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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dmitory.com/img/202405/7r2/8uY/7r28uYGmFqgEeaa0IuAikw.jpg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옷에 대한 책을 마감하던 때였다.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호기로운 다짐을 책 제목에까지 그대로 옮겨 실은 나의 첫 책.
오랜 기간 무수히 많은 옷을 사 왔지만, 매일 아침 나는 ‘오늘은 또 뭐 입지’라는 피로한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옷을 소비해도 단 하나 나 자신만은, 내 삶만은 오롯이 내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형형색색의 옷들 속에서 색채를 잃어가는 듯했다.
(생략)
그런데 소비냐 존재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그러니까 소비하지 않고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이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당키나 할까. 그것은 마치 이미 도로, 전기,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하와이의 한 시골 숲에 들어가 살며 ‘나는 자연인입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나무에 열린 커피 열매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도 매일 같이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내려 마시고, 엄마 아빠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서울에서 본가까지 전달하기 위해 꽃 선물을 퀵으로 주문하는 내가, 과연 소비하지 않고 오롯이 존재할 수 있을까.
스스로 답하지도 못할 질문에 대한 칼럼을 주제로 글을 이어가기로 했다는 결심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소비냐 존재냐라는 언어화된 질문 아래, 사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졌던 큰 웅성거림이 작은 소음으로 쪼개져서 들리기 시작했다. 많은 ‘평범’했던, 사실은 굉장히 수상했던 그 일상들에 ‘이건 내 몫이 아니었어’ 하고 선을 그을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생일에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많이 받지 못한다고 인생을 헛살았다 좌절하지 않게 되었으며, 해마다 새로운 굿즈를 쏟아내는 스타벅스 컵 앞을 서성이지 않게 됐다. 나의 삶마저 물고 뜯고 씹는 소비의 대상으로 전시하던 인스타그램은 (잠시) 중단했다. 부단히도 ‘존재’하려는 작은 시도였다. 나의 삶을 다른 어떤 것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내 안에 품으려는 시도.
우리는 옷 한 벌을 구입하면서도 오롯이 존재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감정마저 쉽사리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하여 소비냐 존재냐는 질문의 답이 항상 ‘구매 중단’ 혹은 ‘경제 활동 종료’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래서 존재한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매일 새로운 옷을 사 옷장을 갈아 치우는 대신 옷 한 벌 한 벌의 깊은 가치를 충만히 느끼는 것이다. 환경을 염려한다는 이유로 프라이탁 제품을 소비하는 대신 그 가치를 진심으로 지지하기 위해 소비하지 않기를 선택하며 새로운 방식의 지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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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라는 에세이 저자의 칼럼인데
프라이탁(재활용한 천으로 가방만드는 회사)는 대표적 예시로 든거고 결국 환경보호는 “사지 않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는게 공감가서 가져왔어
어떤 친환경 제품을 소비하더라도 소비하지 않는것보다 더 친환경은 없을테니까!
여름옷 쇼핑하려고 했는데 반성이 되는구만…
https://img.dmitory.com/img/202405/7r2/8uY/7r28uYGmFqgEeaa0IuAikw.jpg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옷에 대한 책을 마감하던 때였다.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호기로운 다짐을 책 제목에까지 그대로 옮겨 실은 나의 첫 책.
오랜 기간 무수히 많은 옷을 사 왔지만, 매일 아침 나는 ‘오늘은 또 뭐 입지’라는 피로한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옷을 소비해도 단 하나 나 자신만은, 내 삶만은 오롯이 내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형형색색의 옷들 속에서 색채를 잃어가는 듯했다.
(생략)
그런데 소비냐 존재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그러니까 소비하지 않고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이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당키나 할까. 그것은 마치 이미 도로, 전기,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하와이의 한 시골 숲에 들어가 살며 ‘나는 자연인입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 나무에 열린 커피 열매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도 매일 같이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내려 마시고, 엄마 아빠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서울에서 본가까지 전달하기 위해 꽃 선물을 퀵으로 주문하는 내가, 과연 소비하지 않고 오롯이 존재할 수 있을까.
스스로 답하지도 못할 질문에 대한 칼럼을 주제로 글을 이어가기로 했다는 결심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소비냐 존재냐라는 언어화된 질문 아래, 사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졌던 큰 웅성거림이 작은 소음으로 쪼개져서 들리기 시작했다. 많은 ‘평범’했던, 사실은 굉장히 수상했던 그 일상들에 ‘이건 내 몫이 아니었어’ 하고 선을 그을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생일에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많이 받지 못한다고 인생을 헛살았다 좌절하지 않게 되었으며, 해마다 새로운 굿즈를 쏟아내는 스타벅스 컵 앞을 서성이지 않게 됐다. 나의 삶마저 물고 뜯고 씹는 소비의 대상으로 전시하던 인스타그램은 (잠시) 중단했다. 부단히도 ‘존재’하려는 작은 시도였다. 나의 삶을 다른 어떤 것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내 안에 품으려는 시도.
우리는 옷 한 벌을 구입하면서도 오롯이 존재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감정마저 쉽사리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하여 소비냐 존재냐는 질문의 답이 항상 ‘구매 중단’ 혹은 ‘경제 활동 종료’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래서 존재한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매일 새로운 옷을 사 옷장을 갈아 치우는 대신 옷 한 벌 한 벌의 깊은 가치를 충만히 느끼는 것이다. 환경을 염려한다는 이유로 프라이탁 제품을 소비하는 대신 그 가치를 진심으로 지지하기 위해 소비하지 않기를 선택하며 새로운 방식의 지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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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라는 에세이 저자의 칼럼인데
프라이탁(재활용한 천으로 가방만드는 회사)는 대표적 예시로 든거고 결국 환경보호는 “사지 않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는게 공감가서 가져왔어
어떤 친환경 제품을 소비하더라도 소비하지 않는것보다 더 친환경은 없을테니까!
여름옷 쇼핑하려고 했는데 반성이 되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