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심하게 있습니당 주의 주의 주의
난 영화가 엄청 찝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고 시원해서 놀랐어. 기생충의 전체 구성은 시원하게 쭉 정방향으로 밀고 나가더라고. 그 점은 좋았는데 각각의 무리들을 그려내는 방식이 처절하고 구질구질하고 짠해서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랬어.
이제서야 기생충 리뷰들을 보고 있는데 내가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했나? 이런 생각도 들더라. 영화가 찝집하게 느끼지 않았던 이유도 영화가 어느 정도는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서거든.
기생충은 기우가 커다란 사기극의 "계획"을 짤 때부터 누군가가 죽는 필연적인 구조라고 생각했어. 영화 분위기가 시종일관 그렇게 유도하는 것도 있지만, 기택이가 말하기를 자신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계획을 세우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고, 그 때 사람이 죽기도 하고, 이재민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그래서. "계획"을 세우면 반드시 어그러지고 누군가가 죽게 되겠구나 싶었어.
나는 기택이네한테 "계획"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생각했거든. 기택이네한테는 계획을 세우지 않고 하루 하루를 만족하며 살아가는게 그나마 심리적으로 안정감이라도 취할 수 있을텐데. 계획을 세우는 순간 기대치가 생겨나고, 그로 인한 절망감이 생겨나기 때문에. 기택이는 무의식적으로 그걸 감지하고 살았던 게 아닐까.
기생충은 "선을 넘으면 안된다"를 시종일관 강조하는데 이게 일종에 죄와 벌을 가르는 잣대라고 생각했어. 기우는 선을 넘는 "계획"을 시도했고, 그 때부터 기우는 벌을 받아야 속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 벌이 기택이가 박사장을 죽이고, 기정이가 죽는 거라고 생각했어. 기택이네뿐만 아니라 문광이네, 박사장네마저도 제각각의 이유로 선을 넘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죽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후반부만 남게 된 것 같아.
그런데 기생충은 모두를 죽이고 더 이상 비극으로 치닫지 않아서 의외더라. 기우는 시종일관 설계자로 나오는데 가족 단체 사기극을 만들 때도, 그리고 돌을 들어 문광의 남편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것도. 기우는 마음 속으로 항상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장 역할을 해야한다는 압박감, 책임감이 있어 보였어. 기생충에서 가장 "가장"다운 모습이 기우이기도 하고. 그런데 기우가 돌을 끌어안고 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때 기택이가 각성이 되었던 것 같아.
기택이는 항상 계획없이 사는 게 마음이 평탄하다는 걸 삶을 통해 익힌 사람이고, 그 전까지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은 하나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기우가 돌로 사람을 죽일 계획을 흘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기택이는 알았을 것 같아. 박사장의 행동이 시발점이 되긴 했지만 기택이가 결국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자신의 딸이 죽어가는데도 차키를 달라고 채근하는 행동이 그 순간 기택이에겐 박사장이 선을 넘는 거였기 때문이고, 코를 막는 행위를 보는 순간 기폭제가 되어 터진 듯 싶어. 자식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기택이가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각성하게 되었고, 자식의 손에 피를 묻히기보단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힌 게 아닐까. 충숙이도 마찬가지. 딸이 죽어가는 걸 보고 분노하게 되어 결국 문광의 남편을 찌르니까.
나는 이 영화가 계층 뿐만 아니라 가족간에서도 숙주와 기생충이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아. 기우와 기정이가 이 집안에 실질적인 가장이고, 집 내에서 숙주를 맡고 있고, 기택이와 충숙이는 그들에게 심리적으로 재정적으로 의지하는 기생충이라고 생각했거든. 계층간의 숙주-기생충과는 다른 관계고 의미지만. 기택이와 충숙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들이 벌을 받고 나서야 그들이 부모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걸 기택이가 가장 크게 짊어지게 된거고. 선을 넘는 "계획"을 세우는 순간 벌을 받는 건 필연적인 통과의례라고 생각했어. 죄를 짓고 벌을 받아야 죄가 사해지기 때문에.
또한 의외였던건 기택이가 박사장을 죽이는 걸 성공했다는 거였어. 그게 가장 비현실적이면서 희망적인 엔딩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 하층민들은 살아가면서 기우처럼 계획을 세우지만 항상 그 뜻대로 되지 않고, 계획이 틀어졌을 땐 대부분 비슷한 위치인 서로를 향하게 되는데, 오히려 기택이가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고 제거하려고 했으니까.
무엇보다도 기우가 깨어나고 아버지를 발견한 것부터가 희망을 준 것 같고. 기우는 깨어나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만 하는데. 뉴스를 보는 순간 아버지가 그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산 속에서 확인을 하게 되지. 아버지가 살아있는 걸 아는 순간 기우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고,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이지만 "계획"을 세워.
그 계획이 선을 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부정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된 거라고 생각했고. 마지막에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이라고 딱 엔딩을 내주는데. 기우가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상적인 꿈을 바라게 되는 걸 그대로 드러냈기보단, 언젠가는 기우가 자신의 계획이 비현실적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는 걸 암시했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기우는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아. 아버지가 살아있고, 아버지가 그 집에 있으니까, 아버지를 데려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게 될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그 계획이 누군가에게 기생하거나 선을 넘는 계획이 아니라, 숙주로서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담긴 계획이어서, 마냥 찝찝하진 않았어.
영화를 보면서 기분이 나쁘고 불편한 지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엔딩에서 감독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심으려고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내 생각이 너무 기우 측면으로 바라본 엔딩이지만... 어쨌든 감독이 뚝심있게 밀고 나가서 보는 나도 어떤 식으로 엔딩이 날지 기대됐어. 기우 입장에선 기정이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각성했기 때문에, 덜 찝찝하고 여운이 남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