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いきべくんば 民衆みんしゅうとともに、死しすべくんば民衆みんしゅうのために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먼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3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 시 출생
일본인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로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묵자의 겸애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본래는 검사였음. 그러나 생활고로 모자가 동반자살을 시도했는데 어머니만 살아난 사건에서
그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해야 하는 현실의 법률에 회의를 느끼다가 검사직을 사임, 변호사가 됨
이후에 일본 국내에서는 농민, 노동자, 부라쿠민을 위한 변호를 하고 국외로는 타이완과 한국 등 식민지 국민들을 위한 활동을 함....
특히 우리나라에서 독립유공자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계속 맡았기 때문ㅇㅇ
1911년에는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침략임을 규정하고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 그 글을 쓴 것 때문에 경찰에게 조사도 받음
1919년에는재일 조선 유학생들이 선포한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 송계백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호를 맡았고
1920년대에는 의열단원으로 일본황궁의 니쥬바시에 폭탄을 던진 이중교 투탄의거를 일으킨 김지섭의사의 변호를 맡음.
또한 관동대지진시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본군 계엄사령부와 경찰에 의한 "조선인 폭동조작"이었음을 비판함.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너무도 가혹한 비극이었습니다.
어떤 말로 추도하더라도 조선 동포 6000명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고....그러다가 치안당국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기도 함
가장 유명한 일은 1926년에 일왕 암살을 기획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았던 사건.
무려 덴노를 암살하려 한 반역죄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관심이 컸는데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했고,
둘의 옥중 결혼 수속도 대신 해주었다고 함.
가네코 후미코가 죽자 유골을 수습까지 해줌
(그밖에 총독부의 토지조사행위를 합법을 가장한 사기로 규정한 뒤, 땅을 빼앗긴 나주 농민들을 위해
510만평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기도 함)
한편 일본 내에서는 천민차별철폐를 위해 노력했고 특히 일본 공산당 탄압을 비판하다가 법정모독죄로 변호사 자격이 박탈됨
이후 신문지법 위반으로 징역형까지 살았고 광복 후엔 변호사 자격을 되찾아 재일 한국인들 변론을 많이 맡음...
1946년에는 한국을 위한 조선 건국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함.
행적 자체는 너무 훌륭한 사람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본인이라는 점과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추서는 미루어졌는데
결국 2004년에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을 받음. 물론 사후이기 때문에 손자가 대신 전달받았지
후세 다쓰지는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우리 변호사 포시진치(후세 다쓰지의 우리말 발음)”로 불린 사람이었고,
그 손자는 우유가 귀하던 시절 조선인 우유배달부가 꼬박꼬박 공짜 우유를 넣어줬던 걸 기억한다고.
재일조선인 유종목은 “선생님은 조선인에게 아버지와 형 같은 분이었고 구조선과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라는 말로 후세를 추모함.
그 외에도 후세 다쓰지는 일찍부터 조선의 지정학성 중요성을 꿰뚫어본 것인지, 조선에 대해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함.....ㄷㄷㄷ
두번째로 독립유공자가 된 일본인이자 후세와 함께 단 둘뿐인 일본인 건국훈장 추서자인 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
혹은 박문자(朴文子)라고도 함. (1903년 1월 25일~ 1926년 7월 23일)
일본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조선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부인
이 사람은 가정사가 매우 불우했는데, 아버지는 가정을 내팽겨쳤고 어머니도 딸을 싫어해서 호적에도 넣어주지 않았음.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일본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무적자, 비국민으로서 고통의 시절을 보내다 이후 친척이 사는 조선에 가게 되지만
거기서도 친척들은 가네코를 학대하고 잘 대해주지 않음. 되려 조선인들이 그녀에게 잘해주었다고....
그러다가 3 1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가네코는 권력에 맞서는 조선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그 독립의지에 공감하게 되지
(하지만 일본인 할머니는 그녀가 조선인과 어울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녀는 ‘죽고 싶을 만큼’의 구박을 받았다고 함.
가네코의 소학교 학적부에는 고막이 터지는 등 학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실제로 강을 보며 자살생각도 했다고 하니...)
