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하!
https://www.dmitory.com/garden/45589888
지난번에 쓴 비에냐프스키 콩쿠르 글이 엄청난 추천수를 찍어버려서 당황했엌ㅋㅋ
다음글은 좀 느긋하게 올리려고 주제를 고르던 중이었는데 뭔가 빨리 연재(?)를 해야할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섴ㅋㅋㅋ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커플로 돌아왔음!
이건 사실 썰 풀기에도 좀 민망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라 여기서 아는척하기도 민망하긴 한데,
그래도 스테디는 스테디인 이유가 있으니까.
일단 영상 하나 보고 시작할게!
https://youtu.be/OPhkZW_jwc0
오늘 글의 주인공들 되시겠다.
처음에 등장하는 첼리스트가 바로 재클린 뒤 프레, 지휘대에 선 남자가 다니엘 바렌보임이야.
둘다 선남선녀고, 바라보는 눈길에서 꿀이 떨어지지? 화면비율로 바렌보임이 좀 길어보이는건 기분탓이니까 무시하도록 하자
이 연주 직후 재클린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교로 개종하고 바렌보임과 결혼해.
세기의 커플의 탄생이었어.
재클린은 영국 태생이고, 옥스포드 교수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어.
이름 때문에 프랑스인이라는 오해가 종종 있는데, 영국인이야!
4살에 첼로를 시작했고, 카잘스며 로스트로포비치를 거치면서 실력을 쌓았어.
1962년에 데뷔하면서부터는 승승장구했지.
62년에 런던 로열 페스티벌에서 데뷔하면서 연주한 곡이 첫 영상에 나오는 엘가 협주곡이야.
이때 존 바비롤리 경이 지휘를 맡았고, 뒤프레가 연주하는 걸 보면서 "This is it!" 이라고 외쳤대.
뒤 프레는 사실상 거의 첫 번째 여성 첼로 스타였어.
여성 첼리스트의 시초는 사실 포르투칼의 귈에르미나 수지아라는 사람이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음반을 남긴 최초의 여성 첼리스트였지.
파블로 카잘스의 연인으로 더 알려져 있긴한데, 그건 그녀 일생의 중요한 포인트도 아니니까.
중요한 건 수지아는 유언으로 자기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팔아서 자기 재단의 기금으로 쓰고, 국적과 관계없이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스물한살 이전의 첼리스트들에게 수지아 상을 수여하라고 했어.
그래서 1956년, 수지아 상의 첫번째 수상자는 열한 살의 재클린 뒤 프레가 됨.
재미있는 인연이지?
거기다 뒤 프레는 영국인이야.
영국은 늘 클래식 문화의 변방이라는 컴플렉스가 있었어.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을 배출하긴 했지만 독일이나 프랑스나 하다못해 이태리, 러시아의 아성에는 기도 못 펴지.
그런 영국에, 뒤 프레가 영국 작곡가인 엘가의 곡으로, 영국 지휘자 존 바비롤리 경과 런던에서 데뷔를 했네?
근데 그 연주가
대박이 남
엘가 첼로 콘체르토는 원래 1919년에 이미 작곡되었었고, 그해 런던의 퀸즈 홀에서 펠릭스 살몬드가 첼로를 맡고 엘가 본인이 직접 지휘를 해서 초연했어.
근데 초연은 영 신통찮았는지 반응이 그냥 그랬고, 이 이후에도 친구였던 해리슨 여사나 카잘스가 연주하긴 했지만 엘가가 죽을 때까지 저 곡은 빛을 못 봤어. 엘가도 그게 한으로 남았는지 죽기 전 병상에서 첼로 협주곡을 흥얼거리면서 자기가 죽은 후에 말번 언덕에서 이 선율의 휘파람 소리를 듣더라도 놀라지 말라고했대. 그게 자기일 거라고...ㅠㅠ
하지만 스무살도 안 된 소녀가 엘가 첼로 협주곡의 위상을 바꿔버렸지.
현대의 첼리스트들 중에 바흐를 전곡 해보지못한 첼리스트들은 있어도 엘가 협주곡을 안 해보고 지나간 첼리스트는 없어.
그정도로 첼로계의 필수 레퍼토리가 된 거야.
부작용이라면...
