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들끼리도 여행 가면 많이 싸운대."
"당신이랑 내가 싸움이 돼?"
"왜 안 돼? 의견이 안 맞으면 싸우는 거지."
"예를 들면."
"난 이걸 보고 싶은데, 넌 저걸 보고 싶으면."
"이걸 보면 되지."
백구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미간을 좁힌 백사가 큼, 하고 다시 말했다.
"난 이걸 먹고 싶은데, 넌 저걸 먹고 싶……."
"이걸 먹으면 되지."
"야."
가슴이 간질거리기도 했지만 너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오히려 신빙성이 떨어지기도 했다.
내 말 자르지 말라는 듯 짐짓 엄중하게 백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려던 백사는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말을 가로채였다.
"난 당신하고 못 싸워. 고작 먹고 보는 게 뭐라고 싸워."
KO패다. 백구가 앞으로 한 달간 못된 짓을 한다고 해도 다 이해해 주고 싶을 만큼 방금 것은 울림이 컸다.
우지혜 <11336> 中
"그거 아냐?"
모달이 여전히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난 너를 싫어하지 않아. 이형산을 미워하지 않은 것처럼 너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가 은록의 마른 뺨을 스윽 어루만졌다.
"처지가 그래서 무시했을 뿐이야. 내 몸 가눌 형편도 안 되는데 누굴 좋아하는 일은 우습잖냐.
더구나 이형산은 자기 것에 욕심내는 자를 좋아하지 않아.
난 그의 노비로 들어왔고 주인의 법을 따라야 살 수 있으니 무던히 모르는 척 외면한 것뿐이었어.
그래서 그랬다. 네가 미워서가 아냐."
멍한 은록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놀랍고 생소해 두 눈만 깜빡였다.
"내 말 이해했냐?"
"응? 으응."
"확실해?"
"전부 다 이해했어."
이해하긴. 넋이 나간 얼굴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말이다."
먹은 물은 고작 작은 한 모금. 나머지는 먹기 전 맹렬히 혀를 찾아 사납게 날뛴 모달 때문에 전부 입 밖으로 흘렀다.
"생각보다 더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모달이 은록의 입가 옆으로 흘러내린 물방울 위에 입술을 댔다.
"너란 주인에게 말이야."
이윤주 <해중림> 中
"현수 씨는, 내 세계예요. 그러니까 나 이용해도 되는데…….
날 맘대로 해도 되는데……. 그런데 내가, 분수도 모르고, 주제도 모르고……."
가슴 위로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의 앞에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리며 저를 본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동아줄을 바라보듯.
"그건…… 지효야. 신이네. 내가 너의 신이란 말이네."
"현수 씨……."
"난 말이야. 그냥 여자일 뿐이야.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냥 평범한 여자.
이기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이고, 자존심 세고, 겁쟁이에, 비열하지.
네가 말하는 그런 좋은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고."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웃을 수 있는 스스로를 경멸했다.
"내가 특별해서 좋다고 했지? 그런데 나는 조금도 특별하지가 않아.
네가 만나 온 다른 사람들과, 다른 여자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어.
내가 너한테 내준 건, 다른 누군가도 쉽게 건넬 수 있는 그런 얄팍한 거야.
내가 너한테 해 준 건 다른 누군가도 해 줄 수 있는 그런 가벼운 거라고.
넌 예쁘고, 착하고, 아름다운 남자 애야. 그런 너를…… 좋아하는 건, 조금도 특별한 게 아니야."
"그렇지 않아요! 현수 씨는, 현수 씨는……!"
"난 네 신이 되어 줄 수가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중략) 왜 달콤하게, 상냥하게, 널 안아주면서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말해 주지 못 하는 건가.
왜 그렇게 못해 줄까, 뜨거워지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로봇처럼.
김수지 <우리 집에는 쥐가 있다> 中
"다른 핑계 더 없어요?"
"피, 핑계가 아니라. 현실적인 생각을 한 거지."
"나랑 결혼하기 싫으면 더 부지런히 생각해 봐요. 안 되는 이유."
담담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에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서리는 그를 응시했다.
뾰로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안 되는 이유를 대면?"
"내가 되게 만들게요."
유정의 곧은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짐을 한 손에 몰아 쥐고는, 다른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는 서리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나는 언젠가 꼭."
손등에 키스하듯 따뜻한 입술이 닿는다.
작은 초코 크림의 웅덩이를 짧게 빨아들인 유정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떠 서리와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당신이랑 살고 싶으니까."
우지혜 <네가 온 여름> 中
민호는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천천히 눈물이 괸다.
"용감하게 헛소리를 찍어 보낼 땐 언제고, 왜! 왜 구질구질 내 앞에서 쥐어짜고 이래요."
