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상상한 시구아키의 미래는 퇴폐미 흐르는 고수위 피폐물이라 부디 아키토가 바람피워주길 바랐는데.......어나더를 보니까 꿈과 희망이 가득하더라고ㅠㅠ 아들도 참 착하더라ㅠㅠㅠ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ㅠㅠ
가정도 화목해보이고(할머니가 손주한테 칼빵 놓으려고 해서 엄마가 말리다 피 철철 흘리는 집안이지만) 아들도 착하고 이쁘고(병약한 체질도 물려받아서 비실비실하지만)...암튼 아이가 생겼으니 자식을 위해서라도 아키토가 한눈 팔 일이 없어보이고 고로 장르가 피폐물로 변할 일도 없어보이고...
으아니 작가양반 닫힌 해피엔딩이라니 이게 웬 말입니까 하고 광광대면서 꾸역꾸역 어나더를 보다보니 시구레가 많이 달라진 것 같더라.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은 아빠가 됐더라고... 정말 상상 이상으로
내가 보기에 시구레는 후르바에서 아주 드물게 토오루에게 감화되지 않은 인물, 더 나은 인간이 되지 않은 인물, 성장하지 못한 인물이었어(시구레가 자기도 나름 반성했다면서 아키토에게 도망칠 기회를 준 걸 난 시구레가 진짜로 변화하거나 성장한 걸로 안 봤어)
본편 엔딩 시점의 시구레는 아들이 생겨도 못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정한 사람, 신뢰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은 절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하거든ㅋㅋㅋ 본편에서도 등장인물에게든 독자에게든 절대 못 들어본 소린데....시구레 출세했구나ㅠㅠㅠㅠㅠ
어나더의 시구레가 좋은 사람, 좋은 아빠&남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겠지만 난 시구레라는 인물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서(시구레가 인격을 도야해서 모미지나 카즈마 같은 인격자가 되면 그게 바로 캐붕 아니냐...)
본편 엔딩과 어나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 같아서 궁금하더라. 아마 아키토의 임신과 출산이 그 키워드가 아닐까 싶어. 시구레가 변모할 정도로 멘탈을 뒤흔들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할 듯... 갓토오루 천사님도 못해낸 걸 아키토가 해냈을 수도...시구레는 주인말만 듣는 진돗개 같은 놈이라..
본편과 어나더 사이에 시구레가 울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생각하기에 시구레가 무너져내리며 울 것 같은 경우의 수가 딱 2가지인데 하나는 아키토의 생명이 달렸을 때- 이를테면 출산이 아닐까 싶어. 아키토가 그 약한 몸으로 순산했을리가... 아키토가 출산하다가 사경을 헤매며 숨이 넘어가는데 이러다 진짜로 죽을 것 같고, 자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키토를 살릴 수도 없다는 사실에 결국은 시구레도 공포, 무력감, 절망, 패닉을 느끼고 말았을 듯. 생전 울어본 적이 없으니 우는 법도 모르고 자기가 우는 줄도 모르면서 그냥 본능으로 울지 않았을까
시구레가 다른 사람들을 자기 소설 속 캐릭터마냥 좋을대로 움직이면서 죄책감을 못 느끼고 다른 사람한테 진정어린 공감을 못하는 게 얘가 태어날 때부터 뒤틀려있고 소패 기질이 심해서 그렇잖아. 근데 아야메가 미네를 사랑하게 되고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부당할까 하는 공포심을 느껴보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자각한 것처럼 시구레도 본편과 어나더 사이에 더 많은 감정을 경험하고나서 변모한 게 아닌가 싶어
물론 시구레는 아야메보다 훨씬 심각함. 아야메는 사랑을 못느껴본 상태로 여학생한테 상처준 거지만 시구레는 유년기부터 미친 사랑을 해왔으면서도 그랬음. 글구 진짜 마음까지 움직이는 사람은 오직 아키토뿐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을 것 같음. 책에서 본 대로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행동하고 머리를 굴려서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여전하겠지
시구레는 그런 경험을 해도 보통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고 그로 인해 보다 성숙하게 남들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할 수 있게 되고 그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며 더 풍성한 관계를 이끌어낼 수 있는 수준까진 도달하지 못하고 애초에 본인이 딱히 원치도 않고 그럴 필요성도 못 느낄 듯
근데 시구레의 감정의 스펙트럼에 새로운 감정들이 들어가고, 공포나 절망 같은 감정도 그냥 책 보고 알고 머리를 굴려서 유추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몸으로 겪어보면 좀 더 부드러워질 수는 있을 것 같아
앤 아키토가 잉태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랑과 슬픔을 느끼고 아키토가 커가면서 관계에서 희노애락 같은 기본적인 감정이랑 배신감, 질투심 같은 것도 느꼈는데 두려움(특히 패닉이 올 정도의 공포)이나 절망감, 비참함은 본편 엔딩때까지 못 느껴본 것 같아
부모 사랑도 딱히 원치않고 십이지라는 것도 별로 상처가 아니었다는 비브라늄 멘탈인데다 부모님도 멀쩡하고 집안도 부유하고 절친도 둘이나 있고 누가 괴롭히거나 못살게 구는 것도 아니고...생애에 딱히 굴곡도 없고
얘가 수집한 감정의 정보들이 워낙 협소하고 느껴본 감정도 빈약하다보니..사랑하는 아키토가 본편 내내 공포와 불안에 몸부림치고 시구레마저 무서워하는데도 강강강강으로 몰아친 것도 (아키토에 대한 애증도 있고 S끼가 심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그게 얼마나 힘든지를 몰라서 그랬나 싶다. 미리 알았더라면 최소한..아키토 상자를 훔치게 사주했을 때 한 정도로 혹독하게 몰아붙이진 않았을 듯
어나더에서 철이 든 건 아키토가 시키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아키토를 대하는 것도 그렇고 아키토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그 감정선을 확장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원래 그냥 시구레 혼자였으면 끝까지 못 느꼈을 수도 있는 감정들이지만 아키토를 대상으로는 느낄 수 있으니까. 청각이 둔해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보청기를 거쳐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아키토를 매개체로? 아키토를 통해서 좀 더 많이 경험해본 게 아닐라나
시구레는 보통 사람 기준으로는 "다정한 사람, 신뢰할 수 있고 의지가 되는 아빠"에 못 미칠 것 같아. 사람들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기질도 여전할 것 같고 인성도...인격을 갈고닦아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가 남들보다 많이 낮을 듯. 끝까지 아키토 쳐돌이고 아키토가 제일 특별하고 영원히 독점하고 싶어할 것 같아
하지만 시키를 제 나름대로 많이 사랑한 것 같아. 아키토를 영원히 독점한다는 평생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해온 시구레가 생전 처음으로 온전히 존재 그 자체로 소중히 한 사람, 아키토와는 다른 의미로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보통의 아빠라면 이 정도로는 문제많은 수준이지만 시구레의 최대치고 최선이고 아키토랑 시키도 그걸 알기에 다정한 사람이라고 한 게 아닐까. 시구레가 어렸을 때부터 눈치 빠르고 다른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한 것처럼 시키도 영특한 듯. 게다가 얜 정상인이니까 시구레보다 더 뛰어날 것 같거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