사실 찐톨은 뒤 프레의 연주스타일을 별로 안 좋아해.
모든 곡을 다 똑같은 스타일로 하거든. 나쁘게 표현하자면 거칠고 우악스러워.
하지만 엘가로 뒤 프레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지.
엘가 협주곡은 뒤 프레에게 딱 맞는 옷이었고, 뒤프레의 단점들마저도 장점으로 보이게 했어.
단언컨대 저 곡을 뒤 프레보다도 잘 소화한 사람은 없어. 아마 앞으로도 없을거야. 많은 엘가 협주곡을 봤지만, 다들 뒤 프레의 그림자 밑에 있는 느낌이더라.
여튼, 엘가협주곡의 센세이셔널한 성공으로 스무살의 아가씨는 영국의 스타가 됐어.
그때 뒤 프레의 별명이 '영국의 장미'였다니까?
지금으로 치면 거의 국민여동생 급인 거지.
https://youtu.be/ilXwGmq6sSQ
내가 좋아하는 영상. 연주여행가는 기차안에서 심심했는지 하는 장난인데 저 짧은 영상안에서 그녀의 성격이 고스란히 보여서 좋아함.
활달했고 항상 자신감이 넘쳤어.
연주하다 가끔 현을 끊어먹기도 함.
https://youtu.be/U_yxtaeFuEQ
3악장 시작하자마자 A현 끊어먹음. 29분부터 31분정도까지 보면 댐. 갠적으로 이 연주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헤프닝이 귀여워서...
이때는 신혼 직후. 현 파괴해놓고 졸라 침착한 뒤 프레와 그와중에 악장에게 가서 지적질하는 바렌보임과 해설자 아저씨의 차분한 아무말 대잔치
여튼 이렇게 승승장구를 달리던 여자는 또 다른 전도유망한 남자를 만나. 1966년 재클린 뒤 프레가 21살, 남자는 세살 연상의 다니엘 바렌보임이었어.
다니엘 바렌보임도 워낙 유명하긴 하지만 머글들을 위해서 축약해서 브리핑해볼게.
이 양반까지 꼼꼼히 뜯으려면 이건 포스팅이 아니라 논문됨ㅠㅠ
지금도 존ㄴㄴㄴㄴ나게 활동중이시라 실시간 업데이트 수준이셔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러시아계 유태인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원래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어.
열두살의 바렌보임을 본 푸르트뱅글러가 같이 연주하고 싶어할 정도로 탐냈지만 나치 홀로코스트를 겪은 바렌보임의 부모가 반대해서 둘의 연주는 무산되었지. 푸르트뱅글러는 나치 부역자였거든. 클덕들이 엔간한 병크에는 눈 하나 깜짝 안하는게 다 이유가 있다.
영감님 뉴욕필에서 상임하게 해드린다고 불렀는데 괴링이 건 내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연주 열번 딜에 넘어가서 나치 집권 내내 베를린에서 잘 먹고 잘 사셨음. 그래서 전쟁끝나고 연합군에서 푸르트뱅글러 잡아가는 바람에 상임지휘자 잃은 베를린 필 잠깐 새되고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지만 그건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이 야망 넘치던 청년은 그때부터 지휘자가 되고 싶어했었음.
그래서 뒤 프레와 만난 시기의 바렌보임은 이미 새끼 지휘자로 커리어를 시작한 단계였지.
사실 바렌보임의 음악 커리어에 뒤프레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 못함.
뒤프레의 거의 모든 연주에 다 참가하고 지휘했는데 그게 그의 지휘 커리어에는 어마어마한 발판이 되었거든.
당장 런던 심포니를 지휘 시작한 지 일이년 된 지휘자가 어떻게 맡아?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만나자마자 불같은 사랑에 빠졌는지 그 다음 해 뒤 프레는 집안의 반대와 소속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스케줄을 죄 취소하고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개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종교 율법에 따라 군대 위문공연도 갔어. 본격 바렌보임 영국의 연정훈 행 장미도둑놈
이후 뒤프레의 모든 공연에는 거의 바렌보임이 함께였지.
음반 녹음도 바렌보임과 하고.
https://youtu.be/mOLc1VGacq8
이건 음반 작업 하던 중간 쉬는시간에 찍힌 건데 마이크가 악기에 붙어있어서 뭐라는지는 잘 안들리지만
신혼의 달달한 분위기와 슛 들어가자마자 피튀기는 연주의 대비가 인상적이야.
