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너와 헤어지고 난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자살 충동이 드는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그런데 그때 네게 편지를 받았다. 보낸 주소 없이 온 편지 봉투에는 네 이름 석자만 적혀있었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
잘 지냈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마 잘 못 지낸 거겠지.
그리고 내가 아직도 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을 알려주는 건 바보같은 짓인데. 이런 건 우리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너나 나나 서로 막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타입은 아니었잖아) 혹시나 네가 나를 다시 만나고 싶을까봐 보내.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이 아래 글을 읽어.
하지만 정말 그때만큼의 감정을 그때보다 더 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정말 간절한 게 아니라면 굳이 추천해주고 싶지는 않아.
이마저도 너에게 보이는 나의 배려 중 하나라고 생각해.

그러니 명심해. 굳은 결심을 한 게 아니면, 웬만해서는 아래 글을 읽지 마. 읽기만 해도 해야겠다는 감정이 들 수 있으니까. 안의 글을 다시 옮겨 쓴 거라 효력은 덜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충동이 없지는 않을거야. 너는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필요하지 않으면 여기서 이걸 태워버려.



이제부터는 너와 내가 다시 만나는 방법이야. 처음부터 다 읽지 말고, 숫자 하나하나 읽으면서 바로 따라해. 끝까지 미리읽지마. 절대. 네 정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편지를 들고서 적힌대로 따르면 돼. 밖에서 굳이 편지를 조심스럽게 숨겨가며 볼 필요는 없어. 사람들은 남의 편지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만약 가진다면 그들은 너를 응원하면 응원했지 저지하지는 않을테니까.

0. 준비할 것들은 아래와 같아.
물 1L
내가 주었던 선물(크기는 상관없어.)
치약과 칫솔
1만원권 10장
귀마개나 이어폰 같은, 주변 말을 들리지 않게 해줄 물건
붉은 실
고기 500g

그리고 이걸 따라할 때는 흰색 원피스를 입어.

1.너랑 네가 자주 걷던 돌담을 기억해? 귀마개를 하고서 그 돌담에 손을 대고 쭉 따라 걸어. 내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이때 바로 돌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면 그저 평범한 풍경만 있을거야. 어떠한 의미도 없을거고 그날은 그만 포기해야해. 그날의 기회는 날린거야. 그러니 너와 내가 갔던 스파게티 집이 나올 때까지 그냥 걸어.

이때 주변에 경찰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 원래도 그랬잖아. 만약 그들이 파란 옷을 입고 있다면, 마주치지 않는 걸 권해. 말을 거는 것 같거든 듣지 말고 그냥 혼자 산책 왔고, 네 자유라고 말해. 어쩌면 그들이 너를 돌려 보낼 수도 있어. 그럼 그날은 그냥 포기하고 다음 날에 와. 하지만 옷이 검은색이라면 괜찮아. 말을 절대 걸지도 않을거고.

2.너와 내가 갔던, 우리의 이탈리안 스파게티집이 나온다면 귀마개는 빼고 붉은 실을 네 팔목에 감고서 그 안으로 들어가. 거기 2인석에 앉아서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이 가게 주인에게 이탈리안으로 하나 달라고 해.

그러면 아마 주인이 ‘증명하십시오.’하고 말할거야. 그때 내가 주었던 물건을 보여줘. 그러면 조용히 이탈리안 스파게티를줄테니까.

3.이탈리안 스파게티는 꼭 다 먹어. 토핑이고 소스고 그냥 다 먹어. 중간중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야. 그래도 이건, 우리가 되기 위한 거니까. 그래도 못 참겠으면 그때는 네가 가져온 물을 마셔. 가게 물을 마셔서는 안 돼. 스파게티집의 물은 널 위한 게 아니야.

4.다 먹었다면 주인에게 1만원권 2장을 먼저 건네. 분명 마음에 안 들어할거고, 그러면 2장을 더 건네. 남은 6장은 나중에 주인에게 쓸일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인에게 웬만하면 이때 다 주지 않도록 해. 안전한 게 언제나 좋잖아.

5.그러면 주인이 알아서 너를 화장실로 보내줄거야. 화장실에 거울이 있다면 주인에게 다시 안내해달라고 화를 내고. 거울이 없으면 들어가 양치를 해. 거의 다 됐어.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저물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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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에는 잉크가 번진 흔적이 있고 첫번째 장은 거기서 찢겨 있었다.


