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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순씨(67)는 3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 손바닥만 한 작은 빨간색 파우치에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연기를 내뿜고, 물이 든 작은 병에 담뱃재를 톡톡 털고, 다시 한 개비 꺼내고를 반복했다.

“내가 밥을 잘 안 먹어요. 3일에 한 번 먹을까? 배가 안 고파. 그 대신 담배를 달고 살아요. 그리고 커피를 맨날 수십 잔 마셔요. 이걸 마셔야 안 불안하거든. 병원에 가면 동생이 의사 선생님한테 내가 커피랑 담배만 먹는다고 이르더라고.”

지난 1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기자와 만난 이씨는 “이렇게 되는데 40년이 넘게 걸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면서 “내가 갖고 있던 기억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게 규명된 거니까, 후련하고 좋았다”고 말했다. “다 살고 갈 때 되니까 인제는 국가가 인정해주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자신감 넘쳤던 스물셋, ‘여자로서 끝났다’ 생각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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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자랑이자 동네에서도 눈에 띄게 영특한 아이였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서너살 때 ‘천자’니 ‘소학’을 뗐대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기대가 정말 컸어요. 여자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공장으로 가는 게 당연한 시대였는데, 저는 고등학교까지 나왔으니 말 다 했죠.”

똑부러지고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그의 삶은 1980년 5월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스물세 살의 그는 남동생과 함께 광주에 살며 수예점에서 일했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은 그가 매일 출퇴근하는 길이었다.

“5·18 이전엔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그날 시민들, 학생들이 진압되는 걸 보고 저도 도청 앞으로 나간 거죠. 그 뒤로 도청이랑 YWCA 건물을 오가면서 밥을 지어 나르고, 상무관에서 시신을 닦으면서 도왔어요. 일부러 골목골목 다니면서 다친 사람들이 있는지도 살펴보고요. 고등학생 세명을 우리 집에 데려와서 붕대 감아주고, 치료해주고, 옷 싹 빨아서 집에 돌려보내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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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에게 붙잡힌 건 5월 27일, YWCA 건물 1층 주방에서다. 전날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더니 새벽에 요란한 총소리가 귀를 때렸다. 같이 있던 대학생이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걸 봤다. 혼비백산한 이씨는 “사람이 총에 맞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구타가 계속됐다. 그때 하복부에 심한 구타를 당했다. 밖으로 끌려 나와 지프차를 타려고 한 발을 들어 올렸을 때 엉덩이 뒤편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몸을 찔렀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자 다시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대로 까무러쳤다가 깨어났을 땐 국군광주통합병원 복도였다.

“병원에서 계속 하혈을 했고, 닦을 것 좀 달라고 하니 그런 건 없대요. 옆에 쓰레기통을 보니까 다른 환자들이 감고 버린 붕대가 쌓여 있길래 그걸 아래에 대서 쓰고 버리고 했어요. 그때 어떤 군의관이 ‘대검으로 찍었구먼’ 하더라고요. 그제야 내가 뭐에 찔린 건 줄 알게 됐죠.”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된 뒤에도 이씨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사람이 많아서 끼어 자야 했고, 2인당 한 개씩 나눠주는 모포는 그가 흘린 피로 딱딱하게 굳을 정도였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돌아온 건 생리대가 아닌 신문지였다. “악취가 난다”라며 “하혈이 멈출 때까지 화장실에 있으라”는 모욕도 함께였다.

그는 구금 한 달여 만에 훈방됐다. 한 달에 월경을 3주나 하고, 약을 먹어도 통증이 멈추지 않아 집 앞 산부인과를 찾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진 못했다. “병원 다닐 여유도 없고, 돈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의사였는데 다시 가서 또 거길 보여주는 것도 싫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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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몸’이 됐다고 생각한 건 어느 날 목욕탕에 갔을 때다. “때를 밀어달라고 하고 누워 있는데 세신사가 ‘이거 왜 이렇게 생겼냐, 이런 사람 처음 본다’고 한 거예요. 치료를 제때 안 하니까 상처가 자기 마음대로 나으면서 이상하게 된 거지.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알았으면 때를 안 밀었는데…. 그 뒤로 목욕탕엘 안 가요.”

일련의 경험은 이씨가 삶 전체를 바라보는 인식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등학생 땐 서울 명동 길거리에서 누가 연락처를 물어볼 정도로,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표했다”며 “그런데 사건 이후로 남자친구가 생기는 것도, 나한테 누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두려웠다. 내 피해를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궁 적출 수술까지 하게 됐고 ‘여자로서 끝났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산부인과에 다시 가봤어요. 내가 누굴 만나 결혼하거나 애를 낳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그랬더니 병원에서 안 된대요. 이미 석회화돼서 들어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구나, 하고 돌아왔죠. 그리고 상대방한테 말했어요. ‘너랑 사귀는 건 안 될 것 같아. 친구나 하자’고요.”

그는 지인의 아들을 입양했다. 결혼하지 않은 데다 일정한 직장이나 수입도 없어서 현재 ‘동거인’으로 살고 있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현재 20대 중반의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 역할’을 한 건 이씨다. 그는 “아들은 내 삶의 증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아들을 키우냐고 하는데, 나는 여자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왜냐면 내 삶이 안 좋으니까. 딸을 키웠다가 나 같이 되면 어쩔 거야. 그래서 지금 아들이 너무 좋아요.”