이렇게 둘이 잘 살았습니다로 끝났으면 참 좋았겠지만,
둘의 행복은 너무 짧았어.
뒤 프레는 점점 손이 둔해지는 걸 느꼈고, 무대에서 실수를 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바렌보임은 무대를 망친 뒤 프레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냈다고 함.
그녀는 점점 무대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의사를 찾은 뒤 프레는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아.
그때 뒤 프레는 오히려 안도했대. 내 노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었다고. 내가 무능력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그 병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공포보다 안도가 먼저인 삶이란 어떤 걸까.
뒤 프레의 발병 후에 바렌보임과 뒤 프레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려.
연주를 할 수 없어진 뒤 프레와 달리 바렌보임은 점점 바빠졌으니까.
자세한 사정은 다 알 수 없지만 71년경 뒤 프레는 바렌보임에게서 떠나서 언니 힐러리에게로 가.
거기서 형부와 불륜관계가 됨....
후에 힐러리는 동생 피에르와의 공저에서 자기는 그 모든 사실을 알고있었지만 재클린의 회복을 돕기 위해서 묵인했다고 주장했어.
하지만 또 힐러리의 딸 클레어는 아빠가 상습적으로 바람피웠고 이모를 유혹했다고 주장해.
바렌보임의 반응이 좀 의외인데, 이미 알고 있었었는지 힐러리가 스캔들을 폭로한 뒤에 힐러리에게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 줄 인내심은 없었냐고 실망했다고 함.
그렇다고 바렌보임도 순정남은 아니었던 것이 결혼은 유지한 상태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와 두 아들을 본 상태여서...
뒤 프레에게 안 들키려고 애는 썼다지만 뒤 프레가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뒤 프레의 용인 하에 벌어진 불륜이라는 설도 있고.
1년 후 뒤 프레는 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바렌보임에게로 되돌아오지만 연주를 더 이어나가기는 불가능했고, 73년에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은퇴해. 이때 그녀의 나이 겨우 스물 여덟이었어.
다발성 경화증이라고 바로 죽는 건 아니어서 그녀는 한동안 후진양성도 하고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도 받아.
하지만 죽어가는 뒤 프레의 곁에 더이상 바렌보임은 없었어.
발병한 지 15년 만에 뒤 프레는 폐렴에 걸려서 의식을 잃었고 곁을 지키던 언니 힐러리가 바렌보임에게 연락을 해.
파리에서 내연녀와 함께 지내던 바렌보임이 달려왔고 재클린 뒤 프레는 힐러리와 바렌보임의 앞에서 숨을 거뒀어.
후에 힐러리는 회고록에서 바렌보임을 증오했지만, 재클린이 죽었을 때 그의 태도로 그를 용서할수 있었다고.
뒤 프레가 죽고 1년 후에 바렌보임과 바쉬키로바가 마침내 결혼을 해. 이혼을 하지않고 뒤 프레가 죽기만을 기다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알기로는 바렌보임은 자신의 첫번째 결혼생활에 대해서 입 연적이 없어.
여담인데 바렌보임에게 뒤 프레 사후 뒤프레의 무덤을 한번도 찾지 않는다고 비난이 폭주하자 바렌보임은 거따대고
난 내 어머니 묘소에도 안갔다 오오 패륜아 는 희대의 개새끼스러운 일갈을 날림...
그리고 패기로 중무장한 바렌보임은 후에 알리사 와일러스타인이라는 여성 첼리스트와 엘가 협주곡을 DVD 발매하는데,
참고로 이게 발매되었을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이랬다....
영상물 보면 관객들이 다 썩은 표정으로 앉아있음....
심지어 연주장소는 쉘도니안 극장.... 영국 옥스포드 한가운데ㅋㅋㅋㅋ
여윽시 이스라엘 한복판에서 바그너를 올린 패기는 어디가지 않는 것이다.-_-b
이 글의 포커스가 뒤 프레에게 맞춰져있어서 그렇지 찐톨은 바렌보임도 매우 좋아합니다
진짜야...
♬♬♬다음 포스팅 예고♬♬♬
https://youtu.be/vFw-zDkD3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