——————————————————————

너는 바로 다음 내용을 원하겠지만 내가 조금의 감상을 적어도 된다면. 원래 곁에 있으면 비슷해진다잖아.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우리 같았으면 느끼지 않았을 것까지 느낀다니까. 


그러니까 하고 싶었던 말은, 나도 어쩌면  같아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제부터는 편지를 웬만하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마. 볼때는 너 혼자만 있는 곳에서 읽어. 정말 아무도 없는지 구석구석확인해야해. 그건 동물의 형체를 한 것도 포함이야.


이제 그 다음으로 할 일들이야. 네게 통하기를, 간절히 바래.

1.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인이 아닌 종업원에게 1만원권 5장과 함께 내게 받았던 선물을 건네. 그리고 ‘이전의 것을포기하겠습니다.’하고 말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마. 내가 널 아끼는 걸 알잖아. 그러니까 그냥 해. 네 생각을 집어넣고 최대한 무시해.

2.종업원이 네게 술을 두 병 건네줄거야. 그러면 하나는 바로 마시고 하나는 네 몸에 부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거 아닐까 생각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덧붙이자면, 그들은 네가 거기서 죽거나 고기를 꺼내지만 않는다면 관심없을거야.

3.그리고 가게 문을 열면 해가 떠 있을거야.

3-1.만약 안 떠있다면 다시 들어가 종업원에게 가위를 부탁해서 붉은 실을 끊어버려.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살아줘.

4.나오면 바로 주변에 있는 옷가게에 들어가 최대한 화려한 색의 상의를 사서 입어. 1만원권 1장 남았잖아. 그걸 사용해.

5.가게에서 나와 다시 돌담에 손을 대고 걸으면서 파란 경찰을 찾아. 찾았고, 아직 붉은 실을 안 끊었다면 그들에게 끊어달라고 부탁해. 그리고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해. 그들이 아직 인류애 비슷한 감정을 네게 느끼길.

4-1.이때 절대 검은 경찰을 보지 마. 너는 불안한 상태일테니, 그들을 마주치는 건 위험해. 그들이 보이면 눈을 감고 숨을참으며 발소리에 집중해. 네가 듣는 발소리는 그들 것밖에 없을테니까 걱정하지마.


그 뒤는 간단해. 파란 경찰이 네게 다 알려줄거야. 그리고 고기 500g은 경찰에게 무조건 건네고.











그 뒤 일은 잘 예상 못하겠지만, 집에 잘 갔겠지. 그러면 나를. 나를 잊어. 우리가 되는 방법따위는 없었던거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 편지를 태워. 내가 원망스러워 죽었으면 한다면 상관 없고.

나는, 네가 우리가 안 됐으면 좋겠어.








처음 느껴보는 거라,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 말을 빌려서
사랑해.
——————————————————————-

  • tory_1 2023.07.17 17:07

    어 뭔가 슬픈 소설 한 편 읽는 느낌이다

  • tory_2 2023.07.18 12:59

    나는, 네가 우리가 안 됐으면 좋겠어



    이거 뭔가 슬퍼....

  • tory_3 2023.07.19 11:35

    이거 그거랑 비슷하다 <나를 잃었을 때 열어 봐>

  • tory_4 2023.07.22 08:17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12/02 11:24:22)
  • tory_5 2023.07.27 10:58
    처음엔 너와 나가 우리인 줄 알았는데, '우리'는 화자가 속한 다른 종족이었던 모양이네. 중간에 글자가 번진 건 '우리'라면 느끼지 않았을 인간의 감정에 동화되어 눈물흘린 거고..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슬펐나 보네
  • tory_6 2023.07.30 00:15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12/28 01:11:35)
  • tory_7 2023.07.31 16:12

    22...

  • W 2023.08.01 09:11
    @7

    나는 편지를 쓴 게 괴이고 편지를 받은 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봤어! 사람이 괴이가 되는 법을 알려주다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걸 느끼고 다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느낌으로 읽었당

  • tory_9 2023.08.08 15:58
    붉은실을 끊어달라고 애원해야한다니 슬프다ㅜㅜㅜ
  • tory_10 2023.08.25 12:28
    나는 괴이 혹은 저 글을 쓴 화자랑 읽는 이가 붉은 실로 엮인 것으로 봐선 이미 하나가 되어서, 죽어버린 화자랑 더이상 얽히지 않도록 독자만 살 수 있는 방법을 적어주었다고 생각했어... 여러 해석이 있는데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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