이후 가네코는 일본으로 돌아와 사회주의, 러시아혁명 등에 대한 책을 접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고
조선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박열을 만나게 됨. 그러다 폭탄으로 일왕을 암살하려던 계획이 밝혀지고 박열과 함께 기소되지.
법정에서 야 너도 니혼진이잖아를 시전하는 판사에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함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저는 정말이지 이런 운동(조선독립운동)을
속 편하게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산처럼 펴냄).”
박열과 가네코는 옥중에서 혼인하고 가네코는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지만, 옥중에서 의문사하고 맘
사인은 자살이고 유언도 남겼지만 아무래도 석연찮은 점이 많다고 해....ㅇㅇ 묘는 2003년에 박열의 고향으로 이장되었음.
그리고 2018년 생을 마감한지 92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됨.....
영화 박열의 유명한 이 스틸컷은 실제 법정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것
이상 두 사람은 일본인임에도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사람들이고,
그외에 일본인이지만 제주 선운정사에 유해가 안치된 일본인이 있음. 후지키 쇼겐 대승정ㅇㅇ
오늘밤도 곡소리가 들려온다. 한숨 섞인 구슬픈 한탄 같기도, 눈물을 가슴으로 삼키는 듯한
먹먹한 읊조림 같기도 한 그 곡조의 이름은 아리랑이라 했다.
1941년 세계2차 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16세에서 20세 남짓한 조선의 어린 청춘들은 영문도 모르고 강제 징용, 징병되어 오키나와로 끌려옴
이때 이 학도병을 지휘한 일본인 학도병이 바로 후지키 쇼겐이었음
“비슷한 또래의 조선 아이들이 매일 밤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아리랑을 부르는 게 그렇게 애달프게 들렸대요. 처음에는 말이 안 통하니 손짓, 발짓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하다가 소통이 되니까 무조건 살아만 있으라고 말했대요. 먹을 게 없으면 흙이든, 풀이든 뜯어 먹으면서 무조건 살아 있으라고요. 그래야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말이죠.”
그는 대부분 10대였던 조선인들에게 "일본이 곧 패망할 거 같으니 조금만 더 견뎌보자"며 다독였다고 함.
하지만 740명의 학도병들은 결국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함....연합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며 일본군 소탕작전이 벌어졌고, 당시 바다로 떨어진 후지키는 운 좋게 목숨을 구했지만 초소로 돌아와 보니 모두 죽어 있었음.
그러나 일본군의 시신보다 더욱 처참하게 다가온 것은 하나같이 조선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죽어 있는 조선 학도병들의 모습이었다.....
“그때부터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분의 소원은 그거 하나뿐이었대요. 내가 반드시 740명의 영혼을 데리고 대한민국으로 가겠다. 그래서 고향 땅에서 편안히 눈감게 해주겠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지만 스님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말에 곧장 머리를 깎았고,
2014년 92세의 나이로 숨지기 직전까지 일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한국으로 보내는 봉환 사업을 추진함.
죽기 전에는 유언으로 "일본에서 돌아오는 한국인 전우들의 영혼과 함께 잠들고 싶다"며 제주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김.
그가 2013년 조선인들에게 쓴 편지 中
"진심으로 미안하다. 친구로서 전우로서가 아닌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한다"
.
그밖에 일본의 진짜 극극극소수의^^....양심적인 사람들은 극우들한테 진짜 존나 시달리면서 활동한다고 하긴 하더라....
당연히 그런 극극극소수의 일본인으로 일본인 미화하려고 이런 글 쓴 건 아니고^^;;(특히 본문 사람들은 국적 떠나서도 하기 힘든 일을 한 거라...)
뭐 진짜 위협받으면서도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사람들은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하는 거 맞는데,
근데 꼴랑 케이팝을 좋아하네 한국 좋아 해시태그를 올렸네 마네로 "그래 착한 일본인들도 많아. 일반화하지 말자...!"며
마음 약해질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봄.....다시 말하지만 우민화가 안 되고+양심적인 사람은 극극소수일 뿐임ㅠㅠㅠㅠ 휴
얼마 전에 시사이슈방 올라온 교수도 그렇고.
가끔 '한드 좋아하는 친한 일본인 친구' 이런 소리 하는 거 보면 걍 웃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