셨대
힘들어서 성접대 받았니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