시선·낙인 두려워 이야기할 수 없었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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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를 인정받을 수도, 사람들의 시선과 낙인이 두려워 이야기할 수도 없었던 과거는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종일 커피와 담배만 달고 사는 것도 후유증의 일부다. 수술 뒤에 이씨는 “스스로 자궁 없는 병신 같다”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쓰지도 않을 생리대와 월경 팬티를 샀다. 주위에서 ‘자궁 없는 여자는 사람 구실 못한다’고 수군댈 것 같아서다.

그는 2018년부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재발성 우울 장애로 진료받았고, 지금도 매일 8종류나 되는 약을 먹는다. 그래도 푹 자는 건 고작 1시간 남짓이다. 이씨는 “항상 뒤척이다가 똑같은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상무관에서의 꿈이다. 바닥에는 시신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걸 보는 자신이 있다. 죽은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물을 알코올 솜으로, 물 묻힌 천으로 계속 닦는 꿈이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내밀한 피해 경험에 관해 얘기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이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몰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참 미웠나 봅니다. 여동생이 ‘처녀 농군’이었어요. 전두환이가 농촌지도자상을 주러 오는데, 군청에선 내가 언니인지 몰랐던 거예요. 비상이 걸렸죠. 동네 이장이 나한테 고향에 오지 말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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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 눈을 피해 기도원 등을 돌아다니다가 쫓겨나듯 미국으로 갔다. 그는 기존 혈연, 지연 등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의 단절을 경험하는 2차 피해를 입게 됐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집에다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큰 돈이었던 700만원을 마련한 아버지는 브로커에게 돈을 보냈고 이씨는 비자를 받아 뉴욕으로 갔다. 그는 그곳 식품점에서 일하며 살았다.

“미국 가라고 할 때는 안 서운했어요, 좋았어요. 왜냐면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으니까. 사건 이후에 동네 사람들이 ‘가시내한테 글을 가르쳐서 집안이 망했다, 진작 돈 벌러 공장 보내지’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다른 식구들이 손가락질당한다는 죄책감이 컸죠. 항상 어떤 기준에 못 미친다는 생각 때문에 쭈뼛거리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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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재작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첫째 딸은 마지막까지 투명 인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씨는 “임종 직전까지 내가 돌봐드렸는데, 마지막 숨 직전에야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내 봤다”고 말했다.

“나는 살면서 우는 건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눈물은 한 방울도 안 흘렸어. 그래도 좀 원망했어요. 그때 아버지를 꽉 잡고, 나한테 말 한 마디만 하고 가라고 화를 냈어요. ‘아버지, 내 이름 한 번이라도 불러볼 걸, 안 불러서 미안하다고 해. 잘못했다고 해. 그럼 내가 용서해줄게. 아무 말 없이 이렇게 가면 안 되지. 아버지도 힘들었지만 나도 힘들었어, 진짜로 힘들었거든.’”

이씨의 이야기는 강간만이 성폭력 피해라고 보는 견해가 얼마나 좁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회복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평생 그날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그를 괴롭혔던 것도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점, 누군가 얘기를 들어주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었다.

https://www.khan.co.kr/national/gender/article/202405130600141
  • tory_1 2024.05.13 17:59
    가슴이 갑갑해지네. 1차 사건을 포함해서 뒤에 이어지는 모든 일들까지 너무…
  • tory_2 2024.05.13 18:01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이야기 전해주신 용기에 감사하다
  • tory_3 2024.05.13 18:02
    ㅜㅜ너무 마음아파..
  • tory_4 2024.05.13 18:04
    아ㅠㅠㅠ 너무 너무 맘 아프다ㅠㅠㅠ
  • tory_5 2024.05.13 18:09

    마음이 아프다

  • tory_6 2024.05.13 18:09
    ㅠㅠㅠㅠㅠㅠㅠ
  • tory_7 2024.05.13 18:10
    아 진짜 마음아프다 ,,,,,,
  • tory_8 2024.05.13 18:33
    너무 마음 아파ㅠㅠ
  • tory_9 2024.05.13 18:43
    마음 아파 ㅠ
  • tory_10 2024.05.13 18:46
    에휴..... 슬프네
  • tory_11 2024.05.13 18:54

    마음아파ㅠㅠㅠㅠㅠ

  • tory_12 2024.05.13 19:20
    눈물난다 ㅠㅠ
  • tory_13 2024.05.13 19:27
    너무 마음이 아파ㅜㅜ
  • tory_14 2024.05.13 19:34
    아프다ㅠㅠ
  • tory_15 2024.05.13 20:00
    슬프다ㅠ
  • tory_16 2024.05.13 20:21
    대체ㅜ이런 일이 있다는 걸 난 왜 이제야 알았지…..
  • tory_17 2024.05.13 20:26
    동네사람들과 가족의 2차가해까지 끔찍하다....
  • tory_18 2024.05.13 20:28
    ㅜㅜ
  • tory_19 2024.05.13 20:28
    아휴 참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아픈사건이다. 너무 나빠 정말 싸가지없게도 자연사를 하다니
  • tory_20 2024.05.13 21:51
    ㅠㅠㅠㅠㅠ
  • tory_21 2024.05.13 23:15
    너무 슬프다 아픈데 치료도 제대로 못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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