갑자기 으르렁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민호가 펄쩍 뛰어 일어나려는 순간 몸이 확 바닥으로 처박혔다.
아니, 바닥이 아니었다.
탄력이 느껴지는 무언가에 머리를 박고,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냄새를 맡고서야,
민호는 누워 있는 사내의 가슴으로 억세게 끌려 들어간 것을 알았다.
몸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한 팔 힘이 등에서 느껴졌다.
"울지 마, 울지 말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지껄이면서 뻔뻔하게 눈물 내지 마세요."
쏘아붙이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들려 하자 뒤통수가 강하게 눌렸다.
뺨과 입술에 따끔거리는 감촉이 지그재그로 미끄러졌다.
축축한 뺨을 소맷자락으로 문지르는 움직임에는 수만 갈래의 감정이 무섭게 압축되어 있었다.
"차라리 화가 나면 분이 풀릴 때까지 욕을 해요. 번번이 말도 없이 내빼서 속을 뒤집지 말고!
답답하면 말을 하고, 미안하면 사과하고! 어차피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왜 내빼기부터 해요?
내가 어제 문자 받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기나 해요?"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한 방법이 별로 없……."
"딴소리는 하지 마세요. 늦었어. 한참 늦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웅웅대는 목소리가 민호의 귀를 파고들었다.
"나, 사람들한테 당신하고 결혼할 거라고 말 다 했어요.
당신하고 싸운 김 사장은 입이 워낙 싸서 벌써 인사동에 소문이 다 퍼졌을 거예요."
"어어……."
"어제 오빠들하고 숙부님들한테도 다 못을 박아 뒀어요. 내가 당신 남자라고.
이제 다른 남자가 더 잘생겼다고 한눈만 팔아 봐요.
또 이렇게 엉뚱한 소리 지껄여 봐요. 그땐 가만 안 둬요."
얼치기로 협박을 하는 사내의 목이 꿀럭꿀럭 크게 움직였다.
"당신을 바로 인정 못 해서 미안해. 창피해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장마철 습기를 먹은 한지처럼 축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는 말도 없이 그렇게 나가 버리지 마세요. 당장 짐 싸서 다시 들어오세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물 한 모금 못 마셨단 말입니다."
윤소리 <타임 트래블러 얼굴 없는 미인도> 中
시트를 쥐어뜯으며 입술을 짓이기는데, 머리 위에서 쇳소리가 섞인 공허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너를 생각해 왔어."
맥은 멈칫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넋이 빠진 얼굴로 무기력하게 양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리프탄이 고해성사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단 한순간도, 너를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
네가 나라는 놈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때도… 나한테는 너뿐이었어."
"아…."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씁쓸하고 짜디짠 눈물이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황량한 눈동자 위에 제 모습이 아스라이 비쳤다.
"너를 바라면 바랄수록, 허무해지고, 비참해지기만 하데도… 그만둘 수가 없었어."
리프탄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생각했어. 이제 그만두자고. 너를 생각할수록 나는 고독해지기만 해.
누구와 함께 있어도, 나는 혼자야. 오늘에야말로 집어치우자.
다가갈 수도 없는 사람을 바라는 일 따위, 이제 그만두자.
그렇게 결심하고 또 결심해도… 정신 차리고 보면 늘 너를 쫓고 있었어."
그가 이마 위에 주먹을 누르며 질끈 눈을 감았다.
"꼭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너를 만나고부터,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어. 어떻게 네가 아무것도 아닐 수가…."
맥은 철벽처럼 두꺼운 그의 어깨가 가늘게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지켜 오던 것을 적에게 내어 주고만 패잔병처럼, 그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 위태로운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맥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가슴께에 끌어안았다.
김수지 <상수리나무 아래> 中
에이미는 볼을 장밋빛으로 물들인 채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연인을 구경하다 툭 내뱉었다.
"반지 안 찾아도 쟤들 문제없을 거 같지 않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레슬리는 미트볼을 하나 집어먹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비누의 행방이 갑자기 궁금해져서 말이야. 이 뒤에 잡아 놓은 일정 있냐?"
"일정이야 늘 바뀌는 거지."
에이미가 가방에서 구깃구깃해진 지도를 꺼내 레슬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난 널 안내하려고 헥사 시에 온 거니까, 일정은 네가 정해야 하는 거야. 바보 레슬리."
레슬리가 웃었다.
"그거 마음에 드는 소린데."
-nigudal <에이미의 우울> 中
좋아하는 로설들만 발췌했어
생각날때마다 볼 겸 겸사겸사 정리한건데 다시 재탕하고싶어진다ㅎ
에이미의 우울은 로설로 분류되어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로설은 아니라고 생각
그냥 소꿉친구 두 명의 케미가 너무너무 